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An Explanatory Note
Table A: 세설신어의 챕터 타이틀
Table B: 연호(Reign Title)
Bibliographical Introduction
Part1. Form and Contents
Chapter 1. Qingtan as a social and intellectual activity
1. How did scholars participate in qingtan?
2. The procedures and the key terms
3. Criteria of a Good qingtan
4. Qingtan as intellectual entertainment
Chapter 2. The Topics of Qingtan
1. Sanxuan and their commentaries
2. Propositions from the school of names
3. Buddhist Sutras
4. Debates over new philosophical propositions
5. Other topics of Qingtan
Part 2. Historical Development
Chapter 3. The genesis and formation of qingtan
1. The Late Han: “Making Friends through conversation”
2. Xun Can and others in the Early Taihe era
3. A pause after fourth year of Taihe era
4. Qingtan: first flowering
5. The voices of the Zhengshi era
Chapter 4. The dormancy and revival of qingtan
1. The Seven worthies of the bamboo grove (죽림칠현)
2. The Revival of “the art of subtle words”
3. Second Flowering 1: Wang Yan and Pei Wei
4. Second Flowering 2: Guo Xiang and others
5. Western Jin after Yuankang Era
Chapter 5. Qingtan: third flowering and decline
1. Wang Dao: inheriting the past and ushering in the future
2. Third flowering 1: Yin Hao and others
3. Third flowering 2: Sun Sheng and others
4. Further enrichment of qingtan: buddhist monk and ideas
5. The gradual decline of qingtan after the Taihe era
6. Qingtan as an enfeebled tradition in the Southern Dynasties
Bibliography
Appendix: “Two terms examined: Qingtan and Qing yi” (청담과 청의의 비교)
# Biblical Introduction
-청담을 pure conversation으로 번역한 것은 Mather 교수가 한 것으로 이 시기 liberation의 자각을 보여준다. 청담이란 그런 liberation이 현실화 된 한 수단이다. 따라서 청담이란 타픽은 중세 중국(200~600년) 사회적 정치적 지적 문화적 측면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이다.
*연구사
-조익(1727-1814): 청대의 주요 역사가. 이십이사차기에서 청담을 정의했다. ‘육조청담지습’, ‘淸談用塵尾(In Qingtan the sambar-tail chowry was used)’
-20세기 초 일인 학자들. (1) 이치무라 산지로(市村瓚次郞) <청담원류고>(1919). 용어로서의 청담과 사회 현상으로서의 청담의 기원에 대해, 청담과 불교의 관계에 대해, 당대 청담의 반대파에 대해 연구했다. 오늘날에는 학문적 가치가 없지만 최초의 연구로 의미가 있음.
(2) 아오키 마사루(靑木正兒), 1934 연구. 청담과 도교의 관계. 위진 시기의 convernsationalist를 두 카테고리로 나눴다. 名理波, 도가파. 각기 析玄派(mysterious learning) 방달파의 expounders.
(3) 산카오 초오하치(坂野長八). 이치무라의 제자. ‘청담의 일해석’(1939)에서 이치무라의 오류 수정. 청담에 대해 말한 모든 original source를 조사했음. 초기 청담은 사람들의 성격에 대한 유가적 평가를 지적하고 있다. 산카오 설에 따르면 청담은 공허하거나 분방한 토크가 아니고 청담과 방달적 행동 사이에 연관성도 없다.
(4)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청담이 후한 청의의 연장이라고 했음. (1946 사림 31-1). 청담과 청의는 같은 기원을 갖고 있지만 후기 발전 과정에서 분기했다. 위진 명사들을 두 그룹으로 나눴다. 청의파와 청담파. 청담은 240-249년에 황금시대, 250-264년에 은의 시대, 서진 시기(265-316)과 동진(317-420, clay age)로 시대를 나눴다. 이 네 단계를 통해 청담이 진화했고 점차 실제적 이슈에 대한 논의를 피하고 순전히 철학적 관심사에 대한 게임으로 변했다고 했다. 청담에 대한 그의 시대구분은 Mather나 에티엔느 발라즈, 아서 라이트 같은 학자들에게 영향을 줬음.
일인 학자들의 영향 하에서 중국 학자들도 청담에 대해 갱신된 관심을 갖고 3-40년대 연구 했음.
(1) Fan Shoukang, “魏晉的淸談” (문철계간, Wuhan University, 1936)
(2) Liu Dajie, “魏晉思想論” (魏晉時代的淸談, 7장, 1939)
(3) He Changgun, “淸談起源” (문사철계간, 1943)
(4) HeChanggun, “魏晉淸談思想初論” (투서계간, 1945)
(5) TangChangru, “淸談與淸議” (신보문사, 1948)
(6) Du Guoxiang, “魏晉淸談及其影響” (신중화, 1948)
하창군의 4번 초론을 제외하고 이 논문들은 그저 일인 학자들의 발견을 재서술한 것이다. 범수강의 에세이는 아오키의 연구를 재생산한 것이고, 유대걸은 아오키와 산카노의 포인트를 아주 조금 수정해서 종합한 것이다. 당장유는 산카오와 미야자키의 설을 발전시키려 했으나 의심스런 결론에 이른 것이 전부이고 초기 청담으로 그가 든 예시는 이미 산카노가 들었던 것. 두국상은 산카노와 미야자키의 연구를 반복했다.
비록 파생적인 연구지만, 학자들의 관심을 끌어 50~60년대 중국에서 위진 시기에 대해 많은 연구가 있었다. 그중에는 진인각(1890-1969)이 있는데, 능력과 본성 간의 기본적 관계에 대한 논의를 폈다. 지민도(Zhi Mingdu, 4세기 초)와 도연명의 사상을 다뤘다. Tang Yongtong(1894~1963)은 유소(190-245)의 인물지를 연구했다. ‘언의지변(the debate on words and meanings), 왕필(226-249)의 이론들에 대해 논했다. 모종산은 위진 시기 명가에 대해 연구했고 여영시는 위진 사상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새 트렌드에 관해 썼다.
모윤손 “魏晉以來之崇尙談辯及其影響” (홍콩, 1963)에서는 도발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청담의 기원과 후대의 영향에 대해서. 한편 하계민 “魏晉思想與談風”에서는 위진 사상과 대화의 관계를 설명했다. 청담에 대한 형식적 층면을 논한 부분은 훌륭.
70년대에는 타이완에서 청담에 대한 두 편의 연구가 있었다. 임현정의 석사논문(1974) “위진청담급기현리구요), 임려진의 박사논문 “위진청담주제연구” (1978)가 그것이다. 전자는 포커스가 너무 좁고 후자는 너무 넓은 것이 문제다.
70년대에는 Richard B. Mather의 연구가 있다. 세설신어의 2개 챕터에 대한 번역을 1964년, 1971년 학회지에 실었다. 또 에세이를 썼는데 “세설신어 속의 청담(‘pure conversation’ in the Shishuo xinyu)”로, 여기서 그는 미야자키의 시대구분 이론을 예와 함께 논의했다.
80년대에는 중요 연구가 나오지 않았다. 왕보현의 ‘정시현학’(1978)은 주목할 만하다. 대륙의 학자임. 현학에 대해 디테일한 연구를 했다. 정시 개제(정시 연간의 제도적 개혁)이 사들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책은 청담에 대한 모노그래프는 아니지만 위진 청담을 이해하는 데 가치가 있다. 현학이 대화의 주요 주제였기 때문에. 이상이 위진 청담에 대한 현대 스칼라쉽에 대한 간단 요약이다. (9-14쪽)
[2020년 9월 14일]
나의 연구는 다음과 같은 훌륭한 질문들에 대해 좀 더 완전하게 답하고자 한다. Part 1에서는 (1) 청담은 어떻게 수행되었는가? (2) 청담의 타픽들은 무엇이었나? 역사적으로 철학적으로 청담이란 용어의 의미는 무엇이었으며 그것의 cognate은 무엇이었나? Part 2에서는 청담에 대한 역사적 설명을 제공하고, 다음 세 질문에 답한다. (1) 청담은 어떤 발전 과정을 거쳤나? (2) 이 발전은 어떻게 형태를 갖춰 왔으며 사회 정치적 백그라운드와 어떤 관련을 가졌나? (3) 누가 청담에 참여했나.
유의경의 세설신어(36장 구성)세설은 역사서는 아니지만 역사서로서의 의도를 갖고 있으며, 의도적 위조의 가능성은 매우 낮다. 유준(劉峻=유효표, 462-521)의 노트에 의하여 세설의 reliability는 매우 제고되어 있다. 진서(晉書)를 썼던 당나라 학자들은 세설에서 상당한 material을 취해 왔다. (14-16쪽)
Part 1. Form and Content
Chapter 1. Qingtan as a social and intellectual activity
청담은 학자-관료들의 철학적 논의를 가리키기도 했고, 청담 참여자의 유려한 언변과 레토릭 스킬을 보여주는 논쟁의 형태를 취했다. 이런 식의 사회적 지적 활동은 서진 동진 시기부터 남북조 시대까지 있었다. 이 시기에는 이런 활동들이 청담이라 불리지 않았고 단일한 명칭도 없었다. 청언, 현언, 微言, 言理, 談玄, 談이라고 불렸다.
한편 청담이란 말은 이미 후한 시기에 나오는데 세 가지 의미가 있었음(cultivated conversation, praise, and judgement of character). 청담은 청언보다 역사적으로 더 넓고 복잡한 용어였음. 따라서 위진 학자들은 자신들이 열렬히 참여한 철학적 논변을 가리키는 데 있어서 청담이란 용어를 사용 안 했음. 세설신어에도 청담이란 용어가 나오지 않음.
‘청담’이란 말을 위진 시기에 ‘청언’이라 불렸던 활동을 가리키는 데 처음 쓴 것은 청대 고염무와 조익. (19쪽) 엄격히 말해서 ‘청담’이란 말로 위진 시기의 그 활동을 가리키는 것은 정확하지 않고, ‘청언’이란 말을 쓰는 것이 낫지만 더 이상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위진 시기 학자들의 철학 논변을 가리키는 말로 ‘청담’이란 말을 쓰겠음. 더 상세한 논의는 부록에 첨부한 ‘청담과 청의의 고변’(1989, 타이페이. 중국어 논문을 번역한 것)을 보기 바람.
*이 장에서 답할 질문: 학자-관료들은 청담을 어떻게 수행했는가? 내용 외에 청담과 보통 대화 간에 차이가 있나?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사람들은 청담에 어떻게 참여했나? 절차를 마련했나? 청담에 대응하는 용어나 특별한 요구사항이 있었던가? 청담의 이상적인 모습은 어땠나? (what would an ideal qingtan be like?) 답하기 쉬운 질문은 아니지만, 세설신어에 이러한 청담 활동이 많이 담겨 있기 때문에 이 시기의 청담에 대한 대략적인 상을 얻을 수 있다.
Chapter 1-1.
1. 학자들은 청담에 어떻게 참여했나?
(A) 1인의 강의. (B) 2인이 논쟁에 참여 (C) 다수의 사람이 논의에 참여.
(A) 1인의 강의
한나라 때의 講經이 원형. 오경박사가 강의를 했음. 강의를 마치면 청중이 질문하거나 이견제시 했음. 이것이 問難, 詰難(question and challenge)이었음. 예컨대 범엽의 후한서에는 명제(明帝 r. 58-75)의 강의를 묘사한 단락이 나옴. (즉위식이 끝난 후 강의 시작. -강경의 기본적 형태를 보여준다.)
불경 강의할 때도 마찬가지 방식이 보인다. 특히 동진 중반기에 강경은 매우 적절한 형태로 보였다. (지둔 디비션이 三乘을 강의한 일화. 세설신어 4장 문학편의 37) 한 사람 만이 타픽에 대해 잘 알고 있을 때는 이 방식이 최선.
후한서에 나오는 Wei Ying(魏應)의 전기. 위진 청담에서도 마찬가지. (세설신어 4장 문학-40: 지둔, 허순, 기타 학자들이 회계왕의 빌라에 모였다. 지둔의 강의에 허순이 이의 제기. 두 사람 모두의 언변에 다들 감탄. -허순에게는 질문 및 이의 제기라는 특별 임무가 맡겨져 있는 것. dujiang이라 불림. 이것은 선생의 수제자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음. 일종의 TA. 후한서에 나오는 예들: 후한서26의 Hou Ba 候覇, Huan Rong 桓榮, Ding Hong 丁鴻) 만약 이상이 맞다면 세설신어에 나오는 허순의 역할은 한나라 때 전통을 이은 것임. 따라서 불교 관습이거나 위진 시기의 혁신이 아님. (25쪽) dujiang 전통은 남조 시기에도 계속됨. 이연수의 南史에는 양나라 대동 연간(535-546)에 사람들이 경전을 읽지 않아서, 주기와 He chen만이 양무제 앞에서 경전을 강의했는데, Shen zhu를 dujiang으로 자주 임명했다.
(B) 2인의 논쟁
위진 시기의 가장 typical한 형태. 후한 시기에 거의 실행되지 않았음. 위진 시기에는 이것이 가장 흔하고 효과적인 형태가 되었음. 이 형태는 청중 여부에 따라 구분됨. (청중 무: 세설신어 4장 문학의 33, 36, 41,42,57, 62, 65; 청중 유: 세설신어 4장 19. 배하와 곽상의 논쟁. 배하는 왕연의 사위. 청중 있는 경우가 가장 흔함. 20, 22, 30, 38, 51, 56.) 이런 관습은 common practice를 통해 성립된 관습이었음.
문학 챕터의 19,22,38, 56을 보면, 이것은 마치 청중이 장기 구경(Chinese chess game)을 하는 것 같음. 방해하지 않고 보는 게 중요. 장의(張議, 515-590)와 주홍정(496-574)는 둘다 청담의 명수였음. 이들이 주역에 대해 토론한 예. 주홍정의 4번째 형제가 매트에 앉았고, 장의와 주홍정이 토론하다가 주홍정이 지려 할 때, 주홍정의 형제가 주홍정을 도우려 하자 장의가 방해하지 말라 경고한 일화.
(C) 다수의 사람
주객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때만 제3자가 끼어들어 힌트를 주거나 설명할 수 있었음. 제3자 역시 청담에 능한 사람이어야 했음. <문학> 편의 9절을 보라. (Fu Gu (209-255)가 빔과 초월에 대해 말하자 순찬(209-237)이 신비함과 먼 것에 대해 말했음. 상호 오해와 갈등이 있게 되자 배휘가 나서서 중재함) <문학> 편 53절도 마찬가지임. (말석에 있던 Zhang ping이 청담을 중재해서 상석으로 옮긴 이야기) <문학> 편 55절은 더 명확한 예. 지둔, 허순, 사안(320-385)의 이야기. 장자에 나오는 어부에 대해 얘기했음.
2인의 논변이 가장 흔한 타입이므로 본 논문의 다음 섹션에서는 2인 논변 위주로 논하겠음.
[2020년 9월 15일 화]
Chapter 1. 2. 절차와 주요 용어 (The procedures and key terms)
일단 두 사람이 시작하고 주객을 맡음. 청중은 ‘담객’. 한 사람(주)이 주장을 펴고(叙理), 상대(객)가 질문하거나 반론(작난), 다시 ‘주’가 ‘변답’. Round(bout). 마지막에 ‘굴’, ‘승리’.
(1) 담객. 능언인, 능언제현, 능언지류. 담사, 능언자, 담자. 담가. 남제서에 나오는 왕승건(426-485)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담가’라는 말이 나옴. (말도 잘하고 글도 잘쓰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는 내용. 둘은 별개의 기예이기 때문.) 원홍의 명사 삼분. (시대별로, 정시 연간, 죽림칠현, 서진 시대 명사) →청담에 능한 사람이 명사라 불리고, 대부분의 명사는 청담에 능했을 것.(37쪽)
(2) 설리(說理): 설(說, to propose)+ 리(理, a topic). To state an argument. 동의어로는 唱理, 서치(敍致). 설리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음. Argument와 words(which the argument is presented, 辭) 세설신어에는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언급됨. <문학> 28절.
(3) 작난(作難): =설난. 송난. 반대하는 것.
(4) 변답(辯答): 覆疎.
(5) 번(番): bout. =交 <문학>19절, 51절.
(6) 굴(屈): defeat. 최굴(摧屈). 절(折).
(7) 진(盡, 합의에는 이르지 못한 것 impasse), 통(通, having the same opinion): <문학> 62.
(8) 유사(遊辭): lame argument or idle words. 지고 나서도 굳이 말하는 것.
Chapter 1.3. 좋은 청담의 기준(The criteria of a good qingtan)
(1) 독창적이고 비관습적일 것. (<문학>36. 왕희지와 지둔, 손작) 신해석 혹은 스타일 상의 특징을 통해 창조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위나라-서진 시대에는 새 이론을 제시했다. 현학과 청담의 골든 에이지. 하지만 동진 시대에는 새 이론이 더는 나오지 않았고 해석 상의 창조나 유창성으로 승부했음. 그리고 후에는 옛 이론조차 더 이상 이해되지 않았음.
(2) 논증이 탄탄할 것. (<문학> 38)
(3) 짧으면서도 아이디어가 잘 드러나게 할 것. (서진의 명사 악광. <8. 상예>25)
(4) 유창성 & 풍부한 스타일. (<문학>36. 왕희지)
(5) 우아할 것. (Be elegant in manner.): 말의 아름다움 뿐 아니라 매너의 아름다움도 추구. 명사라 불리는 사람들은 청담에 능할 뿐 아니라 매너도 우아함. 하안, 이풍, 혜강, 배해, 사안 등등. (45쪽에 예가 열거됨.) “the sambar-tail chowery” 옥이나 상아로 만든 소품.
(6) 목소리의 아름다움을 계발할 것. (Cultivate the beauty of voice.): <9.품조> 48 유담. 발음을 아름답게 하는 것도 청담에서 중요.
Chapter 1.4. 지적 유희로서의 청담(Qingtan as intellectual entertainment)
청담에는 두 차원이 있음. 진리 추구와 아름다움의 추구. 달리 말해 청담은 scholarship이자 art. 이 두 측면의 조합이 청담을 문화적 표현에 있어서 자극이 되는 형태로 만들었고, 학자 관료들의 지적 게임이 되도록 하였다. (<문학>16의 일화로부터 귀족 자제가 청담을 self-improvement의 기회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오락으로 활용한 점은 <문학> 55, 22, 그리고 <2.언어> 22.
게임과 같은 면이 있어서 상대를 능가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쏟았다.(48쪽) 초기 청담은 미의 추구보다 진리 추구에 더 기울었음. (49쪽) 동진 시기부터는 예술적 아름다움이 더 강조됐음. 당연히 청담은 상당한 집중과 에너지를 요했음. (문학 20에서 wang jie의 죽음은 청담에 지쳐서 그랬다는 식) 현대의 스포츠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고, 군사 용어를 써서 청담을 묘사하기도 했음. (<문학>26, <2.언어> 79) 게임의 성격이 후대로 갈수록 짙어지지만 중요한 것은 청담이 상당한 스칼라쉽을 요하는 지적 활동이라는 것임. (51쪽)
[9월 16일 수]
Chapter 2. 청담의 타픽들
청담에서는 무엇이 논의되었는가? 청담의 참여자들이 탐색했던 것을 가리키는 증거들은 무엇이 있는가? 이 두 가지가 본 장에서 자세히 살펴볼 질문들이다. <문학> 편에 60가지 아이템들이 보존되어 잇다. <언행>, <상예> 등에도 들어 있음. 이 다양한 주제들은 위진 士들으 여러 관심사를 반영한다.
Chapter 2.1. 현언(玄言)과 그 코멘터리
삼현(三玄)이 청담의 primary source. 삼언이라는 용어는 안지추의 저서 안씨가훈 중 <면학> 챕터에 나오는 것이 가장 이르다. 여기서는 장자, 노자, 주역 셋을 합쳐서 ‘삼현’이라 했다고 함. ‘제현(諸玄)’이란 말도 그 이전 시기에 쓰였음. (by Wang Sengqian) 여기서도 ‘제현’은 세 책을 가리킴. 삼현이란 말이 주조된 것은 유송(420~479)보다 나중이지 않을 것.
세 책이 청담의 주요 타픽이 된 것은 정시 연간(241~249). 이 점은 안지추 글 뿐 아니라 다른 자료에도 나옴. ‘관로’라는 인물에게 하안은 어떤 사람이냐 배휘가 묻자 대야의 물과 같아서 상대를 비추지만 산과 같은 거대한 것을 비추면 그 자신도 혼란스러워진다는 식으로 답함. 그래서 노장에 대해 말할 때 하안의 말은 영리하지만 내용이 없다고 함. (55쪽) 위의 이야기는 하안과 왕필의 시대부터 남조시대까지 노장이 중요하게 다뤄졌음을 말함. 삼현은 모르면 안 되는 것이었음. 위진 시기 노장과 그 주석은 필수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이었음. (56쪽)
통계적인 증거도 있음. <문학>의 전반부에 나오는 학자 관료들의 65개 이야기 중에, 61개가 청담과 관련. 이 61개 엔트리 중에서 43개가 직접적으로 청담 내용을 서술하였음. 그 중에서 15개(1/3 이상)가 분명히 삼현을 말하고 있음: 주역(29, 56 61); 노자(7, 10, 63); 장자(15, 17, 32, 36, 55, 62); 노자와 장자 전부(8, 13, 18)
[9월 20일 일]
Chapter 2.2. The propositions from the school of names (57)
2장 2절. 명가(名家)로부터 온 조항들
위진 시대에 명가와 법가가 부흥하기 시작했음. 한나라 말에서 위나라 초에 대두된 두 가지 어려움: (1) 어떻게 정치적 포지션에 합당한 인물을 뽑느냐였음. 능력과 명성의 매칭이 문제였음. (2) 환관, 외척(imperial relatives), 학자 관료 간들에 의해 일어난 사회 질서의 해체. 이들의 갈등은 농민 봉기에 의해 악화되었음. 지배층에게 사회 질서 복구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고 학자 관료들은 이에 명가와 법가를 중시하게 됐음. (name/logic and law)
예를 들어 조조는 귀족의 파워를 제한하고 겉으로 많이 드러나는 행동을 금했음. 그 후에는 도교가 중요해졌지만, 명가와 법가에 대한 관심은 줄지 않았음. 명가의 논리적 추론이 각광받았음. 예컨대 노승(魯勝, fl.291)은 변경(辯經)에 대한 코멘터리를 썼음. 그 저술은 없어졌지만 서문은 <진서>에 남아 있음. (예문. 59쪽. 공자의 ‘정명’을 가지고 이를 정당화 함. 맹자가 묵자를 공격했지만 결국 같은 얘기했고 순자와 장자가 ‘명가’를 비판했어도 그 가르침을 버릴 수 없었다는 이야기.) 세설에서도 이름과 원칙(names and principles)에 대한 기록 몇 가지를 볼 수 있다.
(1) 문학(Letters and scholarship) 16: 악광에게 손가락은 의미에 가 닿을 수 없다고 했더니(장자 천하편에 나옴) 빗자루로 ‘이것이 닿았는가’ ‘닿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걸 버릴 수 있겠는가, 했다는 이야기.
(2) 문학 24: 사안이 젊었을 때 Ruan Yu와 공손룡의 백마론에 관해 이야기했다. Ruan이 열심히 설명하자 사안이 질문을 많이 했음. Ruan이 말하길, 설명 잘하는 사람 찾기도 어렵지만, 설명을 잘 알아듣는 사람 찾기도 어렵구나. 했다는 이야기.
백마론 이야기는 공손룡 이전부터 유명했음. 묵자, 혜시, 장주, 맹자도 백마에 대해 말했지만 가장 완전한 형태는 공손룡 버전임. <공손룡자>라는 컬렉션 속에 현전함. 이 예를 통해, 점차 영향력이 줄어가고 명가의 가르침을 이해한 사람이 적어져 가긴 했지만, 동진 사람들이 명가의 이야기에 대해 여전히 관심 가졌음을 알 수 있음.
(3) 문학 58: 사마도자가 사현에게 묻기를 혜시의 ‘오고서’에 ‘현’으로 들어가는 한 마디 말이 없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자 사현이 답하길, 그 포인트가 후세에 전달되지 못했기 때문이라 했다는 이야기.
혜시는 명가의 중요한 dialectician. 혜시의 이론은 공손룡과는 좀 다름. 자연 상태에서 모든 것이 변한다는 점에 민감했던 그는 만사의 상대성, 보편적 사랑, ‘정명’을 통한 사회의 향상을 강조했음. 장자 33 (天下 이 세상)장에 따르면, “혜시는 오거서를 남겼다. 그러나 그의 교리는 잡되고 편벽되며 그의 말은 매우 넓었다. 그가 사물을 대하는 방식은 다음의 말에서 볼 수 있다. (64~65쪽) (1) 至大無外, 謂之大一. 至小無內, 謂之小一. …(10) 氾愛萬物, 天地一體也. 이 열 가지의 아포리즘은 모두 혜시의 사상으로 <장자>에만 나옴. 시공간의 상대성에 관한 혜시의 관찰은 자연 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바로 사마도자가 혜시의 작품이 ‘신비로운 것의 실재에 들어감’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이유일 것.
(4) 문학 62: Yang Fu and Yin Zhongkan. 왕씨 집안의 사위들. 제물론에 대해 토론. 한 쪽이 말했음. 당신은 네 번의 대화만에 내 말에 동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왜 굳이 대화를 해야 하느냐, 하고 웃었지만 결국 네 번 만에 그의 말에 동의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Yin은 장자의 입장, Yang은 묵자의 입장을 취했거나 혹은 거꾸로일 것.-67쪽. 무슨 말인가?)
제물론은 유가, 묵자, 명가를 비판하기 위해 쓰여졌음. 그래서 <장자>의 다른 챕터와 내용이 다름. 제물론에는 명가에서 온 비의적인 언명이 많음. ‘指는 닿지 않는다’ ‘네가 이해한 말[馬]은 말이 아니다’ ‘나는 오늘 월나라에 갔는데, 과거에 월나라에 도착했다’ 등이 그것. Yin과 Yang 간 논쟁의 자세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음.
[9월 21일 월]
Chapter 2.3. 불경
진나라가 남쪽으로 옮긴 때부터(317년), 불경은 고관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 있게 되었음. “문학”, “언어” 편에서 동진 시대에 승려들이 매우 활발하게 활동했음을 쉽게 볼 수 있음. 승려들이 청담에 자주 참석했고 그 자신이 청담을 잘 했음. 그들은 불경에만 정통할 뿐 아니라 현언에도 밝았음. 이렇게 하여 청담에 새로운 내용과 칼라를 덧입혔음.
“문학” 편에는 45개의 동진 청담만 있지만, 32개의 아이템이 다양한 청담 모임을 보여줌. 32개 아이템 중 12개에서는 불경을 다룸(23,30,35,37,40,43,44,45,50,54,59,64). 이는 엘리트 문화에서 불교가 중요했음을 보여줌. 왜 중요해졌냐면, 학자들 세계와 승려들의 세계가 상호 필요에 의해 강화된 것. (67쪽). 불교로서는 자기 교의를 학자 사회에 퍼뜨리려면, 청담에 의존해야 했음. 청담은 불교의 아이디어를 수용함으로써 청담에 활기를 불어넣을 필요가 있었음.
불교가 처음 중국에 들어왔을 때, 엘리트로부터 인정 받고자 했고, 중국 사상에 레퍼런스를 자주 가리켰음. 이것을 격의(格意)라 함. 이것을 하기 위해 승려들은 중국 사상에 능통해야 했음. 그런 승려들 중 세설에서는 지둔이 제일 유명. 지둔에 대해서는 5장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1) 문학 30: 북에서 온 승려. 지둔, 축도잠, 평신도 손작. 북에서 온 승려가 늘 지둔에게 졌다.
(2) 문학 45: 우법개(310-370)는 지둔과 경쟁한 것으로 명성이 있었음. 후에 사람들은 지둔을 더 선호했음. 우법개가 제자를 시켜 지둔에게 질문하게 했고 결국 지둔이 졌음. 지둔이 말하길 “남의 말을 전달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 했다.
동한 말에 유교가 쇠퇴할 때 불경은 인기가 높아지고 있었다. 위진 현언은 불경과 공유하는 내용이 많았다. (은호가 불경을 읽고, 진리는 이 속에 있다고 했다는 이야기. 문학23) 여기서 진리란 현학에서 말하는 궁극의 진리다. 은호의 의견은 당대 학자 서클의 이해를 대표함. 어떤 사람들은 노자가 서쪽으로 가서 인도에 도착해 부처를 만났다고도 함. 그런 식으로 불경은 노자의 다른 버전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했음. (문학44: 진나라 간문제[사마욱]가 불경은 마음을 정화시킨다고 한 적 있음. 궁극에 도달하지 못해도 유익이 있다는 식의 말을 한 이야기. 이 말은 불경에도 비슷한 것이 나옴. 모든 감각 있는 것은 불성을 갖고 있다. 간문제가 볼 때 부처는 성인의 한 사람이었음. 노자나 장자와 마찬가지로 마음을 정화하는 데 도움을 주는 존재라는 것.) 이 시기에 불경에 관심 가진 사람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은호가 특히 열정적. (문학 50: 대품은 너무 말이 많아서 소품으로 바꾸었다, 문학59: 은호가 동양에 가 있을 때 불경을 많이 읽고 자세히 이해했다. 모르는 부분은 승려를 만날 때마다 물어 이해. 문학43: 은호가 소품을 읽을 적에 200개의 메모를 했다. 지둔과 논쟁하고 싶어 했으나 끝내 기회가 없었다.) 특히 43번 케이스는 “obscure problems of the age”라는 대목에서 은호 외에도 불경을 연구하는 사람이 많았음을 보여준다.
동진 중기에 현학은 쇠퇴했지만 불경은 더 중요해졌고 현학을 대신해 청담의 중요 주제가 되었다. 예를 들어 문학 35. 즉색론(treatise on matter-as-such) 무심의(theory of non-existence of mind) 후기 청담에서 새롭게 등장한 중요 주제. 이에 대해서는 Tang Yongtong의 위진현학류별약론과 진인각의 支愍度學說考를 보시오.
[9월 22일 화] [10월 1일 목]
Chapter 2.4. 새로운 철학적 명제들에 대한 논쟁
(1) 유무 논쟁
(2) 자연과 도덕적 가르침(名敎 moral teaching)에 대한 논쟁 (p.83)
(3) 단어와 의미에 대한 논쟁 (p.86)
(4) 성인이 감정을 갖고 있는가에 대한 논쟁 (p.91)
(5) 임금과 아비 중 어느 쪽이 우선이냐에 대한 논쟁 (p.96)
(6) 능력과 인간 본성에 대한 논쟁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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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나 도교 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들이 제시되었음. 그 중 유명한 것이 유무, 자연, 명교, 言, 意, 才, 性 등임. 성인이 감정이 있는가(성인유정무정지면) 절대적 헌신의 대상은 군주인가 아버지인가(군부선후지변) 등이 중요했음. 많은 저술에서 의견 충돌들이 있었다. 이런 철학적 명제와 그에 대한 신 해석으로서 세설신어(및 유효표의 주석)에 나오는 내용이 이 장에서 논의할 바임.
(1) 유무 논쟁: 왕필이 말하길, 성인은 ‘무’를 체현한 자이다. (문학8) - 청담에서 중요한 세 주제를 다 다룸. (a) 유교와 불교 (b) 공자 대 노자 (c) 존재와 비존재. 위진 시기 현학은 도교의 부활이라고 특징지어지지만 한나라의 유교 경전에 대한 존경심을 이어 받은 것이다. (77쪽) 현학은 유교를 도교로 대체하려는 것이거나, 유교보다 도교를 높이려는 것이 아님. 현학의 진짜 목적은 도교적 원리를 유교 안으로 소개해 들이는 것이었음. 그럼으로써 높은 차원의 이해를 얻고자 했음. 메인스트림의 현학 전문가들은 유교와 도교 텍스트에 모두 능했음. 이들은 유교와 도교의 차이를 그다지 강조하지 않았고 양자를 상호 보완적인 것으로 봤음. 그들은 공자를 성인으로, 노장을 현인으로 봤음. 그렇지만 그렇게 함으로서 노장의 원칙에 공자를 비춤으로써 공자의 이미지를 변형시켰음.
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유교와 도교 간의 근본적인 차이를 해소할 것이냐는 문제였음. 현학에 비추어 공자는 어떻게 다시 만들어질 것인가. 이들의 첫 번째 전략은 ‘무가 핵심, 유는 비핵심’이라는 도가의 전제를 가다듬는 것이었음, 그리고 이 원칙을 현학의 가이드라인이 되게 하는 것이었음. ‘무’는 구별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 ‘유’는 존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모든 개별 사물과 사건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되었음. 특히 ‘유’는 공자가 윤리적 코드로 지칭했던 사회 질서를 가리키는 것이었음. 그러한 ‘유’는 ‘무’로부터 발생하는 것이었음. 현학 사상가들은 이것이 유교나 도교 모두에서 참이라고 믿었음. (77~78) 왕필의 작업이 유교와 도교의 성공적인 블렌딩에 기여한 바 있음. 그리하여 왕필은, 성인이 ‘유’에 대해서만 말한 이유는 ‘무’에 대해서는 이미 체현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음. 이렇게 말함으로써 위진 현학의 기초를 놓았음.
‘貴無’ ‘本無’ 같은 아이디어들, 모든 것은 ‘무’를 기초로 삼는다. 이 아이디어가 학자 관료들에게 인기 있게 되어, 실질적 사안을 다루는 데에도 운위되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의무에 돌보지 않고 무심한 행동을 보였음. 이것을 걱정한 사람이 Pei Wei. ‘숭유론’을 지어서 ‘무’를 숭상하는 사람들을 비판했음. 이것이 <문학12>에 나옴. Pei의 숭유론을 당시 사람들이 공격했으나 꺾지 못했는데, Wang Yan이 나타나서 조금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결국 Pei의 설은 계속 생기가 있었음. ‘숭유론’에 대한 이야기는 <진서> 속 Pei의 전기에 포함되어 있음. Main text는 200여자로 되어 있음. (서문은 더 길다) “궁극의 무는 어떤 것도 생성시킬 수 없다. 그러니 ‘유’는 그 자신을 생성시켜야 함. 형체를 가져야 하고, … 그러므로 사물을 번성하게 하려면 일단 형체가 있어야 하고, 무위를 통해 사물을 존속시킬 수는 없다. 팔짱 끼고 있으면서 물고기나 새를 잡을 수는 없다. ” 여기서 주장은 두 가지. (a) 무는 유를 생성시킬 수 없으므로 일단 유는 출현해야 한다. (b) 무는 유를 핸들할 수 없으므로, 유를 돕는 것은 유 자체다.
여기서 무를 숭상한 학자들은 왕필과 하안. (81) 왕필은 ‘무가 유를 생성시킨다’고 했음(82). 이것은 무슨 뜻일까. 만약 무가 유를 생성시킨다면 역은 왜 안 되는가. .. Pei의 설은 왕필의 설과 정면 대치. (82쪽) 후대 곽상의 주석에서 반복 강조된 것은 무가 유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이었음. 그리고 존재가 무로부터 나온다는설것은 더 이상 논의되지 않았음. 곽상의 설은 ‘self-transformation’(獨化)이라 할 만함. 비록 pei의 설과는 다르지만, Pei의 설에 영향을 받았음. 여기서 self-transformation이란 것이 유무의 이슈에 대해 새로운 어프로치가 가능해지게 했음.
(2) 자연과 도덕적 가르침(名敎 moral teaching)에 대한 논쟁 (p.83)
Raun Zhan, <진서>의 전기. 같은 이야기가 세설신어의 <문학18>에도 나옴(이 대화를 한 주체가 완수와 왕연으로 바뀌어 있음). Rong이 공자와 노자의 가르침은 같은 것이냐 다른 것이냐 물음. Ruan이 답하길, 아마 같지 않겠는가. (‘장무동’ 일화가 왜 자연과 moral teaching에 관한 얘기지?)
위나라에서 서진 시기에 이르기까지 자연 및 도덕적 가르침은 늘 유무 논쟁과 병렬됨을 볼 수 있다. 이 논쟁은 세 단계를 거친다는 이야기. 왕필과 하안의 1단계(무에서 유가 나온다, 명교는 자연에서 나왔다), 완적과 혜강의 2단계(명교를 잊고 자연을 지향해야 한다, 양자는 서로 반대되는 것). 이것은 사마 가문의 지배에 대한 극단적 불만족의 표현이기도 함. (85쪽) 이 설은 위진 현학의 일반적 스피릿과 배치되는 것. (몰랐어) 3단계는 상수와 곽상 (명교가 곧 자연이다) 이렇게 보면 하안과 왕필에서 위진 현학이 시작되어 상수 곽상에서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명교를 왜 moral teaching으로 번역해서 헷갈리게 하는 거지?)
세설과 진서에 나오는 ‘장무동’ 이야기를 보면 이들의 생각이 자연과 도덕에 관한 곽상 버전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서진 말기에는 명교가 곧 자연이라는 생각은 상당히 퍼져 있음.
(3) 단어와 의미에 대한 논쟁 (p.86)
근본적으로 이 사안은 말이 의미를 완전히 표현할 수 있는가의 문제였음.
공자는 말이 의미를 표현할 수 있다는 입장, 장자는 정 반대(천도 편).
<주역. 계사>: ‘언불진의 서불진의’(言不盡意 書不盡意. 말과 글로 뜻을 다 나타낼 수 없다) 성인은 상象을 세워서 그 뜻을 다하고, 괘卦를 세워서 참과 거짓을 다하며, 문사를 이어서 그 말을 다한다(聖人立象 以盡意 設卦 以盡情僞 繫辭焉 設卦以盡其言).
서진 시기까지 도전받지 않은 관점이다. 구양건(271~300)이 ‘언진의론’을 쓰기 전까지. 전문 해석 첨부. (pp.88~89)
뇌동이 위제에게 묻길, 사람들은 말이 의미를 완전히 전달할 수 없다고 보는데 당신만 아니라고 한다. 이유가 뭐냐? 위제가 말하길, …원리는 마음에 의해 이해되지만, 말(word)이 없다면 드러날 수 없다. 사물은 그 자체로 결정되어 있지만 명칭이 아니면 구별될 수 없다. … 그러므로 언어는 의미를 완전히 전달할 수 있다. (명론 비슷한 느낌이네)
-여기서는 세 가지 주요 포인트가 있음. (1) matter and principle이 word보다 선행. (2) 명칭은 사물을 구분 짓기 위한 것. (3) 명칭과 말은 matter and principle과 더불어 변한다. 그리하여 분리 불가능한 unity를 형성한다. 여기서 문제는 세 가지 포인트가 맞다 해도 결론(언어는 의미를 완전히 전달할 수 있다)이 논리적으로 도출될 수 있느냐는 것. 구양달은 자기 주장을 입증하지 못했다. 그가 사용한 메타포 소리와 메아리에서 메이라는 소리를 완전히 전달하지 못하니까.
‘언불진의’는 상식이다. (논문을 뭐 이렇게 쓰지?) 문제는 공자의 전제 ‘언불진의’를 받아들인다면 괘나 상도 의미를 완전히 표현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는 것. 그리하여 이 시기에 이 문제가 계속해서 논의되었음.
[10월 3일]
(4) 성인이 감정을 갖고 있는가에 대한 논쟁 (p.91)
<문학 57> Sengyi and Wang Xiu(동진 시기 사람). S는 성인은 감정이 없다 했음. 이 문제는 청담에서 오래된 타픽. 성인은 감정 없다는 설은 하안이 창립. 왕필은 성인에게 감정이 있다고 했음. (하안은 성인에게 희로애락이 없다 했음) 위의 일화는 동진 때까지 이 논쟁에 결론 나지 않았음을 보여줌.
이 두 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인간의 감정’ ‘인간의 본성’, ‘성인’에 관한 이론들을 알아야 함. 본성은 하늘에서 부여 받은 것인데 반해 감정은 외적 자극에 대한 우리의 반응. 성인은 완벽한 존재이고, 성인과 하늘의 법칙은 하나로 통합되어 있음.
한대 학자들은 인간 본성과 감정의 관계에 대한 두 가지 이론을 제출. 동중서, 유향 등.
동진 시대에는 ‘성인은 감정을 잊는다’는 설도 나왔음. (언어 51) 그것은 성인은 감정이 없다는 주장의 연장(extension)이었음. (p.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