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世贞文学研究

역파(郦波 Li bo, 1972.4.17.~ ). 남경사범대학 부교수.

 

*간략 목차

 

서론

1장 시가창작론

2장 산문창작론

3장 문학사상론

4장 정치와 문학

 

부록1 왕세정 간보(簡譜)

부록2 왕세정 작품 연표

 

주요 참고서목

 

*세부 목차

 

서론

1장 시가창작론

1절 현실주의적 악부시 창작

2각의노두(刻意老杜)’에서 불필진종(不必盡宗)’까지

3응중(凝重)’유동(流動7언시 창작

4편법, 구법, 자법과 왕세정 시의 ‘격조’미

5선학(善學)’제체개비(諸體皆備)’의 시가 창작 풍모

 

2장 산문창작론

1절 학자형의 산문 창작 풍격

2절 근엄하고 주도면밀한 창작

3《사기》를 모범으로 삼아 인물의 풍신(風神)을 묘사한 기전문(紀傳文) 창작 (71)

4절 정()과 경() 둘다 승한 유기문 창작

5절 법도에 맞는 응용문 창작

6성령을 드러내는 소품문 창작 (90)

 

3장 문학사상론

1복고 이론의 형성과 ‘후칠자’의 결맹 (96)

2절 복고이론의 집중적 표현: 예원치언

3문필진한’과 ‘시필성당’

4성정(性情)’설과 복고론

5·속이 융합한 희곡 이론: 곡조(曲藻)(132)

 

4장 정치와 문학

1절 가족의 영향과 왕세정의 문학관, 정치관의 기초 형성

2절 엄숭과 왕세정의 쟁투와 왕세정의 문학적 명운

3절 고·장과 이견과 왕세정의 만년정론

 

부록1 왕세정 간보(簡譜)

부록2 왕세정 작품 연표

 

주요 참고서목

 

---------------------------

郦波, 王世贞文学研究

 

绪论(4)

 

第一章 诗歌创作论 (24)

第一节 现实主义的乐府诗创作

第二节 从刻意老杜不必尽宗的五言律诗创作

第三节 凝重流动的七言律诗创作

第四节 篇法句法字法与王诗的格调(45)

第五节 善学诸体皆备的诗歌创作风貌 (51)

 

第二章 散文创作论 (60)

第一节 学者型的散文创作风格

第二节 严谨缜密的论说文创作

第三节 宗法史记》、写人风神的纪传文创作 (71)

第四节 情景两胜的游记文创作 (78)

第五节 中矩合度的应用文创作

第六节 时见性灵的小品文创作 (90)

 

第三章 文学思想论 (96)

第一节 复古理论的形成与后七子的结盟 (96)

第二节 复古理论的集中表现——《艺苑卮言

第三节 文必秦汉诗必盛唐

第四节 性情说与复古论

第五节 雅俗交融的戏曲理论——《曲藻(132)

 

第四章 政治与文学 (137)

第一节 家族影响与王世贞文学观政治观的初步形成

第二节 严王之争与王世贞的文学命运

第三节 与高张之隙及王世贞的晚年定论

 

附录一 王世贞简谱

附录二 王世贞作品年表

主要参考书目

 

*목차

1장 서론

218세기 진한고문론의 형성배경

318세기 진한고문론의 전개 양상

4장 진한고문의 특징과 조선에서의 전개 양상

518세기 진한고문의 실현양상

618세기 진한고문론의 문학사적 의의

 

*세부목차

1장 서론

 

218세기 진한고문론의 형성배경

1) 18세기 진한고문론의 전사

(1) 역대 고문운동

(2) 조선 문단에서 진한 고문의 대두와 흐름

2) 진한고문론 관련 도서의 유통

(1) 진한고문 선집의 유통과 실상

(2) 전후칠자 산문의 독서와 수용 양상

3) 상고적 세계관의 심화와 확대

4) 중화계승론의 대두 및 전후칠자와의 동질감

 

318세기 진한고문론의 전개 양상

1) 진한고문론 중심의 독서관 확산

2) 성리학적 재도론에서의 일탈

3) 송풍에 대한 비판 및 문장 수준 고양 의지

4) 고문학습과 감응·자득·창신의 조화

 

4장 진한고문의 특징과 조선에서의 전개 양상

1) 선진양한 산문의 문체적 특징

2) 진한고문식 글쓰기의 계승과 변용 양상

 

518세기 진한고문의 실현양상

1) 신유한-기굴미와 사체(史體)의 추구

2) 이용휴-고기(古氣)의 재현과 교시(敎示)

3) 유한준-진한고문의 문예미와 정신의 계승

 

618세기 진한고문론의 문학사적 의의

 

-내용은 추후보충

*박사논문 요지

 

본 논문은 17세기 전반에 1) 명과 조선의 문학 교류 및 2) 조선 문단에서 명 문학의 수용 방식, 그리고 3) 그에 관해 행해진 조선 한시에의 인식의 변화에 대해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특히 본 논문에서는 이 세 가지가 상호 연계되어 있음에 주목하여, 그 관계를 밝히는 것을 주안점으로 한다. 그 결과, 이 시기의 명과 조선의 문학 교류가 일방적인 문화 전파와 수용이 아니고,상호 문학에 대한 관심에 기초하여 진행된 쌍방적교류였던 것을 확인하였다. 또한 조선 문단의 명 문학 수용도 무조건적인 수용이 아니고, 기존에 조선 문단의 전통에 부합하는 비판적이고 독자적 방식으로 행해진 것임을 밝혔따.

최종적으로는 이상의 교류와 수용에 관하여 조선 문인이 조선의 한시를 돌아보면서, 그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을 논하였다. 이상의 결론에 대하여 이상의 결론에 이르기까지 우선 양국간의 문학 교류에 관한 문인들의 교류, 교류의 경로 등, 문학 주변부에 주목하여, 당시의 문화교류의 구체적 양상을 파악하고자 한다. 또 명 문학의 수용에 관련하여, 서적의 유입과 재편집의 과정을 추적하여, 조선 문단이 명 문학을 수용하는데 있어서, 비판적 관점에 기초하여, 취사 선택하여 받아들였던 양상을 고찰하는 것을 지향하였다.

본론의 연구대상은 크게 세 가지 부분으로 나뉜다. 곧 첫 번째로 17세기 전반에 행해진 명-조선 간 문학 교류의 구체적 양상에 대하여, 두 번째로는 조선 문단에 있어서 명 문학의 비판적 수용 방식에 대하여, 세 번째로, 그에 기초하여 나타난 조선 한시에 관한 인식의 변화에 대한 것이다.

1부에서는 명과 조선 문인의 교류와 문학 교류 활동을 주 대상으로 삼아, 당시에 양국의 무학 교류 활동의 실태를 고찰하였다. 양국 문인의 교류 활동에 관하여 본 논문에서 주로 다루는 시기는 일본의 전쟁이 끝난 1598년부터 광해군 시대가 끝나는 1623년까지로 한정하였다. 본 논문에서 특히 이 시기에 주목한 이유는 그 다음 시대의 역사적 배경이 되기 때문이다.

1592년에 돌연 일본의 침략을 받은 조선 정부는 명 조정에 원군 파병을 요청하게 되었고, 그해 12월에 명으로부터 대규모의 군대가 조선에 파견되었다. 명의 원군에 의해 전세가 역전되었는데, 1593년에는 일본과 강화 교섭에 들어갔고, 전쟁은 휴전을 맞았다. 하지만 1597년에 일본에 의한 2차 침략이 행해져, 명 조정도 다시 군대를 파견했다. 그 후 1598년에 종전이 되어, 명군은 1600년까지 순차적으로 조선으로부터 철수하게 되었는데, 그로 인하여 몇 년이고 조선에 체류하였고, 2차에 걸쳐서 조선에 파견된 일에 의하여 명 장수들과 그 휘하의 명 병사들은 조선 생활에 적응하면서 조선 사회와 문화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전쟁 종결 후 1598년부터 1600년 사이가, 가장 집중적으로 조선의 것을 배우려는 시기였다. 그렇게 됨에 의하여 본 논문에서는 1598년부터의 교류 활동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 이래로 광해군 시대(1608~1623)가 막을 내린 1623년의 인조반정을 하한선으로 하였다. 결과적으로 말한다면, 본 논문에서 가장 주목한 시기는 선조 말기부터 광해군 시대이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이 시기는 200년여에 걸쳐 안정을 지켰던 조선 사회의 질서가 전란을 겪어 붕괴되었고, 정치·경제에 있어서도 비상한 곤란을 맞은 시대였다. 그렇지만 한 방면, 문화와 사상의 방면에서 오랫동안 사회적으로 안정되어 경직된 분위기로부터 탈피하여, 새로운 변화를 모색할 수 있었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특히 명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하여 들어온 새로운 문화사상은 조선 지식인들에게 종래의 고착된 하눈 태도로부터 벗어나 다양한 학파의 이론에 접하는 기회를 주었다.

외교 면에서도 광해군 시대는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유지의 정책을 취한 시기였는데, 명과의 의리보다 현실적 상황에 대응하여 실리를 취한 시기였다. 그런 현실적 이념에 편향된 시대적 분위기 가운데, 조선 문인들도 학문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가장 개방적인 태도를 보여줄 수 있었다. 그래서 인조 반정 이래 조선 지식인 사회가 명과의 의리를 강조하였고 성리학적 질서를 강화하는 등 보수화 된 데 비하여, 상당히 다른 면이 보인다. 또 중국과의 교류에 대해서도 인조 반정 이후 새롭게 성립된 청조를 오랑캐의 나라라고 낮춰 보아 문화 교류를 거부한 데 비하여, 광해군 시대에 활동한 중국과의 교류 활동은 비상한 주목을 요한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고려한 위에 본고에서는 전쟁이 끝난 1598년부터 인조 반정이 행해진 1623년까지의 명과 조선의 문학 교류 활동에 착목하였다.

 

그럼 여기서부터 본 논문의 구체적 진행에 관해 설명하겠다. 우선, 전란 이래부터 17세기 전반까지 행해진 명과 조선의 문인의 교류와, 문학 교류의 구체적 양상에 관하여 고찰하였다. 당시 조선 문인이 명 문인과 교류할 수 있었던 것은 명 사행과 明使·명 장군의 접반 활동이 유일한 기회였다. 1부에서는 이 사행이나 접반과 같은 외교 활동을 통해 행해진 문학 교류 활동에 관하여 고찰하였다.

1장에서는 명 문인들의 조선 방문에 의하여 조선 문인들이 그들과 교류하는 기회를 얻은 접반 활동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이 시기의 접반 활동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전통적 접반 활동으로서의 明使 접대 활동이고, 두 번째는 이 시기의 특별한 사례가 되는 명 장군들에 대한 접반 활동이다. 하지만 이 장에서는 명사 접반활동을 고찰하였고 명 장군에 대한 접반에 관해서는 제3부에서 다루었다.

사신접반 활동에 대해서는 17세기에 들어와 1602, 1606, 1609년의 3회에 걸쳐 명나라 문관 출신 사신들이 파견되는 역사적 사실에 주목해, 그들을 접반하는 가운데 행해진 양국 문인들의 교류와 정보 교환에 대해 고찰하였다. 이것을 통해 양국의 교류가 일방적인 문화 전파나 수용이 아니라 상호 관심에 기초하여 쌍방향적으로 성립된 것을 확인하였다. 또 접반 초기에 행해진 양국 문인들의 교류가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그 후 수십년에 걸쳐 계속적으로 행해진 것을 밝혔다. 후대의 친교는 이 때 이래 양국 외교 문제 해결에도 큰 역할을 하여, 그들의 문학 교류를 통하여 양국 문단에 여러 작품이 소개 되는 등, 후세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던 것이 확인된다.

다음 2장에서는 17세기 전반 조선 문인들의 명 사행에 관하여 고찰했다. 그 중에서도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알려진 이정귀, 허균이 명 사행을 맞았다. 이 두 사람은 당시의 명과의 외교 활동에 있어서 사신, 접반관으로서 가장 활약한 인물들이다. 이 장에서는 문학 교류에 관계된 그들의 대표적인 명 사행을 골라, 그것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우선, 당 시기의 외교 활동에서 가장 그들의 능력이 알려진 이정귀의 사행에 대해 고찰했다. 그들은 그는 자신의 문서작성 능력으로 명인과 교유 관계를 구사하여 명과 복잡한 외교 문제의 해결에 크게 활약한 데다, 그 능력에 의하여 정계에서 고위직에 오른 인물이다. 또 명 사행 기간 중에 명 문인과 詩文을 주고 받아, 자신의 시집을 명 문단에서 출판하기도 하고 활발한 문학 활동을 행했다. 그의 사례를 통하여 문학활동과 외교 활동이 연동된 것을 고찰할 수 있다. 이어서 허균의 1614~1615년의 2차에 걸친 사행에 대하여, 그가 수천권에 달하는 명나라의 신간서를 구입하여 온 것을 살펴보았다. 그것을 통하여 정보의 교통에 직결된 서적의 유입이, 명 사행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어서 제2부에서는, 이상의 교류활동을 통하여 조선 문단에 들어온 명 문학이 어떤 방식으로 수용되었는가에 대해 검토하였다. 특히 그 수용 방식에 관하여 조선 문단의 비판적이고도 독자적인 태도에 주목하고자 하였다. 구체적인 방법으로서는, 시문선집의 비판적 이해와 재편찬 작업, 문학론의 수용에 관한 사례를 선택하여, 문학사의 흐름 가운데서의 사례가 갖는 의미를 탐색하였다. 또 필요에 따라 18세기 에도 문단의 상황과 대비하기도 하였고, 양국의 명 문단 수용 상황의 차이를 시야에 넣고자 하였다. 이에 의하여 각국의 문단 상황에 따른 명 문학 수용이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음을 더욱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우선 허균의 한시비평 작업을 중심으로 명대 시론, 특히 전후칠자의 시론이 조선 문인들에게 어떻게 수용되었는지에 관하여 고찰하였다. 허균은 역대 중국 시선집을 검토하여 그것을 자기의 기준으로 재편집하는 작업에 열의를 보였다. 여기에서는 그 작업의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문학론에 주목하였다. 허균은 당시 명 문단에서 유행한 전후칠자의 문학이론을 섭렵한 가운데 어느 정도 그 영향을 받았고, 동시에 조선 문단의 전통을 이어 받아 명 문학이론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또 한시 비평에 대해서도 자기의 기준을 견지하면서 거기에 크게 비상한 강조를 하였다. 이러한 허균의 사례를 통하여 당시 조선 문인들의 명대 문학론에 대한 비판적 수용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다음으로 17세기 전반의 조선 문단에서 중국 당시선집의 유행과, 다음으로 조선 문인에게 있어 독자적인 당시선집을 편찬한 상황에 주목하여 중국의 시문선집이 조선에 어떻게 수용되었는가에 대해서 고찰하였다. 여기에서는 허균과 이수광의 당시선집 편찬 작업을 중심으로 명대 전후칠자의 성당시 존숭의 시론에 영향 받은 것과, 조선의 독자적인 당시 평가 기준이 모색된 것을 주목하였다. 이렇게 비판적이고도 독자적인 수용태도는 동시에 전후칠자의 영향권에 있었던 에도 문인 腹部南郭이 당시의 학습서로서 이반룡의 당시선을 선택하였고, 이후 18세기 에도 문단에서 다양한 형태의 당시선화각본이 출판된 사정과 비상하게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양국 문단에 있어 중국 당시선집의 수용, 재편집 방식의 상이점을 분석하여, 동일한 서적이 각국의 문학적 환경에서 지닌 특수한 의의에 관해 고찰하였다.

 

최후의 제3부에서는 제1, 2부에서 고찰한 명과의 문학 교류와 명 문학의 비판적 수용이 결과적으로 조선 한시의 인식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에 관해 고찰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우선 조선 한시가 명 문단에 다수 소개된 것, 또 조선 문단에 조선 한시 정리 작업이 행해진 것에 주목하였다.

당시 양국의 홀발한 문학 교류에 대해서, 명 문단에 조선 한시가 다수 소개 되었다. 특히 1598년 전쟁이 종결되자, 조선에 체류하던 명 장군들이 주도하여 역대 조선 한시선집이 여러 번 편찬되었다. 이 시기 명 문단에 소개된 조선 한시는 이후 명청 시선집 편찬 작업에 있어 조선부분에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되었고, 조선 한시를 명 문단에 알리는 큰 역할을 하였다. 이때 명 문인들은 중화 문명의 일부로서 조선 한시문을 인식했고, 그것은 조선 문인들에게 자국 문화에 자부심을 갖는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본고에서는 허균의 조선 시문 소개 활동에 주목하여 자기의 시재를 한문학 본 고장에 보여주고자 한 조선 문인의 적극성과, 중화문명의 주변부에 넓게 관심을 받은 명 문인들의 호기심을 호응하여, 양국 문학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진 것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급격한 교류의 확대는 조선에 있어 환영받은 것만은 아니었다. 조선 문인들의 적극적인 시문 소개 활동은 그 과정에서 명과의 외교 충돌이 일어나는 것을 우려(懸念)한 조선 정부에 의해, 제한이 가해지게 되었다. 그 일례로서 본고에서는 1620년 이정귀가 북경에 갔을 때, 당시에 자신의 시집을 출판하기 위해 조선 조정에 소동을 일으킨 사건에 주목했다. 이러한 명과의 교류 과정에서 일어난 조선 정부와의 알력을 통해서 당시의 문화 교류가 순조롭게 진행된 것만은 아닌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그러한 교류 활동을 통하여 17세기 전반의 조선 문단에서 한시 평가에 관한 독자적 기준이 마련(用意)되어, 그것에 기반하여 조선 한시를 재평가하기도 하고 조선 한시선집과 시화집 편찬작업이 적극적으로 진행된 상황을 고찰하였다. 이것은 명과의 문학 교류가 최종적으로 조선 한시의 발달에 준 영향을 논한 것이기도 하다. 더불어 이것에 대한 명 문단과의 문학 교류가, 결국은 조선 한시의 재발견을 일으킨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런 구체적인 사례를통해 전란 후의 정부 사업으로서 편찬된 해동시부선, 허균 개인이 편찬한 시선집 국조시산같은 시화집 편찬의 경위에 관해서 고찰하였다. 이러한 작업 과정에서 조선 한시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생겨나고, 조선 한시의 가치가 재인식된 것에 주목하였다. 바꿔 말하면, 중국의 시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가운데 조선 문인이 되는 독자적 한시 비평 기준이 형성되어, 그런 기초에 의하여 조선 한시를 평가한 때에, 그 수준이 한시의 유장한 전통 가운데에서도 당당하게 일원의 자격을 갖게 되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러한 인식에 기반하여 중국의 詩文만이 아니라 조선의 한시도 본격적인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요약하면, 본고에서는 16세기 말의 전쟁을 거쳐 활발하게 이루어진 명과 조선 간 문학 교류의 실태를 구체적으로 고찰하였고, 그 후 명 문학이 조선 문단에 비판적으로 수용된 방식을 분석하였고, 그에 의한 교류와 수용을 통하여 조선 한시에 대한 인식이 변해간 과정을 추적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일견 개별적인 사건에서 드러난 문화 현상이지만, 상호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을 드러내 주고, 외래 문화의 수용과 조선 독자적 전통이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 이후의 문단에 새로운 것을 출현하게 하였는지 검증한 것이다. 이에 17세기 후반 이후 조선 문단에 드러난 개성 추구의 움직임이라든가, 전 시기 명 문학 수용, 조선 한시의 재발견이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밝혔고, 17세기 전반과 17세기 후반 이후 시단의 상반된 면을 천착한 선행 연구에 대하여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였다.

 

*논문심사 결과 요지 (이 부분은 특히 오역이 있을 수 있다)

중국이라는 거대하고도 강력한 문화권의 주변에 있는 나라들은 그러한 수용을 하면서 얼마나 자신의 문화를 구축하였는가에 있어서, 이런저런 복잡한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동아시아 문화권이라는 말로 다 덮을 수 없고, 고유한 역사, 문화 등의 이런저런 요인에 의하여 이런저런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 논문은 조선이 명의 문학을 어떻게 수용했는지, 또 그것을 통해 조선 한문학이 어떻게 이루어져 갔는지, 그런 과정을 밝히고자 했다. 대상 시기는 17세기최초의 25년 정도이다. 이것은 그 기간이 일본의 침략에 대한 명 원군이 대량으로 파견된 때 명과 조선의 상호 이해가 급속하게 깊어졌고, 또 그 전후 폐색적인 상황과는 다르게 비교적 자유로운 수용이 이루어져, 교류가 활발한 시기를 만났기 때문이다.

논자는 우선 명으로부터의 사절과 그 접대를 맡은 조선 문인들의 교류부터 시작한다. 명 사신으로서 파견되는 사람들은 대개 환관이 그 임무를 맡았는데, 17세기 초 시기에만은 집중적으로 문인 관료가 사신으로 방문하였다. 이에 대해 조선 측에서도최고의 문인을 데리고 그에 응했다. 이에 명과 조선의 문인들의 교류가 개화하였다. 그들은 시문을 응수함을 통해서 상호 인식을 넓혔고 이에 정치적 용무를 넘어서 사람 간의 진실한 결교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교류가 가능하게 된 것은 중국 고래의 문인 상호간의 전통이 조선 문인들 간에도 공유되어, 공통의 문화적 기반에서 문인 교류를 향수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주지번, 조선의 허균, 두 사람의 교류를 자세히 서술하여 국경을 넘어선 문인으로서의 일체감이 공유된 모습을 재현하였다.

그러한 개개인의 교유를 통해서 명 문학과 문학관이 조선에 전해졌지만, 그것은 무비판적 수용이 아님을 논자는 강조하였다. 명의 전후칠자의 고문사파 - ‘문장은 진한, 시는 성당을 창도한 문학관이 이어진 시기에 있어서, 이것이 그대로는 수용되지 않았다. 특히 허균은 성정을 근간에 둔 독자적 비판 기준을 중시하여, 그 점에서는 중국에서는 고문사파 다음에 일어난 원굉도의 시관을 先取한 면이 보인다. 이러한 비판적 수용은 일본에서는 오규 소라이, 핫토리 난가쿠(腹部南郭), 蘐園派가 오로지 고문사파의 시관을 창도했던 것과 대비적인 점을 논자는 지적하였다. 더욱이 여기에는 시기, 계층 등 다른 요소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중국 수용에 관한 조선 일본의 상이함에 관련해서는 추후의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명 사절에게 받은 것 외에, 조선으로부터 명에도 문인들이 보내져서, 이정귀는 외교 활동과 아울러 문학에 대해서도 시문을 응수하고 자신의 시집을 출판하는 등 적극적 활동을 전개한 것을 상세히 조사하였다. 그러한 書物이 조선의 장래에 미친 영향도 중시한 성과가 있다.

이러한 상호 왕래 외에 논자가 강하게 주장한 것은 조선 문인이 중국으로부터 시문을 학습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한시문도 중국에 전해져 역방향의 현상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종래의 이해를 뒤엎는 지적인데, 근년 발견된 조선시선, 허균의 누이 난설헌집의 간행, 또 이에 관한 중국 문인의 언술 등, 여러 자료에 그것이 나타난다. 이것이 중국에 큰 임팩트를 준 것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해도, 논자가 말한 것처럼, 조선 시문에 대한 중국의 인식의 변화를 보여준 점은 있다.

17세기 초두에는 명-조선의 문화 교류가 매우 활발한 시기였던 것도 알려져 있지만, 이 논문은 교류의 구체적인 사실을 처음으로 밝혔고,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서 양국 문인들의 인식이 변화해 간 과정까지 설명하는데 미친 것은 중국 조선 문화교류사 연구에 새로운 지식을 더해준 것이다.

이 교류를 탐색함에 있어서 명 문학사조, 조선과 같은 식으로 유입된 별도의 과정을 에도 시기의 상황 등 주변의 사건들을 고려한 점도 선행 연구를 넘어섰다. 이에 대해서는 논자는 그런 분야 연구 성과를 소화하여 솜씨 좋게 정리하였는데, 다만 자신의 연구에 의해 도달한 견해는 아닌, 적이 표층적인 경향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무엇보다 명의 문학사조, 특히 고문사파의 실태는 현재 학계에서 파악하고 있는 정도의 단순한 정도는 아니지만, 에도 시기의 중국문학 수용 양상도 반드시 아주 완전하게 밝히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어느 것이나 커다란 문제여서 지금 모두를 요구하는 것은 어렵지만, 논자의 연구가 금후 그런 방면으로 진행된다면, 이에 대한 넓은 시야로부터 조선과 중국의 교류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기를 기대한다.

이상, 심사한 바와 같이, 본 논문은 박사(문학)의 학위 논문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인정된다. 이에 2009921, 조사위원 3명이 논문 내용과 이에 관련된 사안(事柄)에 대해 구두 질문을 행한 결과, 합격을 인정한다.

 

*목차

An Explanatory Note

 Table A: 세설신어의 챕터 타이틀

 Table B: 연호(Reign Title)

Bibliographical Introduction

 

Part1. Form and Contents

 

 Chapter 1. Qingtan as a social and intellectual activity

1.      How did scholars participate in qingtan?

2.      The procedures and the key terms

3.      Criteria of a Good qingtan

4.      Qingtan as intellectual entertainment

 

 Chapter 2. The Topics of Qingtan

1.      Sanxuan and their commentaries

2.      Propositions from the school of names

3.      Buddhist Sutras

4.      Debates over new philosophical propositions

5.      Other topics of Qingtan

 

 

Part 2. Historical Development

 Chapter 3. The genesis and formation of qingtan

1.      The Late Han: “Making Friends through conversation”

2.      Xun Can and others in the Early Taihe era

3.      A pause after fourth year of Taihe era

4.      Qingtan: first flowering

5.      The voices of the Zhengshi era

 

 Chapter 4. The dormancy and revival of qingtan

1.      The Seven worthies of the bamboo grove (죽림칠현)

2.      The Revival of “the art of subtle words”

3.      Second Flowering 1: Wang Yan and Pei Wei

4.      Second Flowering 2: Guo Xiang and others

5.      Western Jin after Yuankang Era

 

 Chapter 5. Qingtan: third flowering and decline

1.      Wang Dao: inheriting the past and ushering in the future

2.      Third flowering 1: Yin Hao and others

3.      Third flowering 2: Sun Sheng and others

4.      Further enrichment of qingtan: buddhist monk and ideas

5.      The gradual decline of qingtan after the Taihe era

6.      Qingtan as an enfeebled tradition in the Southern Dynasties

 

Bibliography

Appendix: “Two terms examined: Qingtan and Qing yi” (청담과 청의의 비교)

 

# Biblical Introduction

-청담을 pure conversation으로 번역한 것은 Mather 교수가 것으로 시기 liberation 자각을 보여준다. 청담이란 그런 liberation 현실화 수단이다. 따라서 청담이란 타픽은 중세 중국(200~600) 사회적 정치적 지적 문화적 측면을 이해하는 핵심적이다.

 

*연구사

-조익(1727-1814): 청대의 주요 역사가. 이십이사차기에서 청담을 정의했다. ‘육조청담지습’, ‘淸談用塵尾(In Qingtan the sambar-tail chowry was used)’

-20세기 일인 학자들. (1) 이치무라 산지로(市村瓚次郞) <청담원류고>(1919). 용어로서의 청담과 사회 현상으로서의 청담의 기원에 대해, 청담과 불교의 관계에 대해, 당대 청담의 반대파에 대해 연구했다. 오늘날에는 학문적 가치가 없지만 최초의 연구로 의미가 있음.

 (2) 아오키 마사루(靑木正兒), 1934 연구. 청담과 도교의 관계. 위진 시기의 convernsationalist 카테고리로 나눴다. 名理波, 도가파. 각기 析玄派(mysterious learning) 방달파의 expounders.

 (3) 산카오 초오하치(坂野長八). 이치무라의 제자. ‘청담의 일해석’(1939)에서 이치무라의 오류 수정. 청담에 대해 말한 모든 original source 조사했음. 초기 청담은 사람들의 성격에 대한 유가적 평가를 지적하고 있다. 산카오 설에 따르면 청담은 공허하거나 분방한 토크가 아니고 청담과 방달적 행동 사이에 연관성도 없다.

 (4)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청담이 후한 청의의 연장이라고 했음. (1946 사림 31-1). 청담과 청의는 같은 기원을 갖고 있지만 후기 발전 과정에서 분기했다. 위진 명사들을 그룹으로 나눴다. 청의파와 청담파. 청담은 240-249년에 황금시대, 250-264년에 은의 시대, 서진 시기(265-316) 동진(317-420, clay age) 시대를 나눴다. 단계를 통해 청담이 진화했고 점차 실제적 이슈에 대한 논의를 피하고 순전히 철학적 관심사에 대한 게임으로 변했다고 했다. 청담에 대한 그의 시대구분은 Mather 에티엔느 발라즈, 아서 라이트 같은 학자들에게 영향을 줬음.

 

 일인 학자들의 영향 하에서 중국 학자들도 청담에 대해 갱신된 관심을 갖고 3-40년대 연구 했음.

(1)    Fan Shoukang, “魏晉的淸談” (문철계간, Wuhan University, 1936)

(2)    Liu Dajie, “魏晉思想論” (魏晉時代的淸談, 7, 1939)

(3)    He Changgun, “淸談起源” (문사철계간, 1943)

(4)    HeChanggun, “魏晉淸談思想初論” (투서계간, 1945)

(5)    TangChangru, “淸談與淸議” (신보문사, 1948)

(6)    Du Guoxiang, “魏晉淸談及其影響” (신중화, 1948)

 

하창군의 4 초론을 제외하고 논문들은 그저 일인 학자들의 발견을 재서술한 것이다. 범수강의 에세이는 아오키의 연구를 재생산한 것이고, 유대걸은 아오키와 산카노의 포인트를 아주 조금 수정해서 종합한 것이다. 당장유는 산카오와 미야자키의 설을 발전시키려 했으나 의심스런 결론에 이른 것이 전부이고 초기 청담으로 그가 예시는 이미 산카노가 들었던 . 두국상은 산카노와 미야자키의 연구를 반복했다.

 

비록 파생적인 연구지만, 학자들의 관심을 끌어 50~60년대 중국에서 위진 시기에 대해 많은 연구가 있었다. 그중에는 진인각(1890-1969) 있는데, 능력과 본성 간의 기본적 관계에 대한 논의를 폈다. 지민도(Zhi Mingdu, 4세기 ) 도연명의 사상을 다뤘다. Tang Yongtong(1894~1963) 유소(190-245) 인물지 연구했다. ‘언의지변(the debate on words and meanings), 왕필(226-249) 이론들에 대해 논했다. 모종산은 위진 시기 명가에 대해 연구했고 여영시는 위진 사상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트렌드에 관해 썼다.

모윤손 魏晉以來之崇尙談辯及其影響” (홍콩, 1963)에서는 도발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청담의 기원과 후대의 영향에 대해서. 한편 하계민 魏晉思想與談風에서는 위진 사상과 대화의 관계를 설명했다. 청담에 대한 형식적 층면을 논한 부분은 훌륭.

70년대에는 타이완에서 청담에 대한 편의 연구가 있었다. 임현정의 석사논문(1974) “위진청담급기현리구요), 임려진의 박사논문 위진청담주제연구” (1978) 그것이다. 전자는 포커스가 너무 좁고 후자는 너무 넓은 것이 문제다.

70년대에는 Richard B. Mather 연구가 있다. 세설신어의 2 챕터에 대한 번역을 1964, 1971 학회지에 실었다. 에세이를 썼는데 세설신어 속의 청담(‘pure conversation’ in the Shishuo xinyu)”, 여기서 그는 미야자키의 시대구분 이론을 예와 함께 논의했다.

80년대에는 중요 연구가 나오지 않았다. 왕보현의 정시현학’(1978) 주목할 만하다. 대륙의 학자임. 현학에 대해 디테일한 연구를 했다. 정시 개제(정시 연간의 제도적 개혁) 사들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책은 청담에 대한 모노그래프는 아니지만 위진 청담을 이해하는 가치가 있다. 현학이 대화의 주요 주제였기 때문에. 이상이 위진 청담에 대한 현대 스칼라쉽에 대한 간단 요약이다. (9-14)

 

[2020 9 14]

나의 연구는 다음과 같은 훌륭한 질문들에 대해 완전하게 답하고자 한다. Part 1에서는 (1) 청담은 어떻게 수행되었는가? (2) 청담의 타픽들은 무엇이었나? 역사적으로 철학적으로 청담이란 용어의 의미는 무엇이었으며 그것의 cognate 무엇이었나? Part 2에서는 청담에 대한 역사적 설명을 제공하고, 다음 질문에 답한다. (1) 청담은 어떤 발전 과정을 거쳤나? (2) 발전은 어떻게 형태를 갖춰 왔으며 사회 정치적 백그라운드와 어떤 관련을 가졌나? (3) 누가 청담에 참여했나.

유의경의 세설신어(36 구성)세설은 역사서는 아니지만 역사서로서의 의도를 갖고 있으며, 의도적 위조의 가능성은 매우 낮다. 유준(劉峻=유효표, 462-521) 노트에 의하여 세설의 reliability 매우 제고되어 있다. 진서(晉書) 썼던 당나라 학자들은 세설에서 상당한 material 취해 왔다. (14-16)

 

 

Part 1. Form and Content

Chapter 1. Qingtan as a social and intellectual activity

청담은 학자-관료들의 철학적 논의를 가리키기도 했고, 청담 참여자의 유려한 언변과 레토릭 스킬을 보여주는 논쟁의 형태를 취했다. 이런 식의 사회적 지적 활동은 서진 동진 시기부터 남북조 시대까지 있었다. 시기에는 이런 활동들이 청담이라 불리지 않았고 단일한 명칭도 없었다. 청언, 현언, 微言, 言理, 談玄, 談이라고 불렸다.

한편 청담이란 말은 이미 후한 시기에 나오는데 가지 의미가 있었음(cultivated conversation, praise, and judgement of character). 청담은 청언보다 역사적으로 넓고 복잡한 용어였음. 따라서 위진 학자들은 자신들이 열렬히 참여한 철학적 논변을 가리키는 있어서 청담이란 용어를 사용 했음. 세설신어에도 청담이란 용어가 나오지 않음.

청담이란 말을 위진 시기에 청언이라 불렸던 활동을 가리키는 처음 것은 청대 고염무와 조익. (19) 엄격히 말해서 청담이란 말로 위진 시기의 활동을 가리키는 것은 정확하지 않고, ‘청언이란 말을 쓰는 것이 낫지만 이상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위진 시기 학자들의 철학 논변을 가리키는 말로 청담이란 말을 쓰겠음. 상세한 논의는 부록에 첨부한 청담과 청의의 고변’(1989, 타이페이. 중국어 논문을 번역한 ) 보기 바람.

 

* 장에서 답할 질문: 학자-관료들은 청담을 어떻게 수행했는가? 내용 외에 청담과 보통 대화 간에 차이가 있나? 구체적으로 말해서, 사람들은 청담에 어떻게 참여했나? 절차를 마련했나? 청담에 대응하는 용어나 특별한 요구사항이 있었던가? 청담의 이상적인 모습은 어땠나? (what would an ideal qingtan be like?) 답하기 쉬운 질문은 아니지만, 세설신어에 이러한 청담 활동이 많이 담겨 있기 때문에 시기의 청담에 대한 대략적인 상을 얻을 있다.

 

Chapter 1-1.

1. 학자들은 청담에 어떻게 참여했나?

(A) 1인의 강의. (B) 2인이 논쟁에 참여 (C) 다수의 사람이 논의에 참여.

 

(A) 1인의 강의

한나라 때의 講經이 원형. 오경박사가 강의를 했음. 강의를 마치면 청중이 질문하거나 이견제시 했음. 이것이 問難, 詰難(question and challenge)이었음. 예컨대 범엽의 후한서에는 명제(明帝 r. 58-75)의 강의를 묘사한 단락이 나옴. (즉위식이 끝난 후 강의 시작. -강경의 기본적 형태를 보여준다.)

불경 강의할 때도 마찬가지 방식이 보인다. 특히 동진 중반기에 강경은 매우 적절한 형태로 보였다. (지둔 디비션이 三乘을 강의한 일화. 세설신어 4 문학편의 37) 사람 만이 타픽에 대해 알고 있을 때는 방식이 최선.

후한서에 나오는 Wei Ying(魏應) 전기. 위진 청담에서도 마찬가지. (세설신어 4 문학-40: 지둔, 허순, 기타 학자들이 회계왕의 빌라에 모였다. 지둔의 강의에 허순이 이의 제기. 사람 모두의 언변에 다들 감탄. -허순에게는 질문 이의 제기라는 특별 임무가 맡겨져 있는 . dujiang이라 불림. 이것은 선생의 수제자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음. 일종의 TA. 후한서에 나오는 예들: 후한서26 Hou Ba 候覇, Huan Rong 桓榮, Ding Hong 丁鴻) 만약 이상이 맞다면 세설신어에 나오는 허순의 역할은 한나라 전통을 이은 것임. 따라서 불교 관습이거나 위진 시기의 혁신이 아님. (25) dujiang 전통은 남조 시기에도 계속됨. 이연수의 南史에는 양나라 대동 연간(535-546) 사람들이 경전을 읽지 않아서, 주기와 He chen만이 양무제 앞에서 경전을 강의했는데, Shen zhu dujiang으로 자주 임명했다.

(B) 2인의 논쟁

위진 시기의 가장 typical 형태. 후한 시기에 거의 실행되지 않았음. 위진 시기에는 이것이 가장 흔하고 효과적인 형태가 되었음. 형태는 청중 여부에 따라 구분됨. (청중 : 세설신어 4 문학의 33, 36, 41,42,57, 62, 65; 청중 : 세설신어 4 19. 배하와 곽상의 논쟁. 배하는 왕연의 사위. 청중 있는 경우가 가장 흔함. 20, 22, 30, 38, 51, 56.) 이런 관습은 common practice 통해 성립된 관습이었음.

문학 챕터의 19,22,38, 56 보면, 이것은 마치 청중이 장기 구경(Chinese chess game) 하는 같음. 방해하지 않고 보는 중요. 장의(張議, 515-590) 주홍정(496-574) 둘다 청담의 명수였음. 이들이 주역에 대해 토론한 . 주홍정의 4번째 형제가 매트에 앉았고, 장의와 주홍정이 토론하다가 주홍정이 지려 , 주홍정의 형제가 주홍정을 도우려 하자 장의가 방해하지 말라 경고한 일화.

(C) 다수의 사람

주객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때만 3자가 끼어들어 힌트를 주거나 설명할 있었음. 3 역시 청담에 능한 사람이어야 했음. <문학> 편의 9절을 보라. (Fu Gu (209-255) 빔과 초월에 대해 말하자 순찬(209-237) 신비함과 것에 대해 말했음. 상호 오해와 갈등이 있게 되자 배휘가 나서서 중재함) <문학> 53절도 마찬가지임. (말석에 있던 Zhang ping 청담을 중재해서 상석으로 옮긴 이야기) <문학> 55절은 명확한 . 지둔, 허순, 사안(320-385) 이야기. 장자에 나오는 어부에 대해 얘기했음.

 

2인의 논변이 가장 흔한 타입이므로 논문의 다음 섹션에서는 2 논변 위주로 논하겠음. 

 

[2020 9 15 ]

 

Chapter 1. 2. 절차와 주요 용어 (The procedures and key terms)

일단 사람이 시작하고 주객을 맡음. 청중은 담객’. 사람() 주장을 펴고(), 상대() 질문하거나 반론(작난), 다시 변답’. Round(bout). 마지막에 ’, ‘승리’.

(1)    담객. 능언인, 능언제현, 능언지류. 담사, 능언자, 담자. 담가. 남제서에 나오는 왕승건(426-485)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담가라는 말이 나옴. (말도 잘하고 글도 잘쓰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는 내용. 둘은 별개의 기예이기 때문.) 원홍의 명사 삼분. (시대별로, 정시 연간, 죽림칠현, 서진 시대 명사) →청담에 능한 사람이 명사라 불리고, 대부분의 명사는 청담에 능했을 .(37)

(2)    설리(說理): (, to propose)+ (, a topic). To state an argument. 동의어로는 唱理, 서치(敍致). 설리에는 가지 측면이 있음. Argument words(which the argument is presented, ) 세설신어에는 가지가 동시에 언급됨. <문학> 28.

(3)    작난(作難): =설난. 송난. 반대하는 .

(4)    변답(辯答): 覆疎.

(5)    (): bout. = <문학>19, 51.

(6)    (): defeat. 최굴(摧屈). ().

(7)    (, 합의에는 이르지 못한 impasse), (, having the same opinion): <문학> 62.

(8)    유사(遊辭): lame argument or idle words. 지고 나서도 굳이 말하는 .

 

Chapter 1.3. 좋은 청담의 기준(The criteria of a good qingtan)

(1)    독창적이고 비관습적일 . (<문학>36. 왕희지와 지둔, 손작) 신해석 혹은 스타일 상의 특징을 통해 창조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위나라-서진 시대에는 이론을 제시했다. 현학과 청담의 골든 에이지. 하지만 동진 시대에는 이론이 더는 나오지 않았고 해석 상의 창조나 유창성으로 승부했음. 그리고 후에는 이론조차 이상 이해되지 않았음.

(2)    논증이 탄탄할 . (<문학> 38)

(3)    짧으면서도 아이디어가 드러나게 . (서진의 명사 악광. <8. 상예>25)

(4)    유창성 & 풍부한 스타일. (<문학>36. 왕희지)

(5)    우아할 . (Be elegant in manner.): 말의 아름다움 아니라 매너의 아름다움도 추구. 명사라 불리는 사람들은 청담에 능할 아니라 매너도 우아함. 하안, 이풍, 혜강, 배해, 사안 등등. (45쪽에 예가 열거됨.) “the sambar-tail chowery” 옥이나 상아로 만든 소품.

(6)    목소리의 아름다움을 계발할 . (Cultivate the beauty of voice.): <9.품조> 48 유담. 발음을 아름답게 하는 것도 청담에서 중요.

 

Chapter 1.4. 지적 유희로서의 청담(Qingtan as intellectual entertainment)

청담에는 차원이 있음. 진리 추구와 아름다움의 추구. 달리 말해 청담은 scholarship이자 art. 측면의 조합이 청담을 문화적 표현에 있어서 자극이 되는 형태로 만들었고, 학자 관료들의 지적 게임이 되도록 하였다. (<문학>16 일화로부터 귀족 자제가 청담을 self-improvement 기회로 사용했음을 있다) 또한 오락으로 활용한 점은 <문학> 55, 22, 그리고 <2.언어> 22.

게임과 같은 면이 있어서 상대를 능가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쏟았다.(48) 초기 청담은 미의 추구보다 진리 추구에 기울었음. (49) 동진 시기부터는 예술적 아름다움이 강조됐음. 당연히 청담은 상당한 집중과 에너지를 요했음. (문학 20에서 wang jie 죽음은 청담에 지쳐서 그랬다는 ) 현대의 스포츠 비슷하다고도 있고, 군사 용어를 써서 청담을 묘사하기도 했음. (<문학>26, <2.언어> 79) 게임의 성격이 후대로 갈수록 짙어지지만 중요한 것은 청담이 상당한 스칼라쉽을 요하는 지적 활동이라는 것임. (51)

 

[9 16 ]

Chapter 2. 청담의 타픽들

청담에서는 무엇이 논의되었는가? 청담의 참여자들이 탐색했던 것을 가리키는 증거들은 무엇이 있는가? 가지가 장에서 자세히 살펴볼 질문들이다. <문학> 편에 60가지 아이템들이 보존되어 잇다. <언행>, <상예> 등에도 들어 있음. 다양한 주제들은 위진 士들으 여러 관심사를 반영한다.

 

Chapter 2.1. 현언(玄言)과 코멘터리

삼현(三玄) 청담의 primary source. 삼언이라는 용어는 안지추의 저서 안씨가훈 <면학> 챕터에 나오는 것이 가장 이르다. 여기서는 장자, 노자, 주역 셋을 합쳐서 삼현이라 했다 . ‘제현(諸玄)’이란 말도 이전 시기에 쓰였음. (by Wang Sengqian) 여기서도 제현 책을 가리킴. 삼현이란 말이 주조된 것은 유송(420~479)보다 나중이지 않을 .

책이 청담의 주요 타픽이 것은 정시 연간(241~249). 점은 안지추 아니라 다른 자료에도 나옴. ‘관로라는 인물에게 하안은 어떤 사람이냐 배휘가 묻자 대야의 물과 같아서 상대를 비추지만 산과 같은 거대한 것을 비추면 자신도 혼란스러워진다는 식으로 답함. 그래서 노장에 대해 말할 하안의 말은 영리하지만 내용이 없다고 . (55) 위의 이야기는 하안과 왕필의 시대부터 남조시대까지 노장이 중요하게 다뤄졌음을 말함. 삼현은 모르면 되는 것이었음. 위진 시기 노장과 주석은 필수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이었음. (56)

통계적인 증거도 있음. <문학> 전반부에 나오는 학자 관료들의 65 이야기 중에, 61개가 청담과 관련. 61 엔트리 중에서 43개가 직접적으로 청담 내용을 서술하였음. 중에서 15(1/3 이상) 분명히 삼현을 말하고 있음: 주역(29, 56 61); 노자(7, 10, 63); 장자(15, 17, 32, 36, 55, 62); 노자와 장자 전부(8, 13, 18)

 

 

[9 20 ]

Chapter 2.2. The propositions from the school of names (57)

2 2. 명가(名家)로부터 조항들

위진 시대에 명가와 법가가 부흥하기 시작했음. 한나라 말에서 위나라 초에 대두된 가지 어려움: (1) 어떻게 정치적 포지션에 합당한 인물을 뽑느냐였음. 능력과 명성의 매칭이 문제였음. (2) 환관, 외척(imperial relatives), 학자 관료 간들에 의해 일어난 사회 질서의 해체. 이들의 갈등은 농민 봉기에 의해 악화되었음. 지배층에게 사회 질서 복구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고 학자 관료들은 이에 명가와 법가를 중시하게 됐음. (name/logic and law)

예를 들어 조조는 귀족의 파워를 제한하고 겉으로 많이 드러나는 행동을 금했음. 후에는 도교가 중요해졌지만, 명가와 법가에 대한 관심은 줄지 않았음. 명가의 논리적 추론이 각광받았음. 예컨대 노승(魯勝, fl.291) 변경(辯經) 대한 코멘터리를 썼음. 저술은 없어졌지만 서문은 <진서> 남아 있음. (예문. 59. 공자의 정명 가지고 이를 정당화 . 맹자가 묵자를 공격했지만 결국 같은 얘기했고 순자와 장자가 명가 비판했어도 가르침을 버릴 없었다는 이야기.) 세설에서도 이름과 원칙(names and principles) 대한 기록 가지를 있다.

(1) 문학(Letters and scholarship) 16: 악광에게 손가락은 의미에 닿을 없다 했더니(장자 천하편에 나옴) 빗자루로 이것이 닿았는가’ ‘닿았다그렇다면 어떻게 그걸 버릴 있겠는가, 했다는 이야기.

(2) 문학 24: 사안이 젊었을 Ruan Yu 공손룡의 백마론 관해 이야기했다. Ruan 열심히 설명하자 사안이 질문을 많이 했음. Ruan 말하길, 설명 잘하는 사람 찾기도 어렵지만, 설명을 알아듣는 사람 찾기도 어렵구나. 했다는 이야기.

백마론 이야기는 공손룡 이전부터 유명했음. 묵자, 혜시, 장주, 맹자도 백마에 대해 말했지만 가장 완전한 형태는 공손룡 버전임. <공손룡자>라는 컬렉션 속에 현전함. 예를 통해, 점차 영향력이 줄어가고 명가의 가르침을 이해한 사람이 적어져 가긴 했지만, 동진 사람들이 명가의 이야기에 대해 여전히 관심 가졌음을 있음.

(3) 문학 58: 사마도자가 사현에게 묻기를 혜시의 오고서 으로 들어가는 마디 말이 없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자 사현이 답하길, 포인트가 후세에 전달되지 못했기 때문이라 했다는 이야기.

혜시는 명가의 중요한 dialectician. 혜시의 이론은 공손룡과는 다름. 자연 상태에서 모든 것이 변한다는 점에 민감했던 그는 만사의 상대성, 보편적 사랑, ‘정명 통한 사회의 향상을 강조했음. 장자 33 (天下 세상)장에 따르면, “혜시는 오거서를 남겼다. 그러나 그의 교리는 잡되고 편벽되며 그의 말은 매우 넓었다. 그가 사물을 대하는 방식은 다음의 말에서 있다. (64~65) (1) 至大無外, 謂之大一.  至小無內, 謂之小一. …(10) 氾愛萬物, 天地一體也. 가지의 아포리즘은 모두 혜시의 사상으로 <장자>에만 나옴. 시공간의 상대성에 관한 혜시의 관찰은 자연 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바로 사마도자가 혜시의 작품이 신비로운 것의 실재에 들어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이유일 .

(4) 문학 62: Yang Fu and Yin Zhongkan. 왕씨 집안의 사위들. 제물론에 대해 토론. 쪽이 말했음. 당신은 번의 대화만에 말에 동의하게 것입니다. 그러자 굳이 대화를 해야 하느냐, 하고 웃었지만 결국 만에 그의 말에 동의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Yin 장자의 입장, Yang 묵자의 입장을 취했거나 혹은 거꾸로일 .-67. 무슨 말인가?)

제물론은 유가, 묵자, 명가를 비판하기 위해 쓰여졌음. 그래서 <장자> 다른 챕터와 내용이 다름. 제물론에는 명가에서 비의적인 언명이 많음. ‘指는 닿지 않는다’ ‘네가 이해한 [] 말이 아니다’ ‘나는 오늘 월나라에 갔는데, 과거에 월나라에 도착했다등이 그것. Yin Yang 논쟁의 자세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음.

 

[9 21 ]

Chapter 2.3. 불경

진나라가 남쪽으로 옮긴 때부터(317), 불경은 고관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 있게 되었음. “문학”, “언어편에서 동진 시대에 승려들이 매우 활발하게 활동했음을 쉽게 있음. 승려들이 청담에 자주 참석했고 자신이 청담을 했음. 그들은 불경에만 정통할 아니라 현언에도 밝았음. 이렇게 하여 청담에 새로운 내용과 칼라를 덧입혔음.

문학편에는 45개의 동진 청담만 있지만, 32개의 아이템이 다양한 청담 모임을 보여줌. 32 아이템 12개에서는 불경을 다룸(23,30,35,37,40,43,44,45,50,54,59,64). 이는 엘리트 문화에서 불교가 중요했음을 보여줌. 중요해졌냐면, 학자들 세계와 승려들의 세계가 상호 필요에 의해 강화된 . (67). 불교로서는 자기 교의를 학자 사회에 퍼뜨리려면, 청담에 의존해야 했음. 청담은 불교의 아이디어를 수용함으로써 청담에 활기를 불어넣을 필요가 있었음.

불교가 처음 중국에 들어왔을 , 엘리트로부터 인정 받고자 했고, 중국 사상에 레퍼런스를 자주 가리켰음. 이것을 격의(格意) . 이것을 하기 위해 승려들은 중국 사상에 능통해야 했음. 그런 승려들 세설에서는 지둔이 제일 유명. 지둔에 대해서는 5장에서 자세히 다룬다.

(1) 문학 30: 북에서 승려. 지둔, 축도잠, 평신도 손작. 북에서 승려가 지둔에게 졌다.

(2) 문학 45: 우법개(310-370) 지둔과 경쟁한 것으로 명성이 있었음. 후에 사람들은 지둔을 선호했음. 우법개가 제자를 시켜 지둔에게 질문하게 했고 결국 지둔이 졌음. 지둔이 말하길 남의 말을 전달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했다.

동한 말에 유교가 쇠퇴할 불경은 인기가 높아지고 있었다. 위진 현언은 불경과 공유하는 내용이 많았다. (은호가 불경을 읽고, 진리는 속에 있다고 했다는 이야기. 문학23) 여기서 진리란 현학에서 말하는 궁극의 진리다. 은호의 의견은 당대 학자 서클의 이해를 대표함. 어떤 사람들은 노자가 서쪽으로 가서 인도에 도착해 부처를 만났다고도 . 그런 식으로 불경은 노자의 다른 버전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했음. (문학44: 진나라 간문제[사마욱] 불경은 마음을 정화시킨다고 있음. 궁극에 도달하지 못해도 유익이 있다는 식의 말을 이야기. 말은 불경에도 비슷한 것이 나옴. 모든 감각 있는 것은 불성을 갖고 있다. 간문제가 부처는 성인의 사람이었음. 노자나 장자와 마찬가지로 마음을 정화하는 도움을 주는 존재라는 .) 시기에 불경에 관심 가진 사람이 많은데 중에서도 은호가 특히 열정적. (문학 50: 대품은 너무 말이 많아서 소품으로 바꾸었다, 문학59: 은호가 동양에 있을 불경을 많이 읽고 자세히 이해했다. 모르는 부분은 승려를 만날 때마다 물어 이해. 문학43: 은호가 소품을 읽을 적에 200개의 메모를 했다. 지둔과 논쟁하고 싶어 했으나 끝내 기회가 없었다.) 특히 43 케이스는 “obscure problems of the age”라는 대목에서 은호 외에도 불경을 연구하는 사람이 많았음을 보여준다.

동진 중기에 현학은 쇠퇴했지만 불경은 중요해졌고 현학을 대신해 청담의 중요 주제가 되었다. 예를 들어 문학 35. 즉색론(treatise on matter-as-such) 무심의(theory of non-existence of mind) 후기 청담에서 새롭게 등장한 중요 주제. 이에 대해서는 Tang Yongtong 위진현학류별약론과 진인각의 支愍度學說考를 보시오.

 

[9 22 ] [10 1 ]

Chapter 2.4. 새로운 철학적 명제들에 대한 논쟁

(1) 유무 논쟁

(2) 자연과 도덕적 가르침(名敎 moral teaching) 대한 논쟁 (p.83)

(3) 단어와 의미에 대한 논쟁 (p.86)

(4) 성인이 감정을 갖고 있는가에 대한 논쟁 (p.91)

(5) 임금과 아비 어느 쪽이 우선이냐에 대한 논쟁 (p.96)

(6) 능력과 인간 본성에 대한 논쟁 (p.101)

 

유교나 도교 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들이 제시되었음. 유명한 것이 유무, 자연, 명교, , , , 등임. 성인이 감정이 있는가(성인유정무정지면) 절대적 헌신의 대상은 군주인가 아버지인가(군부선후지변) 등이 중요했음. 많은 저술에서 의견 충돌들이 있었다. 이런 철학적 명제와 그에 대한 해석으로서 세설신어( 유효표의 주석) 나오는 내용이 장에서 논의할 바임.

(1) 유무 논쟁: 왕필이 말하길, 성인은 체현한 자이다. (문학8) - 청담에서 중요한 주제를 다룸. (a) 유교와 불교 (b) 공자 노자 (c) 존재와 비존재. 위진 시기 현학은 도교의 부활이라고 특징지어지지만 한나라의 유교 경전에 대한 존경심을 이어 받은 것이다. (77) 현학은 유교를 도교로 대체하려는 것이거나, 유교보다 도교를 높이려는 것이 아님. 현학의 진짜 목적은 도교적 원리를 유교 안으로 소개해 들이는 것이었음. 그럼으로써 높은 차원의 이해를 얻고자 했음. 메인스트림의 현학 전문가들은 유교와 도교 텍스트에 모두 능했음. 이들은 유교와 도교의 차이를 그다지 강조하지 않았고 양자를 상호 보완적인 것으로 봤음. 그들은 공자를 성인으로, 노장을 현인으로 봤음. 그렇지만 그렇게 함으로서 노장의 원칙에 공자를 비춤으로써 공자의 이미지를 변형시켰음.

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유교와 도교 간의 근본적인 차이를 해소할 것이냐는 문제였음. 현학에 비추어 공자는 어떻게 다시 만들어질 것인가. 이들의 번째 전략은무가 핵심, 유는 비핵심이라는 도가의 전제를 가다듬는 것이었음, 그리고 원칙을 현학의 가이드라인이 되게 하는 것이었음. ‘ 구별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키는 , ‘ 존재를 가리키는 으로 모든 개별 사물과 사건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되었음. 특히 공자가 윤리적 코드로 지칭했던 사회 질서를 가리키는 것이었음. 그러한로부터 발생하는 것이었음. 현학 사상가들은 이것이 유교나 도교 모두에서 참이라고 믿었음. (77~78) 왕필의 작업이 유교와 도교의 성공적인 블렌딩에 기여 있음. 그리하여 왕필은, 성인이 대해서만 말한 이유는 대해서는 이미 체현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음. 이렇게 말함으로써 위진 현학의 기초를 놓았음.

貴無’ ‘本無같은 아이디어들, 모든 것은 기초로 삼는다. 아이디어가 학자 관료들에게 인기 있게 되어, 실질적 사안을 다루는 데에도 운위되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의무에 돌보지 않고 무심한 행동을 보였음. 이것을 걱정한 사람이 Pei Wei. ‘숭유론 지어서 숭상하는 사람들을 비판했음. 이것이 <문학12> 나옴. Pei 숭유론을 당시 사람들이 공격했으나 꺾지 못했는데, Wang Yan 나타나서 조금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결국 Pei 설은 계속 생기가 있었음. ‘숭유론 대한 이야기는 <진서> Pei 전기에 포함되어 있음. Main text 200여자로 되어 있음. (서문은 길다) “궁극의 무는 어떤 것도 생성시킬 없다. 그러니 자신을 생성시켜야 . 형체를 가져야 하고, … 그러므로 사물을 번성하게 하려면 일단 형체가 있어야 하고, 무위를 통해 사물을 존속시킬 수는 없다. 팔짱 끼고 있으면서 물고기나 새를 잡을 수는 없다. ” 여기서 주장은 가지. (a) 무는 유를 생성시킬 없으므로 일단 유는 출현해야 한다. (b) 무는 유를 핸들할 없으므로, 유를 돕는 것은 자체다.

여기서 무를 숭상한 학자들은 왕필과 하안. (81) 왕필은 무가 유를 생성시킨다 했음(82). 이것은 무슨 뜻일까. 만약 무가 유를 생성시킨다면 역은 되는가. .. Pei 설은 왕필의 설과 정면 대치. (82) 후대 곽상의 주석에서 반복 강조된 것은 무가 유를 만들 없다는 것이었음. 그리고 존재가 무로부터 나온다는설것은 이상 논의되지 않았음. 곽상의 설은 ‘self-transformation’(獨化)이라 만함. 비록 pei 설과는 다르지만, Pei 설에 영향을 받았음. 여기서 self-transformation이란 것이 유무의 이슈에 대해 새로운 어프로치가 가능해지게 했음.

 

(2) 자연과 도덕적 가르침(名敎 moral teaching) 대한 논쟁 (p.83)

Raun Zhan, <진서> 전기. 같은 이야기가 세설신어의 <문학18>에도 나옴( 대화를 주체가 완수와 왕연으로 바뀌어 있음). Rong 공자와 노자의 가르침은 같은 것이냐 다른 것이냐 물음. Ruan 답하길, 아마 같지 않겠는가. (‘장무동’ 일화가 왜 자연과 moral teaching에 관한 얘기지?)

위나라에서 서진 시기에 이르기까지 자연 도덕적 가르침은 유무 논쟁과 병렬됨을 있다. 논쟁은 단계를 거친다는 이야기. 왕필과 하안의 1단계(무에서 유가 나온다, 명교는 자연에서 나왔다), 완적과 혜강의 2단계(명교를 잊고 자연을 지향해야 한다, 양자는 서로 반대되는 ). 이것은 사마 가문의 지배에 대한 극단적 불만족의 표현이기도 . (85) 설은 위진 현학의 일반적 스피릿과 배치되는 . (몰랐어) 3단계는 상수와 곽상 (명교가 자연이다) 이렇게 보면 하안과 왕필에서 위진 현학이 시작되어 상수 곽상에서 완성된다고 있다. (명교를 왜 moral teaching으로 번역해서 헷갈리게 하는 거지?)

세설과 진서에 나오는 장무동이야기를 보면 이들의 생각이 자연과 도덕에 관한 곽상 버전과 유사함을 있다. 서진 말기에는 명교가 자연이라는 생각 상당히 퍼져 있음.

 

(3) 단어와 의미에 대한 논쟁 (p.86)

근본적으로 사안은 말이 의미를 완전히 표현할 있는가의 문제였음.

공자는 말이 의미를 표현할 있다는 입장, 장자는 반대(천도 ).

<주역. 계사>: ‘언불진의 서불진의’(言不盡意 書不盡意. 말과 글로 뜻을 나타낼 없다) 성인은 상象을 세워서 뜻을 다하고, 괘卦를 세워서 참과 거짓을 다하며, 문사를 이어서 말을 다한다(聖人立象 以盡意 設卦 以盡情僞 繫辭焉 設卦以盡其言).

서진 시기까지 도전받지 않은 관점이다. 구양건(271~300) 언진의론 쓰기 전까지. 전문 해석 첨부. (pp.88~89)

뇌동이 위제에게 묻길, 사람들은 말이 의미를 완전히 전달할 없다고 보는데 당신만 아니라고 한다. 이유가 뭐냐? 위제가 말하길, …원리는 마음에 의해 이해되지만, (word) 없다면 드러날 없다. 사물은 자체로 결정되어 있지만 명칭이 아니면 구별될 없다. … 그러므로 언어는 의미를 완전히 전달할 있다. (명론 비슷한 느낌이네)

-여기서는 가지 주요 포인트가 있음. (1) matter and principle word보다 선행. (2) 명칭은 사물을 구분 짓기 위한 . (3) 명칭과 말은 matter and principle 더불어 변한다. 그리하여 분리 불가능한 unity 형성한다. 여기서 문제는 가지 포인트가 맞다 해도 결론(언어는 의미를 완전히 전달할 있다) 논리적으로 도출될 있느냐는 . 구양달은 자기 주장을 입증하지 못했다. 그가 사용한 메타포 소리와 메아리에서 메이라는 소리를 완전히 전달하지 못하니까.

언불진의 상식이다. (논문을 뭐 이렇게 쓰지?) 문제는 공자의 전제 언불진의 받아들인다면 괘나 상도 의미를 완전히 표현할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는 . 그리하여 시기에 문제가 계속해서 논의되었음.

 

[10 3]

(4) 성인이 감정을 갖고 있는가에 대한 논쟁 (p.91)

<문학 57> Sengyi and Wang Xiu(동진 시기 사람). S 성인은 감정이 없다 했음. 문제는 청담에서 오래된 타픽. 성인은 감정 없다는 설은 하안이 창립. 왕필은 성인에게 감정이 있다고 했음. (하안은 성인에게 희로애락이 없다 했음) 위의 일화는 동진 때까지 논쟁에 결론 나지 않았음을 보여줌.

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인간의 감정’ ‘인간의 본성’, ‘성인 관한 이론들을 알아야 . 본성은 하늘에서 부여 받은 것인데 반해 감정은 외적 자극에 대한 우리의 반응. 성인은 완벽한 존재이고, 성인과 하늘의 법칙은 하나로 통합되어 있음.

한대 학자들은 인간 본성과 감정의 관계에 대한 가지 이론을 제출. 동중서, 유향 .

동진 시대에는 성인은 감정을 잊는다 설도 나왔음. (언어 51) 그것은 성인은 감정이 없다는 주장의 연장(extension)이었음. (p.96)

 

 

김성진, 조선후기 소품체 산문연구,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1.

 

I. 서론

 1. 문제의 제기

 2. 연구의 대상과 방법

 

II. 소품체 산문의 형성 배경

 1. 신분체제의 동요와 소외문인군의 동향

 2. 학풍과 세계관의 다원화 현상

 3. 반의고적 문풍과 공안파의 영향 (27)

 

III. 소품체 산문의 유형

 1. 유기류

 2. 서발류

 3. 척독류

 4. 수상잡록류

 

IV. 소품체 산문의 특질

 1. 진기추구와 서정지향

 2. '금시''조선'의 중시

 3. 우언적 표현과 해학미

 4. 문답과 반복의 서술구조

 5. 속어사용과 풍속설화의 수용

 

V. 소품체 산문의 문학사적 위상

 1. 소품체 산문의 문학적 의미

 2. 소품의 내재적 발전과 그 추이 (160)

 

VI. 결론

 

*초록

소품체 산문이란 주로 명말 공안파에 의해 주도원 소품의 경향을 띠고 청신한 문체로 신변잡사나 내면세계를 진솔하게 묘사했던 산문을 말한다. 소품체 산문을 구사했던 대표적인 문인인 박지원·이덕무·박제가·이옥·김려 등이다. 이들은 문학을 과거에 의한 출세의 수단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으므로 경학이나 도덕과 같은 문학 외적 제약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리하여 뛰어난 서정성과 참신한 언어 구사를 통해 당대 문단에 새로운 기풍을 진작시켰다. 이러한 새로운 문풍은 신분체제의 동요와 사유구조의 다원화라는 영·정 연간의 변화기적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허균과 김창협, 이의현 등으로 이어지는 반의고적 문학관을 계승하였으며 성령 위주의 공안파 문학관을 수용하였다. 이들 문학관의 핵심은 眞機의 추구에 있었다. 이들의 眞機 추구는 시대적으로는 보다 , 공간적으로는 중국보다 조선에 가치를 두는 현상으로 구체화되었다. 소품체 산문가들은 ···詔令과 같은 館閣廟堂之文보다는 遊記·尺牘·序跋·隨想雜錄·日記와 같은 문예적 산문에 힘을 기울였다. 소품체 산문은 우언과 풍자를 많이 사용하였으며 주객의 문답을 통해 자신의 논지를 펼쳐나가는 수사기법을 구사하였다. 특히 이전의 문학에서 금기시했던 민간의 풍속과 설화가 상당한 수준으로 수용되고 있으며 속담도 자주 인용되었다. 서발과 누정기, 그리고 척독 등에 나타난 이와같은 문장의 질적 변화가 바로 보수적 문인들에 의한 반소품적 문체반정을 촉발시킨 주된 요인이었던 것이다. 소품체 산문의 배척을 목표로 한 이와같은 문체반정의 존재는 오히려 소품체 산문의 문학적 가치와 의미를 확인시켜 준다. 소품체 산문은 문체반정 이후로는 쇠미하게 되나 이들이 추구했던 眞機抒情 중시는 김정희의 문하생들이 중심이 된 성령론으로 계승되었다. 그리고 소품체 산문가들이 시도했던 언문일치의 노력은 姜璋을 비롯한 金正喜의 제자들에게 계승되었는데, 이들이 후일 개화파의 주역이 되었으니만큼 소품체 산문은 국한문혼용과 개화기 문학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I. 서론

-그간 조선후기 산문 연구는 소설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소품의 개념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 그런데 김도련은 박지원의 글을 소품이라는 차원에서 조명했음. (그러나 그 연구에 한계가 있음. 여한십가문초 같은 것은 고문으로 쓰여진 것인데 그에 대해 소품적 측면에서 분류하고 기술하여 혼선이 빚어짐) 조선 후기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품체 산문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소품의 특성: 4~7.

 

II. 소품체 산문의 형성 배경

 3. 반의고적 문풍과 공안파의 영향 (27)

  가. 반의고문풍의 대두와 소품체로의 전이

  나. 중국 공안파와 소품체 산문 (31)

-소품은 형식보다 내용에 의해 구별되는 것으로, 고문체 발전의 한 양상으로 볼 수 있다.

-의고문파의 대두, 조선에서는 의고문파라 하면 이반룡·왕세정을 가리켰고, 이들의 글이 유입된 것은 선조 연간. ·이의 문학론에 따라 글 지은 것은 최립. 이후 의고파에 대한 반발이 등장하고 반의고 문풍은 김창협 등에 의해 주도되었음. 이들이 보수화되는데 그들이 남유용, 황경원, 유한준, 박준원, 홍석주, 김매순 등임. 반면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김려, 이옥 등은 초월 아속의 진보적 문학관. (그 이후의 전개에 대한 서술은 생략)

 

-공안파의 등장. ‘獨抒性靈의 기치. 이들은 호북성 공안인이라서 공안파라 불렸음. 이들은 백거이와 소식을 전범으로 삼았는데, 소식의 문장 중 單文小記를 즐겨 읽었다.

-공안파 문인들은 정통 고문에서 꺼리는 동요, 방언, 가담항설을 활용하고, 소설과 희곡에도 새로운 의미 부여. (34)

-공안파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문헌적 증거가 있는) 문인은 이덕무. (35)

 

V. 소품체 산문의 문학사적 위상

 2. 소품의 내재적 발전과 그 추이 (160)

-이규보: 신어 사용 주장하고 문장의 법식에 매이기를 거부했다. 속어까지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짧은 글로 인생의 철리를 전하는 미감을 보여주었음. ) 鏡說.

-여말 선초에는 주로 을 중심으로 소품의 명맥이 이어져 왔다. (李詹, 강희맹 등) (163)

-허균은 모방과 투식을 반대하고 (文說), 常語 사용을 주장했음. 그러나 그의 상어 사용 주장은 고문 작법의 하나로 든 것이지, 구비문학적 요소를 수용하려 한 것은 아님. (163~164) 허균은 문장의 기능을 通情載道로 봤음. 재도지문과 달의를 주장한 점에서 여느 고문가들과 마찬가지임. (164)

하지만 허균이 예교에 구속된 것은 아니다. (근거로 허균의 문파관작과 안정복의 천학문답남녀의 정욕은 천성이요 윤기의 분별은 성인의 가르침이란 대목을 인용) (164~165) 또한 허균의 상어 사용 주장은 조선 후기 문장가들처럼 적극적으로 今文을 내세우고 雅語에 대비되는 속어사용을 말한 것이라 보긴 어렵다. 그는 여전히 도와 문의 분리를 개탄하고 재도지문을 추구했다. (165)

 

VI. 결론

1) 한문학에서 말하는 소품이란 대개 만명 공안파에 의해 주도된 단소한 길이의 서정적 산문을 의미함. 본래 불교 용어였으나 만명에 이르러 문학 분류의 명칭으로 굳어진 것.

2) 소품체 산문은 신분 체제의 동요와 사유 구조의 다원화라는 영정 연간의 변혁기적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으며, 몰락 양반이나 중인층 같은 소외 문인군의 움직임과 밀접 관련.

3) 소품체 문장가들은 ···詔令 같은 관각묘당지문보다 유기·척독·서발·수상잡록·일기 같은 문예적 산문에 주력했음. 그 결과 서발 중에서도 단소한 성격의 제발이 많이 지어지고 서독류 중에서도 단소한 길이의 척독이 분립되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4) 眞機 추구, 서정지향적 문체 구사. ‘진기今時와 조선에서 구하려 했다 (후략)

5) 소품체 산문 배척을 목표로 했던 문체반정의 존재는 소품체 산문의 문학적 가치와 의미를 확인시켜 준다.

6) 소품문 산문의 前史(내재적 발전): 이규보, 이첨, 이달충, 이곡, 강희맹 등이 뛰어난 서정 산문을 남겼다. 이들에 비해 허균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조선 후기 소품체 산문에 상당히 접근. 허균은 자아를 중시해야 한다 했고 상어 사용 강조, 반의고론을 내세웠다. 그러나 그는 또 재도지문을 추구했고, 민간 전승적 요소의 수용까지는 이루지 못했음. 그럼에도 예교보다 남녀간의 정을 우위에 놓음으로써 소품체 산문의 중요한 특질 중 하나인 경학으로부터 문장의 분립과 서정지향의 단서를 열어주었다. 이처럼 소품체 산문은 공안파 영향 뿐 아니라 여말 이래 이어진 서정 산문의맥을 이은 것이다. (171)

 

-전체적인 논지에 동의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배운 것이 많고 읽기에 즐거운 모범적인 논문이었다. 이 논문의 프레임이나 주장 모두에 동의하지 않는 독자에게도 후행 연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인사이트를 제공한다. 

임유경, 조선중기 한문우언산문연구, 이화여대 박사학위논문, 2015.

 

*목차

I. 서론

A. 연구의 필요성과 목적

B. 연구사 검토

 

II. 조선중기 한문우언산문의 형성 배경

 A. 전통적인 요인들의 기반: 중기 이전 우언산문의 흐름과 특성

 B. 외래적인 요인들의 역할: 고문론의 수용과 전개

 

III. 조선중기 한문우언산문의 자료와 주요 작가

 A. 작품의 현황과 분포

 B. 주요 작가의 우언 창작 경위

  1. 유몽인 : 성찰 도구로서의 언어와 함축적 서사

  2. 허균 : 세계에 대한 비판적 냉소와 유희의 서사

  3. 조찬한 : 노장적 세계관과 자아의 본질 탐구

  4. 장유 : 다원주의적 사상과 인간 정신에 관한 탐구

 

IV. 조선중기 한문우언산문의 작품 구현 양상

 A. 다양한 사상의 포용과 우언 형식의 질적 변화

 B. 당대 현실에 대한 비판력 제고와 우언 서사의 역량 확대

 C. 참지식의 실체 추구와 언어 소통 방식의 다변화

 D. 인간 본성에 관한 고찰과 풍자성 강화

 

V. 조선중기 한문우언산문의 특징과 문학사적 의의

 A. 조선중기 한문우언산문의 특징

 B. 조선중기 한문우언산문의 문학사적 의의

 

VI. 결론 198 (207)

 

*감상

-어떤 산문에 우언적 성격이 있다는 것과, 해당 산문을 우언으로 규정하는 것은 다르지 않을까? 이런 산문들을 뽑아내서 ‘우언’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상당히 강한 주장인데 그게 설득력 있는 입론으로 성립할 수 있을까.

 

*결론

-우언 중 다수 작품은 처럼 논리성이 중요한 전통 교술 장르에 허구적 대화가 삽입, 우언 서사의 발전이 전개된 것.

-논의 요약

II장은 형성 배경(내적 전통과 외래 요인 양 방면으로 나눠 보겠다고 했는데 그 점이 요약이 제대로 안 된 것 같다): 진한 고문의 영향을 받고 산문 선집과 산문 비평에 일익을 담당했던 문인들이 우언 작품을 남겼다.

III장에서는 우언 자료와 주요 작가 검토: 전쟁과 당쟁 시기 시대와의 불화에 대한 대응 방식으로, 평범한 서사나 논리적 서사가 아닌 논증과 서사를 택했다. (이규보와는 뭐가 다른가? 그런 식이면 김시습의 금오신화도 우언이라고 말하지 못할 게 뭔가?)

-유몽인: 간결한 서사체, 함축적 의미를 담았다. 고문이 추구하는 간결한 어휘 배치를 통해 의미있고 힘차고 재미있는 서사가 가능해졌다. (장난하나? 이걸 분석이라고 써 놓았나?)

戱效戰國策水鏡堂記(정인홍과 이이첨 일가를 비판하는 작품), 「贈乾鳳寺僧信誾序」(불교나 노장의 영향력-원전을 대략 확인해 본 바에 의하면 적실한 해석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등등...

-허균: 사회적 혼란과 개인의 급진적 정치 성향, 구애됨 없는 태도 속에서 고아한 섬세미보다 세계와의 갈등, 소외된 자아를 드러내는 수법을 택했다. 몽해, 주흘옹몽기, 대힐자등의 우언. 세계와의 갈등과 비난을 대하는 서사. 세계와 인간에 대한 작가의 비판과 냉소를 다룬 솜씨가 드러나는 작품.

-조찬한: 玄夫對(백면서생이라는 자아가 소유한 무위 지향의 삶에 대해 토로. 노장적 세계관을 작품 속 자아관을 통해 드러냈다. 노장적 세계관과 버림받은 인재에 대한 비애감이라는 형이상학적이고 존재론적 산문을 남겼으면서도 현실에 대한 관찰을 담은 우언을 남겼다. 蜂衛記, (벌의 생태 관찰, 조직성과 충성심 묘사), 圈豚說(돼지 행동과 성향 관찰을 통해 인간의 욕심 비판). 정신적 가치와 인간의 도리에 관한 주제를 다룰 뿐 아니라, 생활 관찰을 통해 보다 높은 가치를 형상화 해내는 우언작가로 등장하게 되었음을 의미. 筆諫賦(말보다 사물을 통해 간언)

-장유: 우언초나라 공자와 제나라 동곽선생이 조각 잘하는 장인과 무극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용.

네 명의 공통점은 선진 양한의 고문 혹은 당의 고문을 본받고자 하는 고문 추숭 영향 아래 있던 작가들이란 점이다. (조선에서 안 그런 작가도 있는가.) 장자와 제자 백가의 산문적 기세와 사상에 관심. 주자학 범주를 벗어나 관심사가 폭넓은 문인. 조선 중기라는 변혁기를 살았던 지식인의 고난과 삶의 역정을 우언을 통해 표출하려는 성향. (아무말대잔치)

 

IV 주제와 작품 구현 양상: 노장적 불교적 제자백가적 사고를 내재화, 적용 시도. 그 이유는 유교적 세계관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문학적 해결 방식으로서 우언 서사가 지니는 효용과 가치를 인지했기 때문. 특히 조선 중기 우언에서 보이는 도교적 세계관에 대한 관심은 명과의 교류 및 서적 수입, 학문적 관심 뿐 아니라 전쟁 경험, 상실감, 사후 세계나 피안에 대한 종교적 경도라고 설명될 수 있다. (그건 설명이 아니다. 나도 석사 때 할 말 없어서 대충 이런 말로 뭉개고 넘어갔지만, 자기 내키는 아무 말이나 갖다 붙여 놓은 데 지나지 않는다. 전쟁 겪은 사람들이 다 도교에 빠지는 것도 아니고.) 개인의 비극적 체험과 개성 때문.

조선 중기에는 다양한 사상들이 문학에 수용, 표현되고 있었고 우언도 마찬가지.

현실 비판 기능: 인재 등용, 치인의 자세, 진퇴 문제, 출사와 은둔 같은 것이 우언 속에서 구체적, 논리적으로 발전된 주제들이다. 특히 우회적 비판을 추구하는 우언 서사는 비판적 시선이 견지됨. 우언 서사의 문학적 수법 구체화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있었음.

우언은 설득이라는 논리의 세계에서 발생한 서사 방식이지만, (...) 삶의 불가해성을 인정하고 극복할 방법에 대한 성찰을 우언 창작을 통해 모색.

-유몽인: 문답식 우언을 형상화. 반문의 방식 애용. 장유 등 우언작가들에게서는 강한 의론성이 보임. 이는 당송고문을 익힌 과정에서 얻은 결과인 듯.

-낭만과 환상보다 각성에 더 집중하는 것이 조선 중기 우언의 특징. 강한 의론성. (우언이 당연히 의론성이 높지) 허구성 강화(허균과 유몽인).

-참 지식의 실체 추구와 언어 소통 방식의 다변화 양상. (허균의 문설도 우언으로 치는데 납득하기 어렵다.)

-조선 중기 우언이 관심을 둔 인간 본성에 대한 고찰과 우언의 풍자성에 대한 고찰을 통해 드러난 것 네 가지: 인간과 동물, 자연계에 대한 성찰 보다 구체성을 띤 비판과 풍자 (권력욕 출세욕을 풍자한 우언, 국혼과 관련된 인간의 탐욕을 형상화한 두더지 결혼 종류의 우언) 전대의 우언을 이어 곤충과 동물 세태에 대한 관찰을 통해 인간 본성이나 인간사에 대한 비유를 시도. 동물이 인간보다 우위에 선 존재로 묘사. (샘플이 작아서 그렇게 보이는 것 아닌지) 돈과 학문적 이해관계에서 보이는 인간의 저열함에 대한 풍자.

 

V장 문학사적 의의: 당고려 후기 우언은 전대 우언이 갖고 있던 이야기로서의 우언 서사에 논리와 철학적 사고를 첨가, 일정한 발전을 이룸. 사실과 허구에 대한 태도, 시대적 문제에 대한 관심이란 점에서 미루어 볼 때 조선 중기 우언은 과도기적, 혼합적 양상을 보인다. 조선 중기 우언은 전대에 비해 생활 현실과 가까운 인물, 현실 시공간이 배경. (무슨 쌍팔년대식 얘기) 지식인이 추구하는 참 지식의 의미와 그 주체로서의 자아에 대해서도 관심. 자아를 타자화 하여 객관적 관찰 시도. 우언의 민중 설화 수용. (구토지설에서 시작되었지만 16세기 들어 다수 보임) 우언의 희극성과 효용성에 관한 인식. 비판성, 정치적 효용. (이 사람 식으로 글을 읽으면 세설신어 같은 것도 몽땅 우언이라고 할 기세다.)

 

-각주 12번에서 조선중기론을 얘기하는데, 그것은 일반사에서의 조선 중기 설정 문제로, 문학사적 시대구분과는 전혀 무관한 얘기다.

-‘우언’이라는 무지막지한 개념을 연구의 중심 개념으로 정해놓았으면서도 ‘우언’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 없이 서론이 시작된다.

-전체적으로 정확한 학술언어 구사능력을 결한 논문이다. 비문이 많고 의미 성립이 안 되는 모호한 문장이 많아 논지 파악 자체가 어려움.

 

*영문초록에 우언을 allegory prose라고 해 놓았다.

*서론: 우언을 장르로 보는 관점과 수사법으로 보는 관점, 둘로 대별된다.

(굳이 그렇게 대별한다면야, 상식적으로, 수사법으로 봐야 온당한 것 아닌가. ‘우언’이란 것이 ‘기·서·발’ 따위와 동등한 공식적 장르로 성립된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것을 장르로 보겠다는 과감한 주장을 할 수 있는지 전혀 짐작이 안 된다.) 본고는 서사기법으로서의 우언에 집중. 우언을 글쓰기 기법차원에서 검토. (연구 설계와 충돌하는 이야기다.)

 

*II: 논리성 가진 서사와 허구가 우언의 핵심. (15)

내적 요인에 대한 얘기 대목은 너무나 서술이 오락가락해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음.

외래 요인을 전후칠자 문학론 운운했는데 정말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는지, 그냥 16세기 말이라고 하면 갖다 붙이는 말을 아무렇게나 갖다 붙여 놓은 것인지.

 

*III장에서 우언 작품 분포를 표로 정리: 32~36.

그 중 다수 집계해 놓은 고상안 것은 덜 첨예하고 들은 이야기 서술 정도에 그치고 있어서 제외한다고 함.

-유몽인 우언작품에 대한 연구자들의 시각 비교: 45. (이런 규정을 살펴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허균: 세계에 대한 비판적 냉소와 유희의 서사.

주흘옹몽기, 순군부군청기, 문설, 몽해, 대힐자, 산구게, 몽기. (전혀 근거 없는 자의적인 분류다)

-조찬한: 노장적 세계관과 자아의 본질 탐구. 辭賦로 유명했던 작가. 강명관은 조찬한을 윤근수, 최립, 유몽인, 신흠, 허균과 함께 진한고문파로 분류. (16세기 말 17세기 초 의고문파의 수용과 진한고문파의 성립 *안쪽과 바깥쪽에도 실려 있음.)

-장유: 다원주의적 사상과 인간 정신에 관한 탐구.

 

장에서.

허균은 정치적 인물에 대한 비판보다 자신에 대한 공격에 대응하는 변명이나 논박을 하는 작품 창작에 주력. (84) (그보다 단순명료한 설명은 정인홍에게 동조하고 있었으므로 비판의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것이다.)

작가의 세계관을 사실과 허구 속에 교직하며 나아간 서사문학의 변화 발전에서 중요한 흐름. (우언이 이 시기에 서사적 역량이 발전했다고 하는데 무엇이 발전했다는 것인지.)

‘참 지식의 추구’라는 것을 이 시기 우언의 특성이라고 해 놓았는데, 그러면 다른 시대 사람들은 ‘거짓 지식을 추구’했겠나.

 

곽정례, 허씨오문장가의 문학적 배경과 활동에 관한 연구,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내 연구와 관련된 부분만 발췌 요약하고 소감을 달았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이라느니 하는 낡은 프레임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으며, 16~17세기 정계나 문화계의 동향에 대해 개설적이거나 불충분한 정도의 역사 연구 요약이 긴 비중(가령 4장 1절)을 차지하고 있다. 일가를 한 단위로 연구해야 한다고 전제하고 시작하지만, 그 이유가 납득되지 않으며, 각 형제 간 유사한 지향성이 발견되면 이를 별 단순히 가학의 영향으로 귀착시키는 순환 논리가 문제다. 

또 허균에 관한 논의 대목에서는 허균의 다양한 지적 관심사를 기호로 환원시킴으로써 실질적으로 아무 것도 설명하고 있지 못한 점이 가장 큰 문제이다. 또 허균의 천주교 수입설에 대해서 그렇게 비중 있게 다룰 필요가 있는지도 납득되지 않는다. 

 

*목차

I. 서론 

1. 연구 목적   2. 연구사 검토 3. 연구 대상 및 범위

 

II. 허엽 학통의 형성과 전개 

1. 허엽 학문의 연원 

1) 장음정 나식 : 도덕적 실천의 지향 

2) 송애 이여(李畬)와 모재 김안국 : '박학''실용'의 풍모 

3) 윤정숙과 탄수 이연경 : 학문적 유연성의 획득 

4) 화담 서경덕 : 독창적 사유의 방식 

 

2. 학맥의 계승과 교유 양상 

1) 허엽 : 인맥의 구축과 확대 

2) 허성·허봉 : 선대의 이념 및 학맥의 계승

3) 허균 : 가학적 전통의 수용과 변형

 

III. 사유의 개방성 및 문화적 자존감의 구현 

1. 허성 : 기일원론자적 인식

1) 기전도설후어에 나타난 조선후기 실학사상의 맹아

2) 문화 교류의 측면에서 본 조선유학의 해외 전파 

3) 위항문학의 태동과 '삼각산 승가사 시회'의 의의 

2. 허봉 : '정학''이단', 그 사유의 경계면 

1) 해동야언: 사상적 지향의 탐구

2) 조천기에 드러난 양명학 변척의 진의 142

3. 허난설헌 : 여성, 소수자로서의 글쓰기

1) 난설헌에게 있어서의 '정체성' 문제 

2) 난설헌 문학 연구, '여성주의적' 시각에 대한 반성 

4. 허균 : '다독''박학'의 추구 

1) '기호'로서의 문학·예술·사상

2) 허균의 '천주교 수입설'에 관한 검토

 

IV. 가정 내 문예의식의 성장과 그 변인 

1. 사림 유풍의 계승과 도학에의 지향 

2. 문예의식의 각성과 천재성의 발현

3. 문예적 전통의 수립과 심화

 

V. 결론 

 

*주요 내용

 

I. 서론

1. 연구 목적

(연구대상에게 文名이 있었다는 서술로 시작하는데, 이 시기에 그런 인물이나 일가(신흠 부자 등)가 허씨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왜 이렇게 시작한 것일까. 허엽 一門 전체를 다룬다는 대상 설정의 근거로, 주자학에 매몰되지 않은 서경덕 학통을 계승한 허엽 일문의 가학이 있었다는 것을 든다. 요점인즉 허엽 일문의 가학과 사상 특질이 문단과 사상계에 어떻게 발현되었고, 임란 이후 문화 변동에 어떻게 기여했는지 규명하는 것이 목표. 또 허엽 일문이 문예로 이름을 얻게 된 변인 규명, 조선 중기 문예 의식의 정립과 특징 구명.) (여전히 왜 一門을 한 덩어리로 설정해야 하는지 석연치 않다.)

 

2. 연구사 검토

(허경진은 허균 시를 현실에 대한 불화와 극복으로 보고, 현존하는 허균 시가 현실 극복 과정을 형상화 한 것으로 봄. 안병학과 황위주 등은 현실 참여의 의지와 실제 현실 사이에서 고뇌한 것에 주목하고 이로 인해 방황하는 자의식을 표현한 것이라 봄. 최근에는 도교 불교 풍속 요소에 천착하거나 사행시에 집중. 산문 전반을 논한 것으로는 이문규의 연구. 기에서 전으로 홍길동전으로의 이행을 설정한 것이 골자. 최근에는 시 비평가 또는 詩選者의 측면 조명. 논자가 보기에 이들은 계층의식보다는 학파와 문파에 의식이 더 컸던 인물들이므로 학풍과 연관이 깊은 가풍의 차원에서 이들을 조명해야 함.) (선행 연구를 논자의 연구 시각에 입각해서 리뷰하지 않고 있다. 허경진, 안병학, 황위주에 대해서는 논점 정리가 미흡하나마 되어 있지만, 그 외의 연구에 대해서는 각 연구들이 대상으로 무엇을 설정했는가에 대해서만 언급한 후, 계층 의식보다는 학파나 문파가 중요하다고 선언만 하고 있어서, 왜 가문을 한 단위로 설정해야 하는지가 납득되지 않았다)

 

3. 연구 대상 및 범위 

(중세적 사고에서 벗어나 근대로 이행하던 모습을 조명한다. 가학의 특질을 구명하는 데 초점. 장에서는 허엽의 학통이 실제로 자녀에게 이어졌음을 입증. 장에서는 인물 개개인의 사상적 특질이 발현된 양상. 허성의 기전도설후어-실학의 기본 논점과 문제의식의 맹아, 후지와라 세이카와의 교유, 승가수창록-위항시사의 원형이 됨, 침류대 시사와의 관련성. 허봉의 해동야언에 나타난 사상적 지향, 조천기-양명학 변척의 배경과 진의, 허난설헌-여성으로서 겪은 정체성의 혼란. 허엽 일문의 학문적 특징은 박학개방성’. 허균의 폭넓은 지적 호기심은 가학 전통에서 왔음을 입증. 허균의 천주교 수입 논란. 가정 내 문예 의식의 정립과 변화 양상. 허엽은 기묘 사림의 유풍을 이어 경학 연구에 치중. 자녀 대에 문예에 치중.) (허균의 천주교 수입 논란을 왜 다루는지 납득되지 않는다. 굳이 논해야 할 정도로 설득력 있는 학설이었던 적이 있는가.)

 

II. 허엽 학통의 형성과 전개

1. 허엽 학문의 연원

1) 장음정 나식 : 도덕적 실천의 지향

2) 송애 이여와 모재 김안국 : '박학''실용'의 풍모 

(여기까지는 허엽 학문의 연원에 대한 탐색이 허균의 「성옹지소록」 내용에 주로 의존하고 있는데, 그래도 좋은 것인지 의문이 든다. 만약 그렇다면 허엽 학문의 연원 자체라기보다 허균에 의해 구성된 계보라고 해야 타당한 것 아닌가.)

3) 윤정숙과 탄수 이연경 : 학문적 유연성의 획득 

(동유사우록에서 서경덕 외에 허엽과 윤정숙의 사승관계를 언급함. 이연경은 노수신의 장인(28)이자 스승. )

4) 화담 서경덕 : 독창적 사유의 방식 

(서경덕에게서 가장 오래 배웠다고 성옹지소록에 나옴)

 

2. 학맥의 계승과 교유 양상

(허엽은 김안국과 서경덕 영향을 받아 개방적, 유연한 기일원론자의 사고를 보인다 (45))

1) 허엽 : 인맥의 구축과 확대 ( 1) 서경덕 문인, 2) 기타 재야사림, 3) 이황 문인)

2) 허성·허봉 : 선대의 이념 및 학맥의 계승

(허성은 과거 급제가 늦었고 허봉은 22세에 급제. 성대중의 청성잡기에는 허봉의 영향력이 매우 커서, 고관 대작의 잔치에서 허봉을 기다리게 할 정도였다고 썼음. 유성룡과 허엽 일가의 친분. 허균은 유성룡에게 허봉의 하곡집 서문을 부탁. 허성과 허봉 모두 이황 문인과 교분. 허봉 문집에는 화담 계열 인사보다 이황 문인의 이름이 더 많이 보임.)

3) 허균 : 가학적 전통의 수용과 변형

(허균이 신분에 구애 받지 않고 다양한 사람들과 교유한 것은 가풍의 영향)

 

III. 사유의 개방성 및 문화적 자존감의 구현 

1. 허성 : 기일원론자적 인식 

1) 기전도설후어에 나타난 조선후기 실학사상의 맹아 

2) 문화 교류의 측면에서 본 조선유학의 해외 전파 

3) 위항문학의 태동과 '삼각산 승가사 시회'의 의의 

2. 허봉 : '정학''이단', 그 사유의 경계면

1) 해동야언: 사상적 지향의 탐구

2) 조천기에 드러난 양명학 변척의 진의

(논점 자체가 잘 파악이 안 되는데 대략, "허봉은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양명학에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양명학에 대한 독자적 견해 역시 어느 수준까지는 정립되어 있었을 것으로 판단"-162쪽, "허봉 자신이 양명학에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치적 노선과 조선 유학계의 논의를 따라 개인적 견해를 표명하지 않았을 가능성"-157쪽, "필자는 허봉이 공적 입장과는 무관하게 순수한 개인적 의도로 변척에 참여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조선 유학의 학문적 성과를 유학의 종주인 중국에 과시할 목적으로 사행에 자원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162쪽, 의 말이 핵심인 듯. )

3. 허난설헌 : 여성, 소수자로서의 글쓰기 

1) 난설헌에게 있어서의 '정체성' 문제 

2) 난설헌 문학 연구, '여성주의적' 시각에 대한 반성 

 

4. 허균 : '다독''박학'의 추구

1) '기호'로서의 문학·예술·사상

(음악, 미술에 대한 관심. 유교 경전에 대한 것이나 이단 사상이나 예술 모두 지적 탐구의 대상이고, 기호에 의해 취택되어 문화적 욕구를 충족하는 데 썼다.) (개인 취향이라고 하게 되면 도무지 설명된 게 없는 것 아닌가?)

2) 허균의 '천주교 수입설'에 관한 검토

(최강현은 을병조천록 해제에서 偶吟시에 나오는 天公이 곧 天主, 천주교 신앙생활 한 것 아닌가 의심해 본다고 말한 적이 있음. 최강현 책 83, 유홍렬 1962년 한국천주교회사에서 허균이 천주교를 믿었다는 설 제시. 조선에 천주실의가 소개된 것은 1609~1611년 사이, 유몽인과 이수광이 사신단으로 북경을 방문한 무렵. 균이 1614년 사행에서 지도와 게 12장을 가지고 왔다는 야사의 기록을 연암집 권2에서 답순사서에서 언급하면서 사학을 배우는 자들은 허균의 잔당이라 한 것이 있음. 허균을 조선 내 천주교도의 원조로 봄. 19세기 이규경도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이식의 말을 인용하면서 허균이 천주교의 책을 얻어 학습하여, 남녀의 정욕은 하늘이 내린 것 운운. 하지만 이식의 글 택당집 별집 15시아대필에는 허균의 천주교를 믿었다는 말은 없다. 이능화가 1928년에 <조선기독교급외교사>에서, 허균이 천주교를 믿은 효시라 말한 적 있음. 허균이 가져왔다는 게가 찬미가라느니 기도문이라느니 하는 설이 있음. 220~221쪽에 나옴. 금장태는 허균에게서 서학과 유사한 입장이 발견될 수 있다는 견해를 편 적은 있음. 최강현 말로 돌아가보면, 허균의 한정록에도 天公의 용례가 보이며, 카톨릭에서 말하는 천주의 의미로 한정시키기 어려울 것.)

 

IV. 가정 내 문예의식의 성장과 그 변인 

1. 사림 유풍의 계승과 도학에의 지향

(허성은 젊은 시절 삼각산 승가사에 모여 성리대전을 읽고자 했고 악록집 부록 여허지사서, 휴정의 문도 계원과 함께 반야심경을 읽기도 했음.(237))

2. 문예의식의 각성과 천재성의 발현

(홍만종은 허봉의 시가 천부적이라고 했음. 허봉이 9세 때 지었다는 금전화를 예로 든 소화시평인용. 허봉에 대한 호평자로 유성룡 발허난설헌집’, 신익성 본조에서는...하곡이 일어나서 한 시대를 크게 울렸으니’ ‘제동명사상록’; 허봉은 송시에서 당시로. 당대 문화적 변화와도 유관. 사가독서 시절인 1573년 명나라 고병이 엮은 당시품휘를 접함. 최경창의 고죽유고에는 허봉이 최경창을 자주 찾아왔으나 최경창이 응하지 않아 사이가 틀어졌다는 기록이 있음. 고죽유고의 찬자는 박세채. 임제의 묘갈명을 허목이 썼는데, 그에 따르면 임제의 행동이 거의 당세에 용납되지 못했는데, 이이와 허봉, 양사언 등 소수만이 용납했다고 함. 양사언은 허엽과 동년 급제자. 강릉 부사를 지냈음. 이달이 양사언과 친했고, 허엽도 양사언과 친분이 있었음. 허엽은 이달로 인해 양사언의 평판 훼손될 것을 염려해서 그를 다른 곳으로 보내라고 편지한 적도 있다고 학산초담에 나온다. 각주 718.)

(허봉의 선계 지향적인 시, 贈凝上人, 허봉이 문장에도 뛰어났다는 근거로 학산초담을 인용. -말이 되는 논리인가? 예컨대 해동야언과 조천기 외에도 북변기사, 하곡수어, 의례산주 등 현전하지 않는 저작이 있다고 함. -현전하지도 않는 작품을 가지고 허균의 글에 허봉에 대한 찬사가 나와 있다는 것만으로 허봉의 문예적 능력을 당연시하고 있다. 허성의 외가는 공신집안으로 학문보다 경세에 치중해 있는 경향. 허엽의 후취는 강릉 김씨 김광철의 딸.)

3. 문예적 전통의 수립과 심화

(261쪽에서 ‘문장의 실용성과 의사소통능력’ 운운한 부분은 이규운 논문과 일치하는데, 이 점이 밝혀져 있지 않다. 이 점은 문제. 후대 김창협과 박지원에게 보이는 고문이 금문이라는 논리는 허균에게서 시작, 이 설은 신승훈 2005,168~169. 편장자구에 관한 한국 한문학사 최초의 논의라는 것으로 김우정 2007, 허균 산문의 연구 295쪽을 들고 있는데 만약 이 말이 맞다면 이규운씨는 자기 논문에서 새롭게 밝힌 게 무엇인가. 사회 제도의 모순과 관리 부패에 대한 고발 277)

 

V. 결론 

 

*목차 

I. 서론

1. 문제제기 및 연구 목적

2. 선행연구 검토 및 연구 방향 

 1) 허균 문학의 연구 성과 검토  2) 선행연구의 시사점과 연구방향 

 

II. 허균 문장론의 형성 배경

 1. 중국의 문장작법에 대한 논의 

  1) 의법(義法)에 대한 논의   2) 『문장일관』의 문장 작법

2. 조선의 문장작법에 대한 논의 

 1) 진한고문에 대한 관심과 유입  2) 진한고문에 대한 인식과 실현 양상

 

III. 허균의 산문관과 문장론

 1. 『성소부부고』 편집과 산문관 

  1) 『성소부부고』 개관 및 자편(自編) 경위   2) 문체에 대한 인식과 분류

 2. 허균의 문장론 

 1) 사달(辭達)의 고문론 : 고문의 실용성

 2) 고와 금을 동일시한 문장론 : 내용의 현재성

 3) 편장자법을 중시하는 문장론 : 형식과의 조화

 

IV. 허균 문장론의 구현 양상

1. 의사 전달과 기록을 위한 글쓰기

  1) 독특한 개인적 체험의 글 2) 진솔한 자신의 감정 노출 3) 형식에 매이지 않는 진솔한 문장

2. 금(今)을 형상화한 글쓰기

  1) 현실에 대한 인식

  2) 현실을 반영한 글쓰기

  가. 몽기(夢記)로 현실 비판하기

  나. 기문(記文)을 통한 당세 비판

  다. 현실에 대한 논리적 비판

 3) 새로운 인간형 제시

  가. 진유(眞儒)의 삶 : 「엄처사전」

  나. 시인의 삶 : 「손곡산인전」 

  다. 인간의 삶 : 「남궁선생전」 

3. 법을 중시한 글쓰기

 1) 「학론」의 표현 기교와 편장법  2) 「엄처사전」에 드러나는 편장법

 

V. 허균 문장론의 문학사적 의의

1. 산문 창작론에 대한 인식 2. 실용적 학문에 대한 관심

 

VI. 결론

 

 

*주요 내용

 

I. 서론

1. 문제제기 및 연구 목적 10

(선조-광해군 연간은 자기 표현이 詩歌 중심에서 산문으로 바뀌어 가는 시기. 문학에 대한 인식도 실용성 중심에서 문장의 예술적 가치에 대한 관심도 고조된 시기. 조선에서 드디어 문학 창작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는데 그 중심에 있는 인물이 허균; 문학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대두된 것은 기묘사림의 개혁의 일환이기도 하고, 명대 문학 창작 관련 논쟁이 임란 당시 유입된 때문.)

 

 

2. 선행연구 검토 및 연구 방향 12

 1) 허균 문학의 연구 성과 검토 12

(산문 연구는 주로 홍길동전과 연관시켜 민중의식에 주목(50~70년대). 90년대 이후 문체별 연구 시작. 2000년대 이후 중국 문단과의 관계 조명 시도됨. 강명관의 ‘문설’연구, 척독 연구. 대개 허균의 문학을 ‘개성의 문학’으로 보고, 김창협이나 박지원에게 보이는 고문이 금문이라는 주장이 허균에게서 시작되었다고 봄. 또 의고문파 문학에 몰입했다고도 봄. 특히 허균의 왕세정 숭앙에서 보듯 허균이 의고파를 부정한 게 아님에 주목. 이이화, 정호훈의 역사학계 연구, 외적 영향관계 검토로 박현규나 노경희. 중국 문단과의 교류를 통해 조선 시문을 객관적으로 보는 계기 마련했다는 것이 노경희 연구의 요점이라 봄.)

 2) 선행연구의 시사점과 연구방향 17

(①홍길동전 연구의 주변적 내용 정리 ②소설의 전단계로서의 허균 연구 ③허균의 개성적 문학론과 의고적 문학 경도에 대한 논란 해명: 허균 자신은 옥하가옥의 작문을 반대했으나 다른 한편 의고문파 왕세정이나 이반룡의 글에 깊이 경도된 점. ④허균 산문의 특징 개괄적 접근: 개별 내용 연구에 집중 ⑤허균 문학의 출처를 중국에서 찾는 경우) (이 모든 말을 각주 없이 써 놓은 점이 문제)

(①문학 창작 방법론[일반]에 대한 연구 부재 ②허균의 문학 창작론에 대한 검토 부족-이 사안이 「문설」과 「시변」 두 편의 검토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인가?, ③허균이 산문에 담아내고자 한 것은 의고적인 문학이론이 아니고 다른 새로운 것 ④허균의 문장론과 실제 작품 간 유기적 관계에 대한 연구 부족 –작자의 문장론과 문학 창작간에 유기적 관계가 있다고 상정하는 것 자체가 타당한가? 관계가 없다고 보는 게 더 자연스런 가정 아닌가? 혹은 있는지 없는지는 따져보아야 할 문제로 열어두는 데서 출발하는 게 맞지 않나? ⑤허균의 수사적 층위의 문장론과 개성적 문학론이 후대 문인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간과–이 사안에 대해서 이 논문이 대답한 것이 너무 소략하다. 이식, 김창협 등에게 이어진다는 것은 논자가 밝힌 것이 아니라, 기존 연구에서 이미 시사된 내용을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II. 허균 문장론의 형성 배경

1. 중국의 문장작법에 대한 논의 20

1) 의법(義法)에 대한 논의 20

(의법: 내용과 형식. 의법론을 체계화한 것은 淸代 안휘성의 동성파 문인. 義는 문장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法은 문장을 어떻게 쓸 것인가의 문제. 법이란 편장구성과 단락구성, 표현기교를 포괄.)

2) 『문장일관』의 문장 작법 24 (明 진사 高琦가 편집)

가. 편장의 구성 25 (6단 구성, 등 문장일관 내용 소개, 載事之文과 載言之文 등)

나. 연자(鍊字)와 조어 33 (완급과 경중, 온당자 사용 등 문장일관 내용 소개)

 

2. 조선의 문장작법에 대한 논의 38

1) 진한고문에 대한 관심과 유입 40

(윤근수[1537-161], 최립[1539-1612]을 중심으로. 산문 창작에 모종의 변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전후칠자 문장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났다는 줄거리. 최립은 조선 전기 산문에 대한 의식적 단절을 시도 하지 않았음[김우정의 논지 반복].)

2) 진한고문에 대한 인식과 실현 양상 49 (유몽인을 중심으로)

가. 송문 배격과 전범 설정 50

(어우집 권4 「答崔評事有海書」: 구양수의 글은 평이해서 문제; 어우집 권5 「報滄洲道士車萬里雲輅書」: 육경보다 그 주해 학습에 몰두하는 데 대한 비판; 「大家文會跋」: 한유를 배우려면 한유가 모범으로 삼았던 삼대와 양한의 글을 배워야 한다, 전국책과 유종원 글도 배워야 한다)

나. 기간(奇簡)의 난해성과 문학성 55

(「答年兄林公直書」: 오늘날의 문장은 어조사를 너무 써서 지나치게 부드럽다. 좌씨나 사마천의 문장을 아전에게 읽게 하면 세상을 속이는 문장이라 할 것, 창작의 목표는 천만년 동안 읽히는 것; 「與尹進士彬書」: “師其簡者遺其肆。體其峻者略其法[간략함을 본받는 자는 방대함을 놓쳤고, 험벽함을 체득하고자 한 자는 법(法)에 소홀]”, 전범의 문체적 특징을 자득을 통해 터득해야 한다.)

 

III. 허균의 산문관과 문장론

1. 『성소부부고』 편집과 산문관 63

1) 『성소부부고』 개관 및 자편(自編) 경위 63

(자편이유: 후세에 남기려는 의식,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왕세정의 자찬 문집에 고무됨)

2) 문체에 대한 인식과 분류 68

(①종전까지는 오언이나 칠언 등 형식 중심으로 분류했으나, 허균은 연대순으로 편집하고, 창작 경위도 기록함. ②문부에 실린 다양한 글을 형식별로 분류. 요내의 분류에 따라 논자가 다시 정리하고 허균이 산문 문체에 대해 해박하다고 평가함.–말이 되는 논리인가 ③ 自序를 실어 작품 편집의 의도와 과정을 알 수 있게 했음. 예) 「성수시화인」)

 

2. 허균의 문장론 73 (「文說」을 중심으로)

1) 사달(辭達)의 고문론 : 고문의 실용성 74

(실용성과 문학성의 대립 중 실용성을 선택. 난해성 배격하고 文從字順한 문장 추구. 실용성은 의사소통이라고 논자는 해석함. ‘文以通上下之情。以載其道而傳’)

2) 고와 금을 동일시한 문장론 : 내용의 현재성 79

(난해성을 버렸을 때 허균이 문학성을 추구하는 방법은 당세를 담는 것. 「詞翰傳芳序」 “咸謂古人不可及。嗚呼”. 古는 당대의 今으로, 절대적 가치를 지닌 것 아님. 古文은 今文, 當世之常語: 당시의 문자로 백성들의 소박한 삶과 감정을 드러낸, 독자를 위한 문학.)

3) 편장자법을 중시하는 문장론 : 형식과의 조화 83

(허균이 문학성을 추구하는 방법은 自成一家. 屋下架屋식 작문 거부. 當世之常語를 바탕으로 편장자구의 치밀한 구성을 통해 창작한 개성적 문장을 추구. 자구가 아닌 치밀한 문장 구성과 단락 구성에 주안. 문장일관은 16세기에 나오지만 조선에서 편장자법에 대한 논의는 허균의 「문설」이 처음.(82쪽) ①篇法: 한 편의 작품을 통어하는 작자의 의도적인 언어 사용[一意直下者: 하나의 주제를 쓴다, 鉤連筦鑰: 구성의 긴밀성, 節節生情: 마디마디 정감을 일으키는 문장 전개, 鋪敍而用冷語結者: 한 편의 문장에서 구성상의 분위기 전환, 委曲繁瑣而有法者: 세부적인 것을 놓치지 않고 일정한 법이 있음]. ② 章法: 단락의 구성과 안배 방식 [井井不紊者: 문장을 조리있게 배치, 錯落而不雜者: 서술 순서를 뒤집어 놓은 듯하나 잡되지 않게 함, 若斷而承前繳後者: 단절된 듯하나 앞뒤가 이어지게 함, 極宂有極短者: 단락 내 언어량 조절.] ③句法: 허균은 언급 없음, 문장일관 내용 소개 ④字法: 온당자의 선택, 문장일관 내용 소개; 허균의 편장자법 특징: ①작문의 일반론. 모든 작문에 적용 가능, 포괄적 보편적 논의. ②편장의 운용에 집중. 어구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 소홀, 단락 배치에 중점. ③내용이 지극히 간략, 모호. 후대 요내의 논의에 비하면 소략함. 그러나 당대 문이재도라는 문학 인식이 팽배한 상황에서 주제를 부각하는 수사 방법을 고민한 점, 진한 고문을 지향하는 문인들과 달리 편장자법에 관심 가졌다는 것이 의의 있음. (89쪽))

 

IV. 허균 문장론의 구현 양상

1. 의사 전달과 기록을 위한 글쓰기 95

1) 독특한 개인적 체험의 글 97

(「조관기행」: “湫墊多蠅蚤(비좁고 축축, 파리와 벼룩이 들끓었다)”, 「수헐원신영선찬기」: 기이한 경험, 「屠門大嚼 序」: 당대 문인들에게 보이지 않는 신변잡기의 기록, 「讀」: 읽은 경험을 그대로 기록)

2) 진솔한 자신의 감정 노출 102

(조선 전기에는 화국지문 강조. 허균은 자기 감정 노출. 「조관기행」 “寢中萊妓問曰。海陽逢故人乎。曰然。曰。渠無來意否。謾應之曰。主牧欲送之。我辭不許矣” 예교보다 자기 감정에 충실한 삶 추구, 「黃州艶曲」, 「與任約初(己亥元月)」 “依兄宇下...”)

3) 형식에 매이지 않는 진솔한 문장 106

(척독의 가치 높이 평가. 「明尺牘跋」 “森然而環列”은 치밀한 구성을 가리키는 것. 예: 「與韓石峯」 “京邸奉展...” 명나라에서 유행하던 양식이지만 형식에 구애되지 않기 때문에 이 양식을 쓸 수 있었다.–말이 되는 논리인가 조카에게 보낸 척독: 한회일을 탓하지 말라는 편지. 국가의 일 처리가 벌떼만 못하다는 편지 등.)

 

2. 금(今)을 형상화한 글쓰기 113

1) 현실에 대한 인식 113

(허균의 시대는 역사적 혼란기: 유교 교조주의, 당쟁, 사회 혼란과 민생고, 서얼 차별. 허균은 이런 현실에 대한 문제 의식을 지니고 글을 썼다. –현대 연구자들에 의한, 그것도 옛 연구자들에 의한 문제점 지적과, 허균 당대의 perception이 착종되어 있다)

2) 현실을 반영한 글쓰기 115

가. 몽기(夢記)로 현실 비판하기 115

(주흘옹몽기-사대부 대상 교조적 주자학 비판 자신의 파직 경위 해명,

순군부군청기-민중 계몽, 읽는 이를 고려한 글쓰기)

나. 기문(記文)을 통한 당세 비판 122

(함열현객사대청중건기-수령 비판, 함열현 수령 한회일 예찬)

(능파서실기, 통곡헌기, 취학정기-죽림칠현 운운, 당세에 대한 불만 노출)

다. 현실에 대한 논리적 비판 129

(학론-《문장일관》에 제시된 6단 구성법으로 구분. 起-承-鋪-敍-過-結)

(유재론-6단 구성으로 구분. 내용 전개 단계를 도식화하여 제시.)

3) 새로운 인간형 제시 140 (이하는 각 작품의 내용 소개에 그침)

가. 진유(眞儒)의 삶 : 「엄처사전」 141

나. 시인의 삶 : 「손곡산인전」 147

다. 인간의 삶 : 「남궁선생전」 152

 

3. 법을 중시한 글쓰기 163

1) 「학론」의 표현 기교와 편장법 163 

 (三表法-진필상 한문 문체론, 墨子에 나옴. 章法, 開闔法, 주객법, 破理의 활용)

2) 「엄처사전」에 드러나는 편장법 170

 (文眼; 一意直下-현대작문에서 말하는 내용 통일성, 鉤連筦鑰-구성의 긴밀성)

 (敍事: 先事而斷以起事, 後事而斷以盡事-현대논술 귀납법; 편장 운용은 단락 구성.)

 

V. 허균 문장론의 문학사적 의의

1. 산문 창작론에 대한 인식 178

(편장자법, 1) 당대의 법고는 진한고문을 전범으로 하는 의고, 2) 실용성, 산문의 가치를 의사소통에 둠. 3) 현재성, 當世之常語 사용. 李植의 당송 문장, 韓歐正脈으로 이어짐)

2. 실용적 학문에 대한 관심 182

(허균은 18세기 실학의 단서. 실학은 당세의 불합리에 저항하는 진보적 학문. ∵ 1) 고금을 동일시하는 문학론, 2) 참된 학문에 대한 이해와 실용 관련 저작-한정록 내 숭검 섭생, 치농; 3) 사회 현실에 대한 관심 –유재론 등; 실학은 유학의 연장인 단계와 유학에서 벗어난 단계가 있는데 허균은 후자에 해당, 17세기 실학의 계보에 허균을 놓아도 좋다)

 

VI. 결론

→요점: 조선조 문장론의 시원이 허균에서 시작된다. 편장자법에 대한 논의가 구체적·세부적이지는 않으나, 문장론이 구현된 양상을 보면 당세를 드러내기 위한 문학 창작에 관한 치밀한 논리가 존재한다.

→소감:

-그 결론은 옳을지 모르나 논증 과정에 대해서는 대부분 동의하기 어렵다. 애초에 성글게만 제시되어 있는 허균의 문설이나 시변에 허균의 문학 창작론이 천명되어 있다는 과도한 의미 부여를 했다. 또한 허균의 여타 작품들에 그런 창작론, 즉 논자가 상상해 낸 ‘허균의 창작론’이 관철되어 있다는 선험적 전제를 확인하기 위하여, 허균과는 무관하게 성립된, 혹은 후대에 성립된 개합법이니 주객법이니, 6단구성이니 하는 것을 허균의 산문에 소급 적용함으로서 허균이 그러한 창작 방법을 관철하는 데 고심했다는 시대착오적인 논증을 행하고 있다. 논문 전체에 걸쳐 조비, 유지기, 서사증 등 시대가 현격이 차이나는 문인들의 논의를 편의에 따라 단장취의하고 있어 논지를 수긍하며 따라가기가 상당히 어렵다.

-실학에 대한 논의는 너무나 피상적이어서 가부를 논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강명관의 논지를 추가 고찰한 대목은 의의가 있으나, 송혁기의 17-18세기 한문비평 논의에 아전인수격으로 연결시키는 면이 있고, 한문 산문 장르의 특성에 관해서는 심경호나 심경호가 번역한 진필상의 개설서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어서 학문적 수준을 신뢰하기 어렵다.

-선행 연구 검토에서도 중요한 연구를 빠뜨리거나 소략하게 다룬 경우가 있다.

 

-이 논문은 일언이폐지하면 강명관의 논문, '허균 문설의 신해석'의 길쭉한 하위 호환이라 할 수 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