1. 간밤에 내 논문을 위해 뭔가를 조사하다가 <사상계>라는 잡지를 이해하는 것이, 현재 한국 내 문학제도의 관행을 이해하는 데 굉장히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riss에 들어가 보니 <사상계>에 대해서 상당히 연구가 많이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2. 사상계는 <동방미디어>라는 사이트에서 그냥 (도서관 학외접속 없이) 원문을 열람할 수 있다. 세로 쓰기 크리가 있다는 것이 좀 그렇긴 한데.
3.1953년대 사상계 목록을 죽 보니까, 당시에는 해외 문단의 critical essay 같은 것을 정말로 한줌이긴 하지만 그래도 비교적 실시간으로 번역해서 소개하고 있다. 그에 비하면 현재 한국의 문예지라는 것은 더더욱 북한화(=고립화) 된 게 아닐까.
4. 학술서가 많이 번역된다고 능사가 아니다. 일상어나 저널리즘의 언어라는 저변 위에서 학술 언어가 발전하는 것일텐데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한국은 기형적인 구조가 있어서 그런지 일상어나 저널리즘의 언어를 충분히 번역해 본 적이 없는 빈곤한 토대 위에서 학술서만 생뚱맞게 많이 (그것도 충분히 많이는 아니지만), 일상어나 저널리즘의 언어 번역의 저변과 거의 연관을 맺지 못한 채로 번역 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눈대중이지만.
아무튼 그래서 이런 현상의 폐해는, 한국어에서는 사용해 본 적이 없는 복잡한 구문을 차근차근 옮기는 경험이 collective한 차원에서 축적되지 못한 채로 (내가 '번역어 문장들의 collective accumulation'이라고 부르고 싶은 이 현상에 대해서는 시미즈 이쿠타로, <논문 잘쓰는 법> 1장 참조) 학술서만 번역되다 보니 질낮은 번역이 범람하게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질이 낮지 않더라도, 일상어나 저널리즘의 언어와 유리된 고립된 언어로서의 학술어 (그것이 꼭 나쁘다는 것은 아니고 심지어 꼭 필요할 때도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또 완전히 유리되는 것도 그 나름의 폐단이 있다고 생각해 왔다) 번역을 낳은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5. 늘 그렇듯이 남이사 어떻게 살든 솔직히 내 알바 아니고, 그래서 나만의 아카이브라도 만들어 보면 어떠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만들어 왔던 지난 기록을 돌아보니 마놀라 다기스, 에이오스콧 같은 사람이 주옥 같은 영화 비평을 많이 썼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내 마음에 드는 것들의 리스트를 만들어 볼 수 있겠던데, 그것들을 하루에 단 한 단락이라도 내가 번역을 해 보면 어떠려나. 나 자신의 pleasure를 위해서. (사실 어제 한 단락 해보았다)
2019.1.25. 12:10-20.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