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논문명
#이태진, 1976, 「15세기 후반기의 ‘거족’과 명족의식 - <동국여지승람> 인물조의 분석을 통하여」, 한국사론 3,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이정주, 2006, 「조선 초기 지리지 인물 관련 조목의 계량적 분석」, 역사민속학 23, 한국역사민속학회.
2. 내용 및 소감
#이태진(1976)
-요지: 한마디로 훈구파의 성격 규명 연구.
(1)<동국여지승람> 인물조 기록 및 (2)성현의 <용재총화>에 나타난 씨성(氏姓)명단을 비교 분석하여, 그러한 기록물들이 훈구파의 명족의식의 산물이란 것을 논증하고, 이를 통해 훈구파의 성격을 규명한다. (1)과 (2)에 겹치고 일정 조건을 만족하는 30여개 유력 거족가문을 추출해서 몇 가지 결론을 도출해 냈음. (여기서 '거족'이란 정3품 당상관 이상을 대상으로 하는 승람 인물조의 본조 항에 4~6인, 또는 10인 내외의 인물을 올리는 것으로 규정.)
1) 세종지리지(역사적 사실에 초점을 둠)와 승람(명족의식 발현의 산물)을 비교했을 때, 세조 집권 이후 집권층 귀족화 추세가 양성화 됨을 알 수 있다. 집권층 귀족화란 집권층 내 일급(一級) 통혼권이 나타남을 의미함. (특정 가문과 이중 혼인을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통혼권이 축소되고 폐쇄화되는 현상)
2) 족보 발생의 단초: 신흥 사대부 세력이 정치적 주도권을 확고히 하는 역성혁명 전후 무렵에 나타남. 족보는 가문 권위를 장식하는 수단.
3) 왜 조선 초 혹은 15세기 말 즈음하여 족보나 명족의식이 출현하는가? 왜 이 시기인가?
요약하면 신흥사대부들이 고려말 권문세족들에 대해 지녔던 열등감 극복 수단. (312~313)
역성혁명의 주체는 구 귀족을 타도하고 나서는 신흥사대부들이었지만, 이들이 구 귀족에 대항한 것이 곧 신분관념 자체를 초극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자가의 권위 뿐 아니라 사대부 세력 전체의 지위를 현창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 (∵족보는 자신이 전통 잇는 대족의 후예란 것을 과시하는 선전적 효과 밖에 달리 더 이상의 현실적 의미가 찾아지지 않는다. 313쪽) <승람> 편찬 전후 무렵까지 유력한 집권 거족 가문들 사이에서 만들어진 족보는 승람 인물조와 관련하여 명족 의식의 소산으로 봄이 옳을 것. (314)
3)에 이어지는 '결어' 부분의 (나는 동의할 수 없는 발전사관이 피력된) 이야기: 지배층의 역사에서 15세기말 거족의 위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피상적으로 이해한다면 고려말 권문 세족의 재현에 불과하여 두 시기 사이의 발전을 찾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전 단계의 답보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권문세족에 대한 민현구 교수 집필, 고려 후기 권문세족의 역사적 성격을 각주 132번에 전재) 권문세족과 신흥사대부는 관료적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신분 세습의 경우, 권문 세족은 음서에 주로 의존했으나 신흥사대부는 과거 비중이 높고, 이것이 발전이다. 하지만 음서 비중이 크게 약화되지는 않는다. 이게 이 시대 한계. 전 단계의 권문세족적 체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 이러한 미개혁성이 그들의 귀착점을 권귀화에로 이끈 듯하다. 이들의 권귀적 성향은 사림파라는 새로운 정치적 비판 세력의 등장으로 제동되었으니...이것이 시대의 잠재력이고, 이 잠재력은 여말에 이루어진 관인 신분층의 확대에서 이미 얻어진 것. (머리속이 꽃밭인가.) 재야에 유자격 관인층이 넓게 남겨지고 있었던 것. 최초의 충돌이 무오사화.
-목차
1. <세종실록지리지> 인물조와 <승람> 인물조의 비교 –당시 집권층 성격 차이
2. <승람> 인물조에 나타나는 ‘거족’ 씨성
3. ‘거족’ 씨성의 가계관계
4. ‘거족 씨성의 혼인관계
5. 족보의 대두와 <승람> 인물조
-각 챕터별 주요 내용
1. <세종실록지리지> 인물조와 <승람> 인물조의 비교 –당시 집권층 성격 차이
*세종실록지리지: 대상인 물의 수 80명. [(이정주 2006:96) 총 85명이라고 한다.] 그나마도 다수가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려조에 치우쳐 있어 당대 중심적 성격이 희박. [여기서는 어쨌든 정확히 80명인 것처럼 표를 만들어 놓았음. 233쪽] 세종지리지는 가계 의식이랄 것을 찾기가 어렵고 국가적 기준에 충실.
*승람 인물조: 생존 인물도 대상. 고려 조 인물도 크게 추가했지만 역사적 비중보다 가계 관계에 더 주안 두어 선정된 느낌. (235쪽)
*승람 인물조에서 계보 추적과 무관한 삼국시대 고려시대 인물을 실은 것은 국가사업이라 불가피했기 때문일 것. 국가적 차원 기준 준수는 손해가 아니었고 가문의 영광이었을 것. 본조 항에서 정3품 당상관 이상이란 기준을 두어 한둘의 인물 배출에 그치는 다른 많은 열약한 씨성의 등재를 허용한 것도 같은 원리일 것. (236)
*세종 지리지는 왕조 개창 초기 신왕조의 정통성을 분명히 하기 위해 추진된 일련의 국사 편찬 사업. 다른 한편으로 이 시기는 신왕조 집권층의 형성기, 집권층 내의 훈족적 성향 발휘가 미약한 때라는 사실도 고려되어야 함. 15세기 후반에도 훈구파가 기반을 닦아 가고는 있지만 훈구적 속성 발휘의 결정적 계기는 세조의 집권에 있음.
*승람 인물조는 훈구파 최성기에 편찬된 것임. (236) 두 책의 성격상의 차이는 그 집권층의 성격에 원인 하는 것.
2. <승람> 인물조에 나타나는 ‘거족’ 씨성: 성현 용재총화 명단과 승람 인물조 비교
*성현의 용재총화의 거족 씨성 명단 검토: (작성 당시 현재의 씨족 중심)
총 75개 씨성 명단. (237쪽부터. 이 중 용재총화 명단에, 강원도는 원주원씨 강릉 최씨, 강릉 함씨가 수록. 238쪽)
-고려 조선을 통해 3인 이상의 배출이 있었던 씨성으로서 성현의 명단에 빠진 가문과 숫자 리스트업(238~239.): 총33개 씨성. 여기에 강릉김씨 김상기 외 5인, 김종 외 1인 수록)
→의미: 고금의 씨족을 망라한다고 말은 했지만 실제로는 옛 거족을 소홀히 한 것. (239)
-추가사항: 누락된 씨성 중에는 ‘재상지종’의 일급 명족들도 적잖게 포함. 그 중 하나가 강릉김씨. 고려의 일급 명족들은 그 반수가 위 명단에서 빠진 것.(240)
-명단에 든 씨성의 경우, 승람 인물조를 살필 때, 명단에 빠진 씨성과 달리, 조선조에서도 계속 명족적 지위를 누린 예가 많음. 양천 허씨 2인, 등등. 1인 정도 인물 배출은 결코 성세(盛勢)라고 할 수 없지만, 2인부터는 질적인 면이 고려되면 결코 거기서 빠지지 않는다.
→의미: 성현의 명단에 든 씨성은 모두 과거의 성세(盛勢)에 현재의 성세가 함께 고려되어서인 것.(240) 그리고 해주최씨등 3개는 결국 고금의 거족 중 옛 거족의 몇 개 예로 들어진 것일 듯. 신왕조에 들어와 성세가 옛것에 뒤지지 않는 명족이 등장, 새로운 명족 의식의 체계가 존재했으리라는 것. 이 그룹이 훈구계 대표 가문.
→성현의 명단에 강릉 함씨는 들어 있지만, 강릉 김씨는 누락되어 있다. 함부림 계는 조선 초에 상당했지만 강릉 김씨는 그렇지 않았던 것.(238) 또 조선조에 새롭게 1인이라도 현달자를 배출한 가문으로서 용재총화의 명단에 든 것은 3개밖에 되지 않는다. (243쪽)
*분석의 주 대상 '거족'
표Ⅲ 245-247쪽: 거족(본조 항에 2인 이상 인물 올린 씨성 모두) (244쪽부터): 총 70개 씨성.
(주목할 만한 씨성: 경기의 양천 허씨, 강원도는 셋. 강릉 최씨, 강릉 함씨, 강릉 김씨. 강릉김씨는 2인을 배출했지만 앞서 본 것처럼 용재총화 명단에 누락되었다. 그 점에 247쪽에도 표시되어 있음.)
표Ⅳ: 승람에 실렸지만 용재총화에 오르지 않은 17개 씨성.
-위 표의 씨성 중 총원 수가 3인 이상이면서 공신 배출까지 곁들인 경우(고성 이씨 무장 윤씨, 영광 류씨, 연안 김씨)는 용재총화 저자의 단순 누락일 것.
-이 시기 거족이란 실상 외양적으로는 씨성을 단위로 하나 내용적으로 일정한 친족 관계를 가지는 것이므로 그 기준에서 다시 분리되는 위의 씨성들이 거족으로 간주될 수 없었던 것이 당연. (248)
-분석대상: 표Ⅲ에 오른 70개 씨성 중 용재총화에 오른 것에 누락으로 판단되는 5개 씨성을 더해 도합 58개 씨성을 거족 씨성으로 간주하여 분석 대상으로 삼는다. (259)
특성① 공신 배출: 이 자체가 거족의 중요한 요건. 58개 씨성 중 41개 씨성이 공신을 냈음.
특성② 출사로: 대상 씨성의 총 인원 292명 중 문과 급제자가 189명으로 전체의 64.7%. (과거인가 음서인가)
→과거가 조선조 제일의 출사 수단. 그보다는 오히려 과거가 중시된 시기에도 비문과출신자가 전체의 35.3%(114명)를 차지한다는 사실이 주목되어야 함. 10명이 문과 합격 도는 무재(武才)자로 2명이 문음으로 명기되고 나머지 102명은 사로(仕路)에 대한 언급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들은 대개 문음일 것이다. 영예롭지 못하거나 번거롭다고 보아서 표기를 생략해 버린 것. (250-251) 정3품 당상관 이상의 현달자를 대상으로 하는 승람 인물조의 소재 인물 가운데 문음 출신이 이처럼 적잖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사실은 좀 더 음미될 필요.
→해석: 유력 씨성일수록 가문의 배경이 아직도 개인의 현달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 (251) (참고: 태조~성종대까지의 상신(相臣) 69명 중 문음 출신이 17명.)
-1인 배출의 비거족 씨성의 특성 (251)
이들은 과거를 거쳐 정3품 당상관 이상에 오른 자들로, 음서 혜택은 이들 자손에게도 주어졌겠지만 이들의 경우는 현달자 배출을 연속적으로 못했음. 거족(공신배출)과 비교할 때 음서제 활용에 있어서도 능부의 차이가 발생.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왕실과의 혼인관계. 훈구파라 불리는 거족 가문은 공신도 많고 국혼도 많은데, 그러나 이들에게서도 과거(문과) 출신자 비율이 높았던 사실이 잊혀서는 안 될 것. 그런데 거족의 일반적 성향을 염두에 둔다면 과거제 운영도 결코 객관성을 유지했다고 보장하기 어려울 것. (252) 문치 표방으로 과거제 운용이 가장 충실했을 것으로 믿어지는 세종 대에도 고시관(考試官)의 사정(私情) 개입 문제로 인하여 명경 제술 병과의 취선 문제가 여러 차레 크게 논란된 사실 (이성무, 1967, 「선초의 성균관 연구」, 역사학보35·36 합집)을 감안하면 과거제가 집권층에게 유리하게 운영 되었을 가능성은 쉬이 짐작되는 바이다. (252). 표3에서 보는 바와 같은 거족 시성에서 급제자의 집중적 배출 현상은 바로 그 결과일 듯.
-거족 단위로 내세워진 씨성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253)
씨성이 단위로 내세워지기는 했으나 내용적으로는 구성원이 가까운 친족 관계에 놓이는 것이 일반적. 따라서 분석 대상이 된 위의 여러 씨성도 각기의 가계 관계가 검토된 다음에 거족 여부에 대한 최종 판단이 내려질 수 있을 것.
3. ‘거족’ 씨성의 가계관계
*당시의 가문, 즉 친족의 법적·현실적 범위가 어떤가 하는 점부터 미리 검토.
-경국대전의 호구식(戶口式)과 상복제에 관한 규정을 보면 ... 증손대를 하한으로 하는 친족 범위의 실재를 확인할 수 있다.
-서로 다른 관행(慣行)의 병존은?
가의 유래를 밝히는 데 일차적 목적이 있다고 볼 수 있는 호구식의 사조(四祖)보다는 출사자의 선계 표시가 현실적으로 보다 긴요한 문제일 것. 상장시의 복식이 일시에 그치는 것이라 한다면 봉사(奉祀)는 보다 지속적 의례(儀禮)일 것.
∴증손대까지의 기준이 통용된 것 같다. 그러나 친족 의식은 현손대의 동 고조 팔촌 사이에서도 지속되는 것으로 보아야 할 듯.
*승람 인물조의 각 거족 씨성을 분석하는 데에도 이 기준 (증손대)을 적용할 수 있을 것.
유형A: 하나의 친족 집단으로 구성되는 경우
유형B: 두 개 이상의 친족으로 구분되는 씨성 (279)
총 57개 씨성에 대한 분석.
유형A |
유형B |
*파평윤씨 [국혼] -당시의 거족이 본관 시성을 내세우고 있기는 하나 내용적으로는 가문중심이다. (∵윤보 일게에 인물이 집중) -특정인이 현달한 이후(영의정 부사)등과자 다수 출현. 세조의 집권으로 최고조에 달함 (국구의 집안이 됨) *청주한씨 [국혼] -국혼을 통해 성장한 거족으로서 파평 윤씨와 쌍벽. -고려 후기부터 비로소 성세를 보이기 시작한 씨성. -신왕조에 들어와 가문 지위 안정에 크게 기여한 한상경이라는 인물. -한확도 한상경 다음으로 가문의 지위를 크게 높임. 누이 가 명의 성조와 선종의 후궁.명 왕실과의 혼인 관게가 가문의 중요 배경 (262) -급제자 다수 배출. 다만 한상경 1인을 제외하고 가문 성세에 크게 기여한 인물들이 모두 문과 출신 아님 -이 가문의 최성세인 한악(韓渥)의 5대손 당대의 3계(系)가 과연 서로 친족적 유대의식을 유지하고 있었는가? 자료는 없고 추측만. 유지.(264) *청송심씨 [국혼] -국혼이래 성종대까지 국혼 관계 가진 가문으로 안변한씨, 곡산강씨(이상 태조대), 경주김씨(정종대), 여흥민씨(태종대), 청송심씨(세종대) 안동권씨(문종대), 여산송씨(단종대). 이들 중 청송심씨를 제외하고는 그때그때의 정치적 사정으로 가문 지위를 굳히지 못함. (265) 승람에는 3인만 오름. 그래도 일급거족으로 손색없는 경우. ∵3대 연상(連相), 국혼 관계. 태조의 중요 친여세력. 심온의 딸이 충녕대군과 결혼. 세조대 영상을 지낸 심회(沈澮). 직계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빠른 현달은 다른 일급거족들과 맺은 가문 자체의 혼인 관계 덕.(267) *광주이씨 [급제, 공신] 세조 대에 드디어 상신(相臣)급 배출. *창녕성씨 과거만을 통한 성세가 가지는 한계가 녹공(錄功)으로 타개된 사례(271) 여러 계가 있지만 승람 인물조에 오른 인물은 특정 1계에 한함. (272) 여말 신흥 세력의 하나로 간주되는 이 가문은 주로 성석린에 의해 지반이 닦아진 듯. 세조 대 성삼문의 피화로 타격이 있지만 연좌법이 직계자손 밖으로 미치지 않는 관례가 있어 석인 계를 통한 성세 지속이 가능했음. *한산이씨, 안동권씨 이색의 한산이씨와 권근의 안동권씨, 과거를 통한 성세의 대표적 예. 서로 사제 간이고 혼인 유대도 곁들임.(277) 그런데 한산이씨 중에서도 이종선의 자손이 급제. 그 외가인 권근 등이 문주(文主)인 점과 무관치 않을 것. 세조에 협조적. 반대한 인물도 있긴 함. 그러나 이계전(계유정난 1등공신)의 적극적 활동으로 덮어짐. 가문 영달을 위해서는 세조 집권에 협력이 불가피. *나머지 가문은 277-278쪽에 표로 제시 -양천허씨는 혼인 관게로 다지면 내용적으로는 일급. |
*안동권씨(승람에 10인 등재) 같은 씨성이라도 권극화와 권함(權瑊)은 11대조에서 이미 족보상 갈림. 양자는 별개의 친족집단. 이미 고려 말부터 자손이 번성한 대족이라 역성 혁명기에는 종지 관계가 여럿으로 나뉘어 있었음. (282) 신왕조에서 활약한 8인중 7인기 권희(權僖) 일계의 자손.(283) 승람 편찬 당시에는 권담(權湛) 계열과는 친족 의식도 박약한 상태였을 것. 1)권부(權溥)를 정점으로 한 여말 권문세족 가계 2)권희를 정점으로 하는 신왕조 이후 새로 구축 가계 세족적 체질에서 더나 변전하는 정치 정세에 어느 정도 적응할 수 있는가가 가문의 성쇠를 판가름할 계제. 권희(권근의 아버지)계는 조상 덕도 있지만 새로운 권력 체계 속에서 새로 구축된 면이 많다.(294) 권근은 4자. *전의이씨, 동래정씨, 문화유씨, 연안김씨, 순흥안씨, 안동김씨, 광산김씨, 경주이씨, 여산송씨, 상주김씨 등 10개. (뒤의 셋은 등재인의 절대 수 적음) →씨성 단위로 뿐만 아니라 친족 단위로 분리되어서도 유력한 일계가 있었음이 확인된다. (287) →앞의 씨성 중 특정 계통들은 15세기 후반 일급 거족의 조건을 다 갖춘 경우. 나머지도 크게 뒤지지 않음. |
*두 개 이상의 친족이지만, 족보상 시조를 달리하거나 시조를 같이 하면서도 서로의 계보를 연결시키지 못한 경우. 한양조씨 등 8개. -시조를 같이 하면서도 계보를 연결 못 시킨 경우: 연안이씨 한양조씨 죽산안씨. -연안이씨는 소정방 내원시 정착했다는 당나라 이무(李茂)를 시조로 한다. 한양조씨나 죽산안씨가 계보를 연결 못 시킨 이유는, 계보 의식을 지닐만한 성세를 이전에 누리지 못했기 때문. 이점은 씨성을 같이 하면서도 씨조(氏祖) 조차 달리하는 경우(남양홍씨, 경주김씨, 하동정씨, 진주하씨)도 마찬가지. -배출인물 1인의 경우는 비거족씨성과 동일 조건이 되므로 우리의 분석 대상에서 제외. (남양홍씨, 경주김씨, 하동정씨). 그렇지만 하동정씨 정인지는 워낙 그 자신이 대단하니까 예외. (291) 그는 자신만 영달할 뿐 아니라 일급 거족과의 통혼을 성취시켰음. -승람 인물조에 3인이 올라 있는 완산이씨의 경우도 위의 경우에 준한다. 3명 중 1인은 파가 달라 별개. 15세기 거족의 조건에는 미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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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밀양박씨, 선산김씨, 김해김씨, 신천강씨, 강릉최씨.(292) -가계가 불분명. 용재총화에 왜 올라갔는가.15세기 후반의 유력한 거족이 못됨은 분명. 그들 중 거족의 조건을 다소나마 갖춘 것은 밀양박씨의 박미 가문뿐. |
-15세기 후반 당시 유력한 거족 즉 훈구파의 주류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 57개 씨성에 대한 더 자세한 구분이 필요.
-1급 거족은 모두 36개, 그 중 5개 경우를 제외하면 모두 29개. (298) 표Ⅳ.
배출 인물 3인 이상, 세조~성종 연간의 공신이 있는 경우, 녹공자가 없으면서도 배출 인물이 3~4인 이상인 경우. (왜 3~4인이냐, 왕조 개창후 15세기 후반까지가 약 1세기로, 3~4대의 생존기에 해당하는 점이 고려 되었다.)
표Ⅳ가 보여주는 바에 따르면 일급거족들의 인물 배출은 4~6인이 일반적, 10인 안팎에 달하는 것도 적지 않다.
4. ‘거족 씨성의 혼인관계
-15세기 후반의 유력 거족들이 대개 왕조 개창이래 4인 이상 누대에 걸쳐 인물을 배출했다 →가문지위의 세습적 성향, 귀족적 생리의 한 측면으로 간주된다. (299)
-혼인이 중요한 이유는 방목에 외가도 적게 하기 때문임.
현재 가능한 자료는 방목류(<登科錄>, <國朝榜目>이 일차적). 족보류도 있지만 이 무렵까지의 족보류는 족보에 실린 것 자체가 방목 것을 베낀 것. (300)
-통혼사례 요약(300-302): 혼인 관계는 성립 시기가 명기되어 있지 않아 분석에 어려움. 그렇지만 역성혁명 이전에 이루어진 혼인 관계임에 분명한 것들이 있고, 이 경우들은 신왕조에서 유력해지는 거족들의 통혼이 여말에 연원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분석 여력이 없으므로 개연적으로만 다음과 같이 정리)
→여말 기성 귀족에 저항하던 신흥사대부들은 그들 나름의 일정한 통혼권을 형성하고 있지 않았나 짐작.
-여말에는 귀족적 성향이 강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집권적 입장 지속이 보장됨에 따라 점차 상호 성세의 보완이라는 의미가 강해졌을 것이고, 세조~성종 연간 훈신 자녀 사이의 혼인이 두드러지는 권귀화 성향으로 이어짐. (303) 가령 전의이씨 정간계는 무반적 분위기였는데, 당시의 일급거족인 청주한씨와 통혼한 이후 자녀 대에서 4형제가 한꺼번에 현달. (한명회 등과 사촌관계인 인물들) 5형제 과거급제야 자기 능력이라 하더라도 녹공 참여는 인척 관계가 작용햇을 것.
-자기 권위의 과시 방법으로 일급 거족과의 통혼권에 들려는 노력이 있었을 것.
예) 고령신씨는 전에도 성세가 아니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신숙주 이후 일급 거족이 됨. 한명회 딸과 신숙주 장자가 결혼, 장손은 파평윤씨 딸과 결혼. 정인지도 열세의 가문이었지만 그의 영달을 계기로 차자가 세조의 딸과 결혼하고 다른 아들 둘도 죽산안씨 가문에 장가들었는데 이중혼인. 이 이중혼인은 당시 집권층의 귀족화 추세를 보여주는 좋은 측면. 통혼권의 폐쇄화, 축소화를 의미. 일급 거족 사이에서 일반화되는 추세. (305)
→혼인관계에서 나타나는 여러 사실들은 가문세습적 성향과 함께 15세기 후반 유력 거족의 귀족적 성향을 입증하기에 족함. (305)
5. 족보의 대두와 승람 인물조
-귀족적 성향은 4절까지 해서 드러났을 것. 승람 인물조 설정도 거족의 명족 의식 발휘의 산물일 것임이 수긍이 갈 것.
-15세기 일대에 승람 인물조와 비슷한 편찬물로서의 족보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사실.
-족보 편찬 본격화는 16세기 후반 내지 17세기의 일. 그러나 성화 연간(세조-성종대)에 만들어졌다는 세 개의 족보가 승람 편찬과 시기를 거의 같이 한다. 문제는 15세기 거족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다는 점.
-그런데 족보는 성책(成冊)하는 것이라서, 구비조건이 있음. 「차운암설원록」(차문절공유사 규12702. 수록)에 다르면 연안차씨도 역성혁명 무렵에 이미 족보 있었음이 밝혀진다. (308) (차문절공유사라는 책에 대해서는 별고가 필요할 듯. 흥미롭고도 수상쩍은 책이다.)
-족보는 결국 역성혁명을 전후한 무렵 당대의 집권세력에 들면서 성세의 연원이 오랜 씨성(가문)에서부터 만들어진 것이라는 결론. (311)
-그렇다면 왜 하필 역성혁명기에 족보 대두? 이하 추측.
1) 족보가 성책할 정도로 집적되려면 이 무렵은 되어야 했을 것. 족보 발생의 필요조건. 충분조건은 아니다.
2) 유교의 영향. (고조 증조를 상한으로 하는 가계의식은 고려 전기 씨족록에서도 있어온 것이라 특별할 게 없다) 문제는 족보 제작 주체의 입장.
역성혁명의 주체는 구 귀족을 타도하고 나서는 신흥사대부들. 일부 구 귀족이 있긴 하나 이들은 신흥사대부와 입장을 같이한 사람들. 어쨌든 일견 모순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유의할 것은 신흥 사대부들의 구귀족에의 대항이 신분관념을 초극하려 했던 게 아니라는 것임.
→(인용): 새 집권 세력으로서의 신흥 사대부의 발전적 측면이 인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중세적 집권층으로서 그와 같은 한계. 자신들의 신분과 지위가 결코 구 귀족에 못지 않음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으로 있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312-313) 이(吏)의 신분에서 뒤늦게 벗어난 부류가 다수를 차지하는 신흥사대부의 입장으로는 구 귀족과의 상대적 비교에서 드러나는 신분적 열등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에 따라 그것을 만회할 수 있는 어떤 방도가 요청되었을 것.
-자가의 권위 뿐 아니라 사대부 세력 전체의 지위를 드러내는 의미도 내포했을 것.
∵당시 현실적 의미를 갖는 친족 범위가 동 고조 8촌에 그치는 한, 동성동본의 인물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족보는 자신이 전통 잇는 대족의 후예란 것을 과시하는 선전적 효과 밖에 달리 더 이상의 현실적 의미가 찾아지지 않는다. (313)
→신흥 사대부들에게도 그들 나름의 지위과시욕구 내지는 신분 관념이 강하게 소지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16세기 후반 ~ 17세기에 들어가서 사림 계열의 가문까지도 망라한 족보 편찬의 본격적 전개는 따로 살펴볼 문제겠지만, 승람 편찬 전후 무렵까지 유력한 집권 거족 가문들 사이에서 만들어진 족보는 승람 인물조와 관련하여 명족 의식의 소산으로 봄이 옳을 것. (314)
#이정주(2006)
-요점: 조선 초기 지리지(세종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는 모든 인물을 계량적으로 분석.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초반까지 80년간 사회의 변모 양상을 밝히고자 함. (→결국 유교화 얘기임. 초기에 경상도에 유교적 인물이 많았는데 이게 전국화가 진행되었고 그 방향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착실히 올라갔다는 스토리임)
1. 머리말 2. 세종실록지리지 인물조 분석 3. 동국여지승람과 세종실록지리지 인물 관련 조목 분석 4. 인물 관련 조목을 통해 본 조선초 사회의 변모 양상 5. 맺음말 |
*소감
1. 계량적 분석 자체는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기대감을 갖고 봤으나, 연구 설계의 이유가 납득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이 연구가 보다 넓은 맥락에서 어떤 퀘스천에 답하고 있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다.
2. 이태진의 위 논문에 대한 이견이 각주 3번에 제시되어 있는데(연도도 틀렸음), 비판의 요지도 근거도 납득되지 않는다. "단순히 지리적 분포에 따라 나열"하는 것이 왜 문제며, 본관의 지리적 분포가 아니라면 어떤 기준에 따라 해야 한다는 것인지 모르겠음. 그 자신도 지리적 분포에 따라 데이터를 제시하고 있지 않나?
3. 이 시기 주요 두 지리지를 보는 관점이 상당히 이태진과 다름을 알 수 있다.
4. 제시된 내용이 논리적으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모호해서 갑툭튀 정보의 나열 같은 느낌을 곳곳에서 받았다. 가령 3절의 유배 관련 기록 얘기 등.
*내용 요약
1. 머리말
-승람은 이전 지리지에서 중시되었던 정치 경제 군사 내용은 거의 다루지 않고 문화적인 내용(인물 시문 고적 능묘) 위주. 유교 문화의 발전에 따른 문화 의식 표출 (정두희 1976, 이태진 1979 [sic])
-연대: 세종지리지(1454년), 동국여지승람(1481), 신증(1530).
2. 세종실록지리지 인물조 분석
총인원: 세 책 모두에 나오는 인물은 2784명. 2회 이상 출현한 경우는 419건. 중복 제외시 2068명.
세종지리지는 총85인. 전쟁에서 공을 세웠거나 태묘나 문묘 종사된 사람. 세종 지리지는 행정 군사적 필요에 의해 토지 및 인적 자원 파악을 우선한 지리지라서 인물조 비중이 적은 편. (지역 단위 인구수 표시되어 있다는 얘기는 여기서 왜 나옴?) 인물 배출 현황과 도별 인구 비율과는 연관성이 없다.
특징: 고려시대 이래 대표적 문벌 가문군 속한 인물이 많다. 그러나 표본 숫자 적고 특정 가문에 치우쳐 있어 대표성 가진 자료라 보기 어려움.
3. 동국여지승람과 세종실록지리지 인물 관련 조목 분석
수록 인물: 2699인. 전국 모든 군현의 인물 정보를 망라.
-절대 인구수에 비해 경상 전라 충청도는 인물 배출 비율이 높고 한성부 평안도 함길도는 배출 비율이 낮음. (44) 이것은 인물들을 활동 공간이나 거주지가 아니라 본관을 기준을 소속시켰기 때문. 한성부가 경도가 되면서 명환조에 실릴 인물이 없었던 것도 중요한 이유.
-동국여지승람의 경우 조선 인물이 절반을 약간 상회하는데, 여기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 인물 열녀 효자 조. 인물조는 고려인이 조선인보다 21% 많다. 열녀와 효자는 고려 이전 사람이 30%에도 미치지 못한다. 조선시대 들어와서야 유교 윤리가 확산되어 갔음을 말해주는 것.
-수록 인물 숫자는 달라도 <동국> <신증>의 전체적 인물 배출 양상은 세종지리지와 유사. 이는 역으로 세종지리지가 당시 지배층 상황을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반영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 (47) (그저 기록술의 개선이 없는 것일 수도 있지 않나?)
4. 인물 관련 조목을 통해 본 조선초 사회의 변모 양상
조선 초 지리지 수록 인물을 도별로 정리한 표7.
조선 전기 지배층은 한반도 남부 출신이 주류.
이정주 (본인) 의 연구(2005)에서 15세기까지는 사족 형성이 미약했고 16세기 들어오면서 재지사족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갔음을 지적하고 있는데, <신증>에서 인물 배출 추세는 이 경향과 부합. 16세기의 사족층 형성이 전국적 현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49)
인물 배출 두드러지는 지역은 창녕현 해주목 문화현. 창녕성씨. (이걸 알아서 어디다 쓰지?)
*명환: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은 관원. (한성부와 개성부는 경직(京職)이라 명환이 한 명도 없다)
*표12: 열녀 효자 효녀의 지역별 숫자와 비율. 유교적 가치관의 확산.
경상도에 대해 풍속이 순후하다는 평을 자주함.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전반까지 경상도의 비중은 낮아지는데 여타 지역에서 유교적 가치관 확산이 빨라졌음을 의미. (53)
*표13: 인구대비 열녀 효자 점유 비중의 변화. →전라도 효열 인간군의 절대적 점유율도 높고 효열 인간군의 증가속도도 빨랐다.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초반까지 전라도 지역이 한성부와 함께 유교적 모범지역이었음을 뜻함. 황해도와 평안도도 유교적 가치관이 이들 지역을 중심으로 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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