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 10
(출전: 정구복 외 역, 역주 삼국사기 번역편, 한국학중앙연구원, 2012)
원성왕 (255~)
원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경신이고 나물왕의 12세손이다. 어머니는 박씨 계오부인이고, 왕비 김씨는 각간 신술의 딸이다. 일찍이 혜공왕 말년에 반역하는 신하가 발호했을 때 선덕은 당시 상대등으로서, 임금 주위에 있는 나쁜 무리들을 제거할 것을 앞장서서 주장하였다. 경신도 여기에 참가하여 반란을 평정하는 데 공이 있었기 때문에, 선덕이 즉위하자 곧바로 상대등이 되었다. 선덕왕이 죽자 아들이 없었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의논한 후 왕의 조카뻘 [族子] 되는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다. 이 때 주원은 서울 북쪽 20리 되는 곳에 살았는데, 마침 큰 비가 내려 알천의 물이 불어서 주원이 건널 수가 없었다. 어느 사람이 말하였다.
"임금의 큰 지위란 본시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폭우는 하늘이 혹시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지금의 상대등 경신은 전왕의 아우로 본디부터 덕망이 높고 임금의 체모를 가졌다."
이에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단번에 일치되어 그를 세워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얼마 후 비가 그치니 온 나라 사람들이 만세를 불렀다. (...)
어머니 박씨를 소문태후로 삼고 아들 인겸을 왕태자로 삼았다. (그 외에 김주원을 명주군왕에 봉했다거나, 김주원의 아들이 2년에 반란을 했다거나 하는 식의 기사는 없음)
2년(786) : 당나라 덕종이 조서를 내림.
4년(788) : 독서삼품과 시행
8년(792) : 가을 7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미녀 김정란을 바쳤다. (원주42) 그 여자는 나라 안에 제일 가는 미인으로 몸에서 향내가 났다. (삼국유사 권2 기이편 원성대왕조에 신기한 구슬을 몸에 지님으로써 원성왕의 총애를 받았던 사미 묘정이 당에 사신으로 가는 모 잡간에게 딸려서 당제에게 바쳐진 설화를 전하고 있다. 설화 내용으로 보아 사미 묘정은 바로 미녀 김정란과 동일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권덕영, 《고대한중외교사-견당사 연구》, 1997, 72쪽) [pdf 312]
#삼국유사
(출전: 최광식 박대제 역, 삼국유사, 고려대학교출판부)
기이 2, <원성대왕>
이찬 김주원이 처음에 상재가 되고, 왕은 각간으로서 이재의 자리에 있었는데, 꿈에 머리에 쓴 두건을 벗고 흰 갓을 썼으며, 12현금을 들고 천관사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왕은) 꿈에서 깨어 사람을 시켜 점을 쳤더니 말하기를, "두건을 벗은 것은 관직을 잃을 징조이고, 가야금을 든 것은 칼을 쓸 징조이며 우물 속으로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징조입니다." 옹은 그것을 듣고 매우 근심하여 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때 아찬 여삼, 어떤 책에는 여산이라고 하는 이가 와서 뵙기를 청했으나 왕은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나오지 않았다. 다시 연락하여 말하기를, "꼭 한 번 뵙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므로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아찬이 묻기를, "공께서 꺼리시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하니, 왕이 꿈을 점쳤던 사유를 자세히 말하였다. 아찬은 일어나 절하고 말하기를, "이는 매우 좋은 꿈입니다. 공이 만일 큰 자리에 올라서 저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공을 위해서 꿈을 풀어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에 좌우 사람들을 물리치고 해몽을 청하였다. (아찬이) 말하기를, "두건을 벗은 것은 위에 앉은 이가 없음이고, 흰 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이며, 12현금을 든 것은 12대 자손에게 왕위를 전할 징조요,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궐에 들어갈 상서입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위에 주원이 있는데 내가 어떻게 왕위에 오를 수 있단 말이요?"라고 하였다. 아찬이 말하기를, "비밀리에 북천(北川)의 신에게 제사 지내면 가능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왕은) 그대로 따랐다.
얼마 안 되어 선덕왕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 사람들은 김주원을 받들어 왕으로 삼아 장차 궁으로 맞아들이려고 하였다. 그의 집이 북천의 북쪽에 있었는데 갑자기 냇물이 불어 건널 수가 없었다. 왕이 먼저 궁에 들어가 왕위에 오르자, 상재의 무리들이 모두 와서 따르고 새로 오른 임금에게 축하를 드리니, 이가 원성대왕이다. (왕의) 이름은 경신이요, 성은 김씨이니 대개 길몽이 맞은 것이었다. 주원은 명주로 물러나 살았다. 왕이 등극했으나, 여산은 이미 죽었으므로 그의 자손들을 불러 벼슬을 주었다. 왕에게는 다섯 자손이 있었으니, (...) 대왕은 실로 인생의 곤궁하고 영달하는 이치를 알게 되었으므로 신공(身空) 사뇌가를 지었다. [노래는 없어져 알 수 없다]
-왕의 아버지 대각간 효양이 만파식적을 주었다는 이야기. 일본왕 문경이 만파식적을 얻으려고 군사를 일으켰다는 이야기. 당나라 임금과 호국룡에 대한 이야기. 사미 묘정과 자라가 놀았던 이야기. "이 사미는 한 군데도 길한 상이 없는데.. 필시 이상한 물건을 가졌을 것." 구슬을 빼앗기고 은혜도 빼앗긴 이야기.
(위의책 474-475쪽 원성대왕 미주)
신당서 권220 동이전 신라전에는 원성왕 이름을 '경칙(敬則)'이라 했다. 내물왕의 12세손이다. 아버지는 효양 대아간이고 어머니는 지오부인이다. 780년에 즉위하여 14년간 다스렸다. 뒷날 선덕왕이 된 양상과 더불어 김지정의 난을 진압하였다. 이때 혜공왕을 살해하고, 양상이 왕위에 오르는 데 기여하였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그는 양상과 밀착된 인물로서 경덕왕 이래 왕실의 전제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혜공왕 말기의 혼란을 평정한 공으로 선덕왕 즉위년(780)에 상대등에 임명되어 그 자신이 즉위할 때까지 재임하였다. 원성왕의 즉위 과정에 대하여 당시 왕위 계승의 서열상 보다 더 정당한 계승자로 인정된 것이 김주원이라고 보면서 김경신이 왕위에 오른 것은 상대등이라는 직위를 이용하였기 때문이라고 하고 상대등이 가지는 정치적 억지력에 주목하였다. (이기백, 1974)
그런데 이와는 달리 선덕왕 대에 정치적 실권을 행사한 김주원이야말로 정치적인 힘을 이용하여 선덕왕 사후 부당하게 왕위에 오르려고 한 사람으로 규정짓고,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왕위 계승을 바랄 수 있었던 상대등의 지위에 있었던 김경신이 오히려 왕위 계승에서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므로 김경신은 태종무열왕계로는 이례적으로 반전제주의 운동에 참가한 김주원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전제적 왕권이 부활될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가졌던 귀족세력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어 왕위에 등극할 수 있었다고 본 것이다. (김수태, 1996)
한편, 원성왕대는 하대(下代) 권력구조의 특징을 이루는 왕실친족집단원에 의한 권력장악, 권력 집중의 전형이 확립되어 가던 시기였다. 원성왕은 즉위와 동시에 왕자 인겸을 태자로 책봉하여 다음의 왕위 계승권자로 확정하였다. 그리고 원성왕 7년(791) 1월에 인겸태자가 죽자, 그 이듬해 8월에는 왕자 의영을 다시 태자로 책봉하였다. 원성왕 9년 (793)에 다시 의영 태자가 죽자 왕손(인겸태자의 맏아들)인 준옹(뒤의 소성왕)을 이듬해 1월 태자로 책봉하였다. 태자의 동생인 언승(뒤의 헌덕왕)도 시중 병부령 상대등에 임명되어 정치의 중심부에서 활약하는 등 이처럼 왕과 태자를 정점으로 한 극히 좁은 범위의 근친왕족들이 요직을 독점하였는데, 하대는 이들 근친왕족들에 의하여 왕위가 이어져 원성왕계로 특징지어진다(이기동, 1980). 이리하여 혜공왕 사후 여러 이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반전제주의 귀족세력들이 상호간의 권력투쟁을 거쳤으나, 과도기적 성격의 선덕왕을 거쳐(신형식, 1990) 원성왕대에 이르러서 마침내 하대정권은 안정될 수 있었던 것이다.
(0108 목 오전.)
(위의 책 475-477)
*김주원
-그의 정체에 대한 두 가지 설: (1) 김인문(태종 무열왕의 둘째 아들) 후손이라는 설(이기동, 1984) (2) 무열왕-문왕-대장-사인-유정-주원 이렇게 이어진다는 설(강릉김씨족보). 이 설에 따르면 무열왕에서 경덕왕대에 이르도록 신라 최고 관직인 시중(문왕, 대장, 유정)과 상대등(사인)을 역임한 집안이다.
-가문 세력 약화(이기백 1974): 사인은 경덕왕 6년(747)에 한화정책을 비판하다가 퇴직, 유정은 경덕왕 4년(745)에 천변지이에 대한 책임으로 물러남. 그리하여 반왕 귀족적 세력을 띄게 되고 이후에 명주세력과 결탁했을 것이라는 설(김정숙 1984)
-조선시대 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김주원이 명주군왕에 봉해졌다는 이야기에 대한 두 가지 설: (1) 원성왕 세력과 모종의 타협의 결과라는 설(김창겸 2003), (2) 명주군왕에 봉해졌다는 말 자체를 부정하는 견해. 조선시대에 윤색된 기록이라는 이야기 (김흥삼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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