晉人樂放曠喜淸言其弊也及於國家五胡亂華衣冠奔播陶弘景詩所謂夷甫任散誕平叔坐論空豈悟昭陽殿遂作單于宮者是也然其談論風標書之文字則無不澹雅可喜此劉義慶世說所以爲楮人墨客所劇嗜者也因此想當時親見其人聽其言語者安得不傾倒也明人刪其蕪補其奇作爲一書誠藝林珍賞也朱天使之蕃携來贈柳西坰遂爲我東詞人所欣覩焉

 

()나라 사람들은 호방하고 광달(曠達)함을 즐기고 청담(淸談)을 좋아하여 그 폐단이 국가(國家)에까지 미쳤다. 오호(五胡)가 중화(中華)를 어지럽혀 벼슬아치들이 도망가 흩어지니, 도홍경(陶弘景)의 시에 이른바 이보(夷甫)는 허황하기만 하고 평숙(平叔)은 앉아서 공리를 논하니, 소양전(昭陽殿)이 마침내 선우(單于)의 궁궐이 될 줄을 어찌 알았으랴.夷甫任散誕, 平叔坐論空, 豈悟昭陽殿, 遂作單于宮?라는 것이 이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담론과 풍격(風格)을 문자로 쓰면 담아(澹雅)하여 기뻐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는 유의경(劉義慶)세설신어(世說新語)를 시인과 묵객(墨客)들이 매우 좋아하게 된 이유이다. 이것을 가지고 당시를 생각해 보면, 저들을 직접 보고 저들의 말을 듣는 자들이 어찌 경도(傾倒)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당시에 그 인물들을 친히 만나보고 그의 말을 직접 듣는 것 같으니 어찌 매료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명나라 사람이 그 번잡한 것을 산삭하고 기이한 것을 보충하여 한 책을 만들었으니, 진실로 예림(藝林)의 진귀한 볼거리이다. 명나라 사신인 주지번(朱之蕃)이 가지고 와서 유서경(柳西坰)에게 주어 마침내 우리나라 문장가들이 기뻐하면서 보게 되었다.

 

*청담: 세속의 명리(名利)를 떠난, 맑고 깨끗한 담화(談話)라는 의미로 청언(淸言)ㆍ현언(玄言)이라고도 하며, ()ㆍ진() 시대에 크게 성행하였다. 노장사상을 기초로 세속적 가치를 초월한 형이상학적인 사유와 정신적 자유를 중시했던 시대의 산물로 무()와 유(), 명교(名教)와 자연 등 형이상학적인 주제들에 관한 고차원의 철학적인 논의가 이루어졌다.

*오호: 남북조 시대 북쪽에서 왕조를 세운 다섯 오랑캐인 흉노(匈奴)ㆍ갈()ㆍ선비(鮮卑)ㆍ저()ㆍ강()족을 이른다.

*이보는 ~ 알았으랴: 이보는 남북조 시대 진()나라 혜제(惠帝) 때의 승상인 왕연(王衍, 256~311)의 자이다. 청담만을 일삼다가 뒤에 흉노족에게 나라를 망쳤으며, 후조(後趙)의 고조(高祖)인 석륵(石勒)에게 살해당하였다. 평숙(平叔)은 삼국 시대 위()나라의 문신이자 학자인 하안(何晏, 193~249)의 자이다. 왕필(王弼)과 함께 위ㆍ진 시대의 현학(玄學)의 비조로 받들어지며, 그가 왕필과 주고받은 청담은 일세를 풍미하였다. 소양전(昭陽殿)은 한나라 궁궐의 이름이며 선우(單于)는 흉노의 임금이다.

*유의경의 세설신어: 유의경(403~444)은 남조 송나라의 문신이자 학자로 무제(武帝) 유유(劉裕)의 조카이고 시호는 강왕(康王)이다. 성품이 소박하고 문학을 좋아하여, 문인들이 주위에 많이 모였는데 이들과 함께 여러 책을 편찬하고 저술하였다. 세설신어는 후한(後漢) 말기부터 동진(東晉)에 이르기까지의 정치가와 문인 등 6백 명에 이르는 인물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일화집으로, 당대 귀족계급의 사상과 풍조를 후세에 상세히 전하고 있어 중국문학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이다.

*주지번: 명나라 신종(神宗) 때의 문신으로 자는 원개(元介), 호는 난우(蘭嵎)이다. 신종 만력(萬曆) 23(1595)에 진사시에 장원 급제하고 벼슬이 이부 시랑(吏部侍郞)에 이르렀다. 1606(선조39)에 양유년(梁有年)과 함께 황제의 원손(元孫) 탄생을 알리는 조서를 가지고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 돌아갈 때 허난설헌(許蘭雪軒)난설헌집을 가지고 가서 명나라에서 간행하였다.

*유서경: 유근(柳根, 1549~1627)으로 서경은 그의 호이고 자는 회부(晦夫), 본관은 진주(晉州),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1572(선조5)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벼슬이 대제학을 거쳐 좌찬성에 이르렀다. 시문에 뛰어나 주지번이 사신으로 왔을 적에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이들을 맞이하였다.

 

 

*홍재전서162, 일득록 2

상이 이르기를, “소설가(小說家)는 매우 번잡하고 외람되니, 명목은 다르더라도 그 뜻은 한가지이다. 그러나 유의경(劉義慶)세설신어(世說新語)만은 볼만한바, 강좌(江左) 자제들의 눈매, 턱 모양, 귀밑머리와 수염, 주택, 수레, 의복, 술잔 등이 눈으로 보듯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홍경로(洪景盧 경로는 홍매(洪邁)의 자())이견지(夷堅志)도 수준이 낮지 않다.” 하였다.

小說家甚繁氄猥濫名目雖殊其指則一也唯劉義慶世說最可觀江左子弟眉目頰牙鬢鬚宮室輿服醆斝歷歷如親覩焉洪景盧夷堅志也亦不淺

 

  관서 지역에는 누대가 많은데 강가에 있거나(濱江) 산에 의지하고 있어 중국 사신(天人)이 연로에 감상하니 『황화집』에 휘황찬란하게 기록된 정자들이 고을마다 있다. 그런데 궁벽되어 고요하고 소슬하여 세속을 훌쩍 벗어난 형상을 하고 있는 곳으로는 오직 성천 강선루가 으뜸이다. 이 누대의 주인이 되는 자는 필시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다가 옥당서와 금마문을 떠나 이곳에 왔기에 '강선(降仙)'이라 불렀을 것이다. 또 강산이 매우 절경이라 노을을 먹으며 날개옷을 입은 신선이나 거처하기에 마땅하므로 '강선'이라 불렀을 것이다.  만력 38년 (1610, 광해군2)에 나의 이종사촌 형님(表兄)인 홍준(洪遵) 사고(師古)가 성천을 다스리게 되었다. 홍 군은 두 조정에서 시종신이었는데 외직으로 나아가 이 누대의 주인이 되었으니, 마치 옥황 상제의 향안을 받들던 관리가 『황정경』의 글자 하나를 잘못 읽어 귀양 왔지만 여전히 봉래산의 도관(道觀)에서 떠나지 않은 것과 같다. 홍 군을 위로하는 자들은 모두 말하기를,

 

  "홍 군은 하늘을 날아야 할 사람인데 땅으로 내려와 누대에 머물게 되었구나. 누대가 비록 승경이지만 땅으로 내려왔으니 어찌하랴." 

하였다.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아니다. 옛날 임진년에 삼도(三都)가 모두 전란에 휩싸였을 때 유독 이 곳만은 오롯이 해를 입지 않았다. 그때 학이 끄는 수레가 하늘에서 내려와 우리나라가 중흥하는 기틀을 열었다. 임금이 이 지역을 왕업을 일으킬 만한 곳으로 여겼으니 시종신이 아니면 처할 수 없고, 누대의 이름을 '강선'이라 지었으니 평범한 사람이 편안히 여길 바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 형님에게 명이 이른 것이로다. 예전에 내가 관서 지역의 어사로 나와 이름난 누대를 두루 돌아보았지만, 유독 이 누대가 궁벽하여 고요하고 소슬한 것을 사랑하여 이 누대에 오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당시 '강선'이란 호칭이 마침 내 신세와 맞았다. 그래서 일찍이 파촉(巴蜀)의 무협(巫峽), 사천(四川)의 누강(漏江), 무산십이봉의 안개, 양대에서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되는 광경 등을 모두 나의 금낭(錦囊) 안에 담아둔 것을 스스로 자랑하였는데, 수십 년 후에 나의 묵은 자취를 밟는 자가 다시 우리 집안에서 나올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러하니 신선의 명부에 이름을 올린 것이 비록 형님보다 아우가 먼저였지만, 화려한 누대의 주인이 되어 강산을 마음대로 즐기는 데 있어선 오늘날 우리 형님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이에 군자가 듣고서 노래하기를,

 

높은 누대에 신선이 내려오니

쟁그랑 패옥 소리 옥녀의 모습이네

신선을 따라 내려왔지만

이 누대엔 오래 있지 않으리

천상에 누대가 있으니 

그곳에서 뭇 신선들과 노닐 것이네

 

하였다. 그러자 사고가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하기를,

  "이 누대가 이와 같은 말을 얻었으니, 비록 중국 사신이 감상하고서 『황화집』에 기록하더라도 이보다 훌륭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고는 급히 공인(工人)에게 명하여 이 글을 현판에 새기도록 하였다. 

 

*출전: 권진옥 김홍백 역, 국역 어우집, 학지원, 2016, 220-222.


*이 글은 평안도 성천에 있는 강선루에 대해 쓴 기문이다. 

*어휘의 중의성: 중국 사신(天人)을 가리키는 '天人'이란 말에는 신선이라는 뜻도 있음. 

*명사형 어구를 한국어로 풀 때 서술어형으로 푸는 것이 맞다

 예) 원문: "備天人沿塗之賞" → 중국 사신이 연로에서 감상하니 (연로: 큰 도로 좌우에 연하여 있는 곳)

*輝耀: v. 밝게 비추다, 눈부시게 비추다(照耀). 반짝이며 빛나다(閃耀)

*邑有之: (앞 구를 목적어로 받아서) 고을 마다 있다. 

*僻靜: 외지다, 궁벽하다

 예문) 如人當紛爭之際自去僻靜處坐任其如何彼之利害長短一一都冷看破了朱子語類》 120. (마치 사람이 마땅히 분분히 다투는 때에는 스스로 거기를 떠나 조용한 곳에 가서 앉아서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저 사람의 이해와 장단점이 무엇인지를 하나하나 모두 냉정히 살펴서 파악해야 하는 것과 같다.) 

*蕭瑟(소슬): (국어사전에도 등재된 단어, '소슬하다': 으스스하고 적막하다)

*'세속을 훌쩍 벗어난 형상'을 한문으로 표현하면? 出塵拔世之象

*생략: '임금'이라는 목적어를 생략했지만, 문맥상 넣어서 해석해야 하는 경우 → "繇左右邇列"

*홍준(洪遵, 1557~1616): 1590년 문과 급제. 형조참판으로 있을 때 동지절진하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적이 있다. 남양 홍씨. 이정귀가 묘갈명을 쓴 것이 국조 인물고에 실려 있다. 유몽인의 어머니는 참봉 민의()의 딸이다.

*시종신: 帷幄臣. 帷幄은 황제의 metonym쯤 된다. (황제가 거하는 곳에 장막을 쳤기 때문에 황제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고 함.)

*'향안리'라는 단어를 알아 놓자. 원진의 시에 “나는 옥황의 향안리(香案吏)이니 인간에 귀양살이 왔어도 오히려 소봉래(小蓬萊)에 와 사네.[我是玉皇香案吏 謫居猶得住蓬萊]”라는 구절이 있다.

[번역서 원주 101: 원진(元稹)의 시에 <이주택과어낙천(以州宅誇於樂天)> 시에 "나는 원래 옥황 상제의 향안을 받들던 관리인데, 귀양 와서도 봉래산에 머물 수 있었네. (我是玉皇香案吏,謫居猶得住蓬萊。)라고 하였다. 元氏長慶集 卷 22》 또한 천사에 사는 사람이 도가의 경전인 《황정경》을 정밀하게 읽지 못하면 인간 세계로 귀양을 가게 되는데, 소식의 <부용성> 시에 "왔다 갔다 삼세 동안 공연히 육신을 단련하다 결국은 《황정경》을 잘못 읽는 죄를 짓고 말았구나 (往來三世空鍊形 竟坐誤讀黃庭經)" 하였다.]

(1월 9일. 10:300


(내일 이시간에)

#요점

→출세를 못한 것은 인과응보

→선도에 통달

→음률을 아는 사람

 

#어우야담 내 정렴 관련 기사

*56. 주인의 원수를 갚은 유인숙의 계집종 (121-122)

유인숙은 역적의 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었다. 그의 노비를 몰수하여 공신의 집에 내려주는데, 당시 정순붕의 공훈이 가장 컸기 때문에 유인숙 집안의 노비 가운데 대다수가 그에게 사패(賜牌)로 귀속되었다.  (...)정순붕의 두 아들 정렴과 정작은 모두 뛰어난 재주를 지녔으나 당시 세상에 나아가 벼슬할 뜻이 없어 도석(道釋)의 무리 속에서 방탄하게 지내며 몸을 감춘 채 세상을 마쳤다. 이 어찌 아비가 사림(士林)을 없애면서 지은 커다란 악행 탓이 아니겠는가? 비록 효자의 마음이 무궁할지라도 도저히 씻어낼 수 없는지라, 드디어 수치스러움에 울분을 가슴에 품은 채 끝내 불우하게 지내다 죽은 것이리라. 그 뜻 또한 슬프다 하겠다. 

*89 선도에 통달한 정렴과 정작 (174-178)

내가 참판 성수익 선생이 지은 <삼현주옥>을 살펴보니 북창 정렴 선생은 세상사 물욕을 벗어난 신인이었다. 유가·도가·불가 및 기예와 잡술 등 모든 것을 배우지 않고도 능통했다. 일찍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통하는 석가의 법에 대해 문호를 터득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더니 산에 들어가 정관(精觀)한 지 3,4일만에 문득 환히 돈오하였다. 산 아래 백 리 밖의 일도 능히 알아냈는데, 부절을 합한 것처럼 꼭 들어 맞아 백의 하나도 어긋남이 없었다. 

정렴은 부친을 따라 중국에 가서 유구국 사신을 만났는데 그 또한 이인이었다. (...) 북창이 유구국 말에 능통해서 통역하는 사람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대개 배우지 않고도 능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렴은 늘 한 방에 거처하면서 단약을 만드는 데 공력을 들이고 있었다. (...) 불행히도 일찍 죽어 향년이 44세였다. 그가 스스로 지은 만가는 다음과 같다. (...)

북창 정렴은 고상한 선비로 정순붕의 아들인데, 음양을 비롯하여 의약과 여러 술법에 두루 정통했다. (...) 임진란이 일어났을 때 홍성민은 관서關西(평안도)의 행재소에 있었는데, 그는 항상 정렴의 선견지명을 칭송하였다. 

(-삼현주옥에 관해서는, 장유 <계곡집> 6, <북창고옥 양선생 시집서> 참고. 약간 다름.)

(-유구국 방문에 관해서는, 허목, <미수기언> 11, 원집 중편, <청사열전> <정북창>을 참고.)

(-기타: 조익, <포저집> 27, 《북창고옥집(北窓古玉集)》 발문 참조. 이행의 용재집에도 관련 기록이 있다고 하나 확인하지 못하였음)

 

*205 정렴과 정작의 중양절 시

북창 정렴이 구월하순 경에 만국晩菊을 읊었다. 

(...) 전에 조정에서 관아를 설치해 우리나라의 시를 뽑았는데, 이때 정렴과 정작의 이 시에 대해 말한 이가 있었다. 대제학 유근이 정작의 시를 취하고 정렴의 시는 버리면서 시율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아! 정렴은 음률을 잘 아는 사람인데, 유근만큼 음률을 알지 못한다고 할 수 있으랴. 그러므로 예로부터 지음을 얻기란 어려운 것이다. 

 

*#289 음률에 정통한 정렴

북창 선생 정렴은 음률을 알았다. (...)

정렴은 산사에 거쳐하면서 병풍을 여러 겹 쳐 놓고, 세수하고 빗질하는 것도 폐한 채 지게문 밖을 엿보지도 않고 종일토록 묵묵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 때 절에 있는 한 중이 와서 문안을 드리자 정렴이 말했다. 

"오늘 우리 집 종이 술병을 가지고 올 것이오."

조금 있다가 놀라며 말했다.

"애석하구려. 오늘은 마실 수가 없게 되었소."

잠시 후 종이 집에서 이르러 말했다.

"오늘 술병을 지고 오다가 고개에서 바위에 넘어져 깨뜨렸습니다."

 

*출전: 신익철 외 역 <어우야담>, 돌베개,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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