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진, 許筠尺牘에 대한 一考察, 한국한문학연구31, 한국한문학회, 2003.

 

*목차

1 문제의 제기

2. 조선후기 문풍의 변화와 허균의 척독

1) 의고문에의 경도와 문학관의 변화

2) 만명소품으로의 재전환과 허균의 척독

3. 허균의 척독에 있어서의 의고문과 만명소품

4. 맺음말

 

1

박지원의 척독과 허균의 척독 비슷한 인상을 받는데, 그것은 의고문(진한고문)이나 당송문 문제로는 설명할 수 없고 만명 소품의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음.

허균문학의 자기변혁을 척독이라는 관점에서 보겠다.

 

2장 조선후기 문풍의 변화와 허균의 척독

 

1) 의고문에의 경도와 문학관의 변화

-1611년 이전에 허균이 만명 소품가들의 척독 선집을 읽었다는 결정적 단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명척독발을 통해 그가 능씨, 황씨, 도씨, 서씨 등에 의해 대규모 척독 선집이 나오는 중국 분위기를 알고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을 뿐. 성소부부고에 척독을 별도 항목으로 설정한 것을 만명 소품의 영향을 받은 때문으로 단정하는 것은 무리. (12). 또 왕세정도 서와 척독을 나누지 않았다.

-허균의 문집 편제에 나타나는 특이성은 아무래도 왕세정의 영향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밖에 없다.(13)

왕세정에 대한 허균의 생각은, 허균이 25세이던 1593년에 지은 학산초담에서는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음. “明人以文鳴者十大家, 崆峒 李獻吉 陽明 王伯安...其自誇太甚; 明人以詩鳴者, 何大復景明, 李崆峒夢陽...然不能如七子, 周旋中國, 可恨也.” 그러다가 주지번과의 만남을 계기로 의고문파의 저작을 탐독. 그 흔적이 詩部에 실려 있다. (17)

1606년 이몽양의 공동집, 하경명의 대복집

1607년 서정경의 서적공집과 이반룡의 창명집, 왕세정의 엄주사부고

1608년 변공의 변화천집, 사진의 사산인집, 왕세무의 왕봉상집, 서중행의 서천목집, 오국륜의 오국륜의 담추집 독서. 이들 중 왕세무 외에는 다 전후칠자.

 

허균이 이전에도 왕세정 저작을 읽긴 했지만 이때는 새로운 각도로 정밀하게 읽게 되었다. 주지번과 만남 이전에 왕세정 문집 읽었음을 짐작케 하는 자료: 오성 재상께 올린 편지, 을사 (1605) 3, 20 척독. “원각경 현토본을 올려 읽어보시게 했는데... 완위편은 글씨 쓰는 사람을 시켜 베껴서 곧 김충신에게 부쳐 대감께 돌려보냈습니다.”

 

-이정기는 성소부부고를 보고 왕세정의 만년작과 같다고 평했다. (19~20)

-국조시산은 이반룡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 (근거로 드는 것이 권21의 조지세에게 보낸 편지[정미 10, 1607]인데, 좀 더 검토 필요. (21)

-1606년 허균이 보인 문학 세계의 변화: 이달에게 보낸 편지(기유 4) 옹께서는 저의 근체시가 순숙하고 엄신하여.. 당시나 송시와 유사해질까 두려워하며 남들이 허균의 시라 말하는 것을 듣고 싶으니 시왕동, 망고대, 박달곶..이반룡이 이 글을 봤다면 명시산에 넣었을 것. 옹께서는 본디 저의 소부가 완려하다고..(자기 확신: 한정록서, 박씨산장, 왕총이기, 십이론, 이절도뇌, 관묘비, 남궁생전, 대힐자, 북귀부, 훼벽사를 한 통으로 만들어 변생에게 부쳐 보냅니다.)

앞의 둘은 1609년작, 마지막 것은 1610년작. 한정록은 세설신어, 와유록, 옥호빙을 주자료.

한정록은 재편집 과정에서 만명 소품가들(원굉도 진계유 등)의 저작이 대거 수용된 점을 감안하더라도, 한정록은 원래 편집 의도와 편술자 지향부터가 만명소품가와 궤를 같이하고 있었던 것. 한정록 편술은 1610년의 일. 왕세정과 이반룡을 축으로 한 의고문에 빠져 있었으면서도 다른 새로운 방향 전환을 모색했고, 그것이 1614년과 1615년 북경에 가서, 원굉도·진계유의 저작을 구입해 들어오는 식으로 구체화 된 것. (23)

 

2) 만명소품으로의 재전환과 허균의 척독

이덕무: “허단보의 책 부부고의 간독들은 아름답고도 기이해서 즐겨 읽을 만한 것으로 우리나라에는 드물게 있는 것이다. 그는 명나라 사람의 글을 배운 자인데도 그가 취하여 쓴 것은 세설신어 1권이다. 그러므로 그 맑고도 미묘함을 따르기 어려운 것이다. 그가 나옹 이정에게 준 편지에서 동산을 그리는데 그 배치를 설명한 것이 역력히 신묘한 경지에 들어갔으니 매우 기이한 필치이다.” (청장관전서 51, 이목구심서4)

 

장여림은 1550년생일 가능성이 높고 장윤이 아님. (26)

 

유청일찰은 하량준의 사우재총설, 초횡의 筆乘, 심덕부의 萬曆野荻編과 더불어 명나라 중엽 이후의 대표적 필기산문. (이 말이 곽예형에게서 나왔나 봄. 곽예형의 중국산문사, 1999,에서 이들 책을 명대 중엽 이후의 대표적 필기문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했음. 각주 41)

허균이 유청일찰을 본 것도 이문광독과 마찬가지로 1599의 일. 윤근수도 유청일찰에 관심있었음.

허균이 전여성의 서호유람지를 본 것은 그보다 앞선 시기의 일.

전여성의 서호지는 서호유람지를 일컫는 것. 제명은 유람지이나 사고전서총목제요에서 지적한 것처럼 실제로는 남송의 遺文逸事를 기록한 것. (사고전서총목제요 권70). 본편 24, 志餘 26. 본편은 서호총서, 고산삼제승적, 남산승적, 북산승적, 남산성내승적, 남산분맥성내승적, 북산분맥성내승적...등 서호 주변의 명승과 사적. 지여는 제왕도회, 편안일상, 요행반황, ...등 서호 인간 지역 출신 인물 또는 이곳을 거쳐간 문인명사에 얽힌 설화 수록. 즉 서호유람지는 인문지리적 성격을 띠면서도 패사 소품의 성격을 띰. 허균은 최소한 그 개요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 “스스로 내 방법

 

허균 척독 177편을 작성 시기별로 분류. (34)

주지번을 만난 후부터 1611년까지 사이에 척독의 2/3를 지었음.

 

 

3. 허균의 척독에 있어서의 의고문과 만명소품

척독 177편중 가장 긴 것은 157, 가장 짧은 것은 17. 또 기생에게 보낸 편지를 문집에 실은 것은 당대 관습상 이례적. (35) 보낸 연월을 부기한 것도 이례적.

허균에게는 의고문이든 만명 소품이든 명의 문장일 뿐. (39) 중국에서도 의고문과 대척적인 만명 소품에 대한 비판이나 논란이 심각하지 않았던 것.

-세설산보와 완위편 같은 필기 잡설을 통해 의고문으로 쏠림.

곽예형 178~179, 만명 문장은 이미 소품의 영역에. 이반룡이 왕세정에게 준 척독을 예로 들면서 진도 당송도 아니고 제량도 아니고 꾸밈에 힘쓰지 않고도 종이에 아름다움이 가득하다.(40) 왕세정이 이미 만명소품의 분위기를 갖고 있다고 했다. (184~185)

-인상적으로는 서위의 척독에 가깝다: 100자 내외의 단문에 공식적 격식의 頭辭가 없고, 간결한 문체로 신변 잡사를 기록하면서도 시 이상으로 서정성이 강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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