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정(2007), 허균 산문의 연구-산문텍스트의 확장과 문예미를 중심으로, 동아시아고대학 16.
-간만에 보는 꽤 동의할 수 있는 논지. 이 논문을 통해 강명관 설이 논파되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상당히 일리 있는 주장을 전개해 놓았다.
Ⅰ. 허균을 바라보는 두 시선
Ⅱ. 산문 텍스트의 확장과 그 의미
Ⅲ. 허균 산문의 문예미
Ⅳ. 맺음말
*요점: 강명관은 허균이 진한고문파라고 했으나 허균의 글은 당송문의 자장 안에 있다.
Ⅰ. 서론(허균을 바라보는 두 시선)
-허균 연구의 미결 과제: 1) 문단의 일반적 흐름과 구별되는 특징적 국면에 대한 해명, 2) 역사비평을 통해 구축된 허균의 모습이 작품의 문예미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3) 작품의 문예미와는 어떤 방식으로 결합하고 있는지.
-이 글의 작업: 허균의 산문인식, 특히 전범적 산문 텍스트에 관한 언급 속에 내재한 원칙은 무엇이고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작품에서 어떤 양상으로 구현되고 있는지 고찰. 역사적 맥락 (당대인가 현대인가?) 속에서 고착된 허균 모습에 대한 반성적 고찰.
-강명관은 허균 문학을 생성 과정에 있는 것으로 보는데 그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생성 과정에서 어떤 원칙이 있었을 것이고 완결된 것으로 볼 필요가 있다. (각주 1번) (강명관을 목적론자처럼 몰아가는데 그 비판자인 논자 역시 확인되지 않은 ‘원칙’을 근거로 강명관 설을 비판하는 것이 온당한지 잘 모르겠다.)
-성소부부고를 산문 비평서로 파악.
Ⅱ. 산문 텍스트의 확장과 그 의미
-허균은 유별나게 전후칠자에 대한 언급이 많고 (윤근수나 최립보다도), 더구나 유몽인은 송명의 문장을 비판한 점에서 더욱 허균의 입장이 도드라짐.
-허균 초년(20대 중반)에는 전후칠자를 고평하지 않았는데 38세 되던 1606년 주지번과의 만남을 계기로 태도 일변.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명사가시선>. 비록 시에 한정된 것이기는 하나, 허균의 일변한 태도를 잘 보여줌. 이 시기에 쓴 일련의 글(세설산보주해서, 당시선서, 제당절선산서, 한정록서, 명시산보발, 명척독발) 전후칠자에 대한 호의가 잘 드러남. 그래도 허균은 진한고문가는 아니다. (278쪽)
∵ 전후칠자와 달리 송문을 존중: <구소문략발>. 도습하지 않는 창작 정신을 본받겠다는 <문설>이나, <시변>의 주장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
-허균의 글은 수사보다 주제의식이 선명하다. 그 점에서 최립(수사가 승함)과 대비된다.
-왕세정 글을 숙독한 것은 분명하나 (엄주사부고를 본딴 체제라든지, 열선찬은 왕세정의 <속고사찬>, <오사찬>, <讀> 등의 영향을 받은 것), 다른 점도 있다. ① 엄주사부고서 앞에 배치되었던 애제문, 비지문을 뒤로 미루고 논변문을 앞에 끌어온 점, ② 엄주사부고에 없는 장편 기행문을 추가한 점, ③ 서독으로 묶여 있던 서신문을 서와 척독으로 나누어 독립시킨 점.
-작품 배열 자체가 이미 일련의 가치판단을 암시하기도 한다. 성소부부고 문부의 배열은 허균의 주체적 해석이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말은 맞을 수도 있지만, 딱히 와닿지 않는다. 허균이 어떤 기준을 가졌기에 배치 순서를 바꾸었는지, 자의적인 배치가 아니라고 볼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좀 더 짐작할 만한 뭔가가 주어져야 저 추측이 설득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따져볼 수 있을 것)
-전범 성립은 이데올로기적인 문제라서, 조선에서는 이미 확립된 기존 전범이나 당송고문 쪽의 견제로 인해 전후칠자가 상당히 폄하되었다. 전후칠자는 그저 실라버스의 제공자 정도로 주변화되었고, 허균도 전범을 대체하는 것에는 무관심했다. 허균에게서 ‘문필진한’의 구호가 보이지 않는 것이 그 근거다. (283쪽)
-허균이 전후칠자를 언급한 일련의 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전후칠자를 성당시를 계승할 시인이자 비평가로 인정한 점 정도이다. 허균에게 전후칠자는 전범의 대체자가 아니라 기존 전범을 풍부하게 하는 실라버스의 제공자. (283쪽)
장여림, 능적지, 도륭, 서위 등 만명 소품가들을 따라 척독집을 편찬한 것도 전범의 대체가 아니라 실라버스 확대에 있었던 것이다. (283쪽)
-허균의 선택도 기존의 지배적 문학 담론이 제공한 기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만명 소품문 역시 기존 담론을 대체할 정도에 이르지 못했다. 허균의 산문론은 선진에서 만명까지 폭넓은 영역을 포괄하고 있지만, 정작 수사나 문체에 별 영향을 주지 못한 것도, 허균이 전범 대체를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84쪽) (적실한 지적이라 생각된다.)
Ⅲ. 허균 산문의 문예미
-허균 산문의 성취와 관련해 흔히 거론: 전장류 문장(5傳)과, 논변류 문장(유재론, 호민론 등)이 있음. 그러나 사회 모순에 대한 비판에만 허균 문학의 주제가 한정되는 것은 아님. 당송문을 닮은 記序文, 소품문 기색이 역력한 척독, 고아한 풍취를 지닌 辭賦도 여러 편.
-허균은 최립처럼 고아한 문체를 자기 작품에 적용하려 하지 않았다. 허균 산문에 대한 거의 유일한 평은 ‘우여완량’ (이정기). 만년의 왕세정처럼 허균도 의미 소통을 위주로 한 곡진하고 유연한 문체를 구사했음. 손쉬운 독해를 지연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곧잘 사용되는 생략, 도치, 換字, 減字, 割裂 같은 수사 기법은 거의 안 나온다. (285~286쪽)
예) 송석해안환산서(1608년작): 부안 정사암에 거하던 어느날 승려 해안을 만났는데, 자신과 생시가 일치하고 사족 출신으로 시문에도 재주 있었다. 그런데도 한 명은 승려, 한명은 관리가 된 것. 이 글에서는 머리 깎고 가사만 입지 않았지 ‘나도 승려’라는 의식, 격정과 긴장감이 드러난다.
예) 통곡헌기: “시속의 기호를 위배한 사람이라 시류를 거스른다”는 조소에 담긴 비판적 시대정신. 이것은 허균 문학 전체를 관류하는 주제다. (288쪽)
예) 사우재기: 세상과의 절연을 말하고 있지만, 온전한 주체가 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
→허균은 수사적 안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윤택함과 세련미를 포기한 대신, 세계와의 갈등과 소외된 자아를 예리하게 드러내는 글쓰기 수법을 택한 것. (289쪽) (이 말은 좀더 연찬이 필요한 대목)
-갈등이 첨예하게 드러나지 않은 글(청계집서, 송조지세부경서, 애일당기, 사계정사기)은 분위기가 다르다.
예1) 송조지세부경서(290): 원래 송서는 (당송대에 본격화), 위무와 권계를 달성하기 위해 의론형 서술을 취하는 경우가 만음에도, 허균은 서사적 서술을 택했다. 서사적 글쓰기 수법은 청계집서와 애일당기에도 일관된 현상으로, 우여완량하다는 이정기의 말의 의미를 짐작케 함. (290쪽★)
예2) 사계정사기: 의론부에는 산행을 쓰고, 사실 진술 부분에는 제행(4언, 5언)을 씀. 그리하여 독자가 의론부에 집중하게 하고, 행문에 변환미를 주었다. 이런 서술 전략은 다시 의론이 시작되는 마지막 단락과 긴밀 호응. ‘알 수 없는 일’이란 호응구는 허균의 좌절된 의식세계를 상징. 꿈 속의 계시가 이루어지기를 희구한 <몽기>나 <주흘옹몽기>도 현실과 소통할 수 없는 허균의 쓸쓸한 자화상.
→두 편 모두 증여하는 글이므로 대상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지만, 수신자보다는 허균 중심으로 글이 쓰여져 있다. 당대의 관성화 된 담론을 배제하고 자기 내면에 충실한 이야기 구조, 당송문의 행문 관습을 따르되 수사적 조탁을 배제하여 획득된 진정성이 허균 산문의 문예적 특징. (293쪽)
Ⅳ. 맺음말
허균 산문의 스펙트럼은 매우 다양하다. 척독 (“봄날은 이미 어긋나 그윽한 꽃이 그대를 기다리다가 모두 이울었습니다.”[邀景洪] “나라가 벌만도 못하니 실망만 하게 되네.”[復南宮生])에 그 점이 잘 나타남. 허균의 산문은 당송문의 자장 안에서 범위를 확대하려 했던 것에 불과함. 그래도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문학을 추구하여 세계와의 갈등, 내면의 욕망을 잘 보여주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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