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I 보던 것을 이어 보는데, 호메로스도 자기 스킬 선전을 하는 데 신경썼다는 대목이 있어 기억에 남았다. 학계에서 살아가면서 해야 하는 일 중에는, 자기가 만들어낸 글을 스스로 널리 알리고 그 장점을 선전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요새 새삼 느끼고 있어서 그런가 그 대목에 눈이 갔다. 제아무리 shy한 사람이라도 자기 책이 나오면 열심히 홍보도 해야 하고 출판사에서 잡는 스케줄에 따라 '독자와의 만남' 이벤트에도 가고, 낯 모르는 사람들에게 싸인도 해줘야 하고 그런 거구나, 하는 것을 최근 모 선생의 책 출간 이벤트가 페북에 중계되는 과정을 구경하면서 새삼 느꼈다. 꼭 대중서가 아니라 논문만 쓰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결국 자기가 자기 연구의 가치를 널리 알리지 않으면 누구도 그 일을 대신 해 주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연구를 열심히 하는 것 외에 연구 내용의 홍보도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학부 때나 석사 때는 사실 거의 느끼지 못했었다. 유학 준비나 해외 학회 발표 신청을 하면서 이런 저런 일을 구경하다보니, 연구만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고 남들이 내 연구 결과에 주목하게 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자기 홍보가 학자의 중요한 과업 중 하나라는 것을 알았어도 이 길을 선택했을까. 소세키 소설에 나오는 인물처럼 '나는 남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그렇게 믿는 게 아니니까"라는 말로 간단하게 넘어갈 수 없다는 것을 요즘 새삼 생각한다. 그러나 역시 나의 솔직한 심정은 그렇다. 나는 남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그렇게 믿는 게 아니라고..

1. 지난 6주간 읽지 못하고 책상 한 구석에 밀어두었던 VSI (very short introduction) 시리즈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10월 어느 화요일에 교보문고에서 사온 Classical Literature. 오늘 만난 저자는 아르킬로코스(Archilochus)였다. 이사야 벌린이 다시 한 번 언급해서 유명해진 여우와 고슴도치 이야기의 원 소스가 아르킬로코스였다고 한다. 


여우는 많은 것을 알지만 고슴도치는 하나를 안다. 그렇지만 굉장히 큰 것을 알고 있지.

(The fox knows many tricks, the hedgehog only one -- but it's a big one. (fr.201)



2. VSI시리즈에 대하여  

VSI시리즈는 전부터 잘 읽어보고 싶은 시리즈였는데 올해 들어서 비로소 본격적으로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번에 Classical Literature를 보면서는, 서방 세계에 이토록 훌륭한 작가들이 많은데 너무 몰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서삼경을 영어로 번역할 때 서구 고전의 용어와 매치시켜서 번역하곤 하는데, 서구 고전에 대해서 너무 모르다보니, 그 번역어들의 뉘앙스와 번역자들의 고심에 대해서 (막연히는 알았지만) 너무 무지했구나 싶었다. 

얇은 책이다보니 금방 읽어질 것 같지만 엄연히 아카데믹들이 쓴 학술적 성격의 책이라서 그렇게 쉽게 읽어지지 않는다. 적어도 이 사실을 인정하게 된 것은 나에게는 1년도 채 되지 않는다. 

학교에서 이번 학기에 대학 1학년생을 대상으로 글쓰기 강의를 하다보니, 강의를 듣는 내 자신에게도 만족스럽고 수강생에게도 들을 만한 얘기를 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전문가 독자와 초심자 독자를 모두 대상으로 하는 VSI 시리즈를 다시 잘 읽어보면 뭔가 답이 나오지 않을까 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역시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3. 독법에 대하여

올해 초에 퀜틴 스키너가 VSI 시리즈에 쓴 마키아벨리를 읽으면서 나의 영어책 읽는 습관을 총체적으로 돌아볼 일이 있었다. 스키너 글을 읽다 보면, 이 정도의 문장을 출력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데이터를 머리 속에 정리해야 될 것인가를 자연스럽게 고민하게 되지 않을 수 없더라고. 그래서 그 때부터 VSI 같은 영문 교양서를 읽는 시간, 방법, 재독의 방법 등을 총체적으로 재점검하고 좀 더 효과적으로 읽으려면 어떤 것을 해야 하는가, 그런 생각들을 했다. 

그렇게 해서 각 챕터를 1독 하는데 몇 시간이 걸렸는지, 몇 번에 나눠서 읽었는지, 각 챕터의 핵심 내용은 무엇인지, 이 책에서 가장 나의 마음을 끈 문장이 무엇이었는지 같은 것들을, 책 날개 안쪽의 안 보이는 곳에다 전부 적어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기록들을 수 차 재검토하면서 어떻게 해야 더 나아질 수 있겠는가를 궁리하게 되었다. 그것을 몇 번 반복한 후에야, 그리고서야 내가 왜 여태껏 그 많은 영어책을 읽으면서도 눈에 띄는 발전이 없었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10대에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했던 기초적인 연습들을 시행하지 않고 영어를 날로 먹으려 했구나, 그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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