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에서는 김창겸(1997) '명주군왕(김주원)', 김흥삼(2008) '김주원', 김창겸(2010) '원성왕' 세 논문을 검토한다.
#김창겸, 「신라 ‘명주군왕(溟州郡王)’고」, 成大史林 12·13합집, 성균관대학교사학회, 1997. (성대박사, 1994)
*요점: 원성왕이 칭제(稱帝)했으며, 그 징표가 '명주군왕'이라는 '왕'을 봉했다는 사실이다. 명주군왕은 제후적 존재로, 신라 하대에는 황제국의 요소를 지닌 봉작제가 있었음을 확인시켜주는 사례다.
*소감: 화랑세기, 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 증보문헌비고 같은 자료를 사료적 가치에 대한 회의 없이 거의 전면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여기서 제기하는 주장을 거의 신뢰하기 어려웠다. 예를 들어 다음 사례.
40쪽: 원성왕은 '경신대왕'과 더불어 '원성대왕'(삼국사기 권10 신문왕 즉위조)이라 하여 시호는 물론 재위시에도 대왕으로 호칭되었다. 대왕이라는 칭호는 황제 천자와 같은 의미를 지닌 것이다. (각주 10: 사카모토 요시타네(坂元義種)의 <ㄷ고대동아시아의 일본과 조선>, 1978, 120~165쪽. 특히 '월광사원랑선사비에는 경문왕을 '황왕'으로 '개선사석등기에는 경문왕비를 '문의황후'로 표현하였다. 필사본 화랑세기 세종전에는 태후 대왕 황후 태자가 나란히 기록되어 있는데 대왕은 황제의 의미가 분명하다.) (저자는 금석문은 당시인의 표현과 기술이므로 후대에 편찬된 문헌기록 표시보다 신빙성이 있다고 말하지만, 비석에 어떤 단어를 새기느냐와 실제 사회 내에서 그 정도의 위상과 세력을 갖는 문제는 별개의 사안이라는 게 간과되고 있다.)
41쪽: 국내적으로는 황제국의 체제를 택해 대왕이라는 황제적 위상을 가지면서 황태후 태자 왕후 등의 칭호를 사용해 황실의식을 표현했다. 즉 원성왕은 왕권 강화의 한 방법으로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왕실을 중대 무열왕계보다 격상시키고자 황제적 위상을 취했다. (명칭에는 돈 드는 것도 아닌데 직함을 뭐라 부르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오늘날 세간에서 실장님이니 사장님이니 하는 것과 마찬가지지.)
42쪽: (思仁)이 명주 지역과 관계를 맺은 듯하며, 특이 그의 아들 김주원의 아버지 유정(惟正, 惟靖, 無月郞)이 명주 지방의 세력가와 혼인을 맺음으로써 보다 강한 연계를 갖게 된 듯 하다. (각주17: <명주군왕신도비문>, 임영지 1975, 291.) (아래 보일 것과 같이 김흥삼은 그런 결혼의 성립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고 있으며, 근거로 든 임영지라는 것도 20세기 자료라서 신빙성이 상당히 떨어진다.)
44쪽 신라 중앙정부는 동북방에 대해 국방상 위협을 느꼈고 발해와 일본의 연결과 침공에 대비해야 했음. 명주 지역 김주원이 보유한 군사력을 이용해 동북방 방비의 책무를 떠맡긴 것. 원성왕은 김주원을 책봉해서 정치 경제적 예대와 신분보장을 해 주면서 방비를 김주원 세력에게 떠맡긴 것이다. (김흥삼의 관점에서 보면, 애초에 그러한 식읍 사여가 있었다는 것 자체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문면 그대로 수용한 것이라 받아들이기 어려운 얘기라고 할 것. 그러니 역사적 사실인지 불분명한 식읍 사여의 의미를 따진다는 것이 무의미한 얘기라 했을 것. 이하에서 명주군왕의 의미가 뭐냐를 어석의 차원에서 따지는 것도 같은 관점에서 다 기각될 얘기. )
45쪽: 명주군왕의 의미: 군왕은 봉작제에 있어 친왕의 다음 작위이고, 분권화의 표징.
46쪽: 김주원이 군왕에 봉해진 것은 왕위 포기에 대한 대가라는 정치적 배려에 의한 이성봉작이다. 김주원계는 제후적 위치에서 중앙 정권과 일정한 거리를 가진 독자 세력을 유지했다.
49쪽: 동사강목 (附卷上上, 蓮花夫人 [考異])에 나오는 명주군왕 기사를 소개. (내가 볼 때 이 인용의 문제는 동사강목의 해당 기사에서 ‘이에 취하지 않는다’는 대목은 쏙 빼고 인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동사강목의 해당 기사는 허균의 <별연사고적기> 말미와 거의 자구 수준에서 일치하는데, 그 내용의 진실성에 대해서는 전면적으로 신뢰를 못 얻고 있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기사임. 이 논문의 논지에는 동의하기 어려워도 흥미롭고 가치있는 사료를 소개한 공헌은 분명 있음.)
(참고: 동사강목의 해당 기사 원문은 서비스 안 됨. 내가 직접 타이핑한 원문은 다음과 같다.
蓮花夫人[金周元母 元聖王二年]
古記云, 周元敬信, 同母兄弟, 母溟州人, 始居蓮花峯下, 號蓮花夫人. 及周元封於溟州, 夫人養於周元. 王歲一來省, 四代國除爲州. 然則蓮花夫人, 其周元之母, 而與敬信同母之說, 卽古記之誤錄耶, 今不取之.
52쪽: [신라는] 중국에 대해서는 하나의 제후 구실을 하면서 국내에서는 당당한 황제와 같은 지위에 있었다. (애꿎은 미야지마 이치사다의 1959년 조선학보 14 논문 '삼국시대의 위계제에 관하여'라는 것을 들먹이고 있는데 신라 상황과 무관한 얘기같다.)
#김흥삼, 2008, 「신라말 굴산문(崛山門) 범일(梵日)과 김주원 계(金周元系) 관련설의 비판적 검토」, 한국고대사연구 50, 한국고대사학회. (강원대 박사, 2002)
*요점
1)범일과 김주원계가 유관하다는 최병헌 이래의 통설은 잘못으로, 양자 간 시대차이도 100여년 가까이 나고 무관함. 범일과 김주원계가 유관하다는 자료는 후대의 것으로 신빙성이 없는 자료에 근거한 것. (이건 내 연구와는 무관)
2) 기존 연구에서는 (1) 김주원이 원성왕에게 받은 식읍이 명주에 있었고 (2) 김주원이 명주에 오기 전에 모계를 통해 명주에 혈연적 연고가 있었고 (3) 김주원의 명주 퇴거시 추종세력이 함께 이주했다고 보았음. (이를 통해 범일과 김주원계가 밀접한 관련있다고 봤음) 그러나 셋 다 틀린 것.
3) (1) 식읍 문제:
a. 식읍 기록이 나오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인물조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김주원이 식읍을 받았다는 기록이 없다) 조선 전기 명족 의식에 의해 족보가 만들어지던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당대의 거족이던 강릉 김씨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다. 향촌 사회 내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봉군분관설을 주장한 것에 불과함. (301~302쪽)
(참고: 조선시대 양반들의 족보 조작에 관하여 다음을 참조.
이수건, 2003, '머리말', <한국의 성씨와 족보>, 서울대 출판부, p.iv.
이태진, 1976, '15세기 후반기의 '거족'과 명족의식 -<동국여지승람> 인물조의 분석을 통하여', 한국사론 3.
삼척김씨 들에게도 봉군분관설이 보임. 각주 16번)
b. 원성왕이 김주원에게 주었다는 식읍의 지급 방식과 규모 및 정황 등도 통일신라 말 상황과 어긋남.
-방식: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봉토를 준 것처럼 되어 있지만, 삼국통일 전후부터 식읍의 지급방식은 봉토에서 봉호로 바뀌었음. (예: 김주원보다 약간 늦은 시기에 살았던 장보고도 김우징의 즉위에 공을 세워 2천호의 식읍을 받았다고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 10 신무왕조에 나옴)
-규모: 항복해 온 견훤이나 경순왕의 식읍이 1군에 불과한데, 반란의 소지가 있는 김주원에게 5군을 준다는 것은 어불성설. (초록에서만 얘기하고 304쪽, 306쪽에 간략히 다룸. 자세한 논의는 각주 26번에서 말했듯 박춘식, 1987 '나말여조 식읍에 대한 일고찰 -견훤과 김부에게 사급된 양주와 경주를 중심으로', 사총 32를 보아야 할 듯.) 왕위 계승의 경쟁자였던 김주원에게 이 정도의 넓은 토지를 준다는 것은 어불성설.
(참고. 강릉김씨 족보는 강릉 부사(府司)에 소장되어 있던 고려 시대 이래의 세계도를 참고하여 16세기에 편찬된 것이며, 원 자료의 개변과 직역의 서술에 후대적 수식과 두찬이 가해져 있다는 주장이 제기 된 바 있다. [이수건, 1984 '고려 후기 지배세력과 토성', <한국중세사회사연구>, 일조각, 295쪽, 주142.])
-어휘: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김주원이 식읍으로 받았다는 지명 중에 '근을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는 명칭이고 고려사에만 나온다. 그러니 통일 신라 때 지명은 아닐 것이다. (이 얘기는 타당한지 unconvincing)
-정황: <신증동국여지승람>,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나오는 김주원 식읍 기사를 나란히 놓고 보면 <승람> 내용은 나머지 두 책의 내용을 적당히 섞어 놓은 것에 불과함. 또 정의태후가 교지를 내려 김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했다는 내용이 추가 되어 있지만, 정의태후는 선덕왕(37대) 즉위 초에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9 선덕왕 즉위조) 그런 교지를 낼 수 없음. 또 두 책에 없는 김경신이 무리를 위협해서 왕에 즉위했다든가, 김주원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 했다든가, 조회에 나가지 않았다든가 하는 말은 기록자의 감정이 투영된 말임. 또 하천을 건너지 못한 에피소드가 누락된 것은 김주원의 후손에게 불리한 내용이라 삭제된 것. (308~310쪽)
요컨대 <승람>의 김주원 기사는 강릉김씨 후손들이 자기 시조인 김주원이 왕에 버금갔다고 현창하고 이를 기반으로 강릉 지역에서 권위를 과시하고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해 구성해 낸 말에 불과.
(2) 김주원의 모계가 명주의 연화부인이라는 설:
a. 해당 설 부연 및 출처: 김주원의 아버지 김유정(惟正, 惟靖, 無月郞)이 명주로 벼슬 갔을 때 만난 연화부인 박씨와 혼인했다는 기사가 <강릉 김씨 세보>와 1960년에 만들어진 '명주군왕 신도비문'에 있음.
b. 골품제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혼인이다: 근거는 <신당서> 220, 열전 145. 동이(東夷)에 1골과 2골의 통혼 금지 관습이 나온다. 김주원의 아버지는 무열왕계 진골 출신이므로 골내결혼을 했을 것. (311쪽)
c. 족보나 비문은 역사적 사실을 적기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 후손들이 자신들의 조상을 선양하기 위해 쓴 것이므로 사료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 (이수건, 1984, 한국 중세사회사 연구 295쪽 참조. '고려 후기 지배 세력과 토성')
-기타 내용은 범일 관련 내용으로 내 연구와 관련성이 떨어지므로 생략.
4) 기타 중요사항
(1) 각주40: 고려 시대 이래 지방 자료는 주로 각 읍사에 비치되어 후대에 전해졌을 것. 강릉 김씨의 족도(族圖)도 강릉 부사에 소장되어 오랫동안 전해진 것으로 보아 강릉 김씨 관련 자료가 강릉 부사에 많이 보관되었었을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1565년 '강릉김씨족보 서', <강릉김씨족보>; 1832 '강릉김씨 신간 세보 서' <강릉김씨 세보>를 보시오.)
(2) 강릉의 최씨, 함씨, 박씨는 고려 건국이후에야 비로소 강릉에 정착한 성씨로, 통일 신라 시대의 인물인 김주원과 함께할 수 없었다. (316쪽)
-강릉함씨는 양근 함씨인 함부림이 조선 개국공신으로 강릉에서 활동하면서 시작된 성씨이다. (315쪽). 강릉 최씨 역시 고려 건국 이후의 인물이라 시대가 많이 앞선 김주원과 무관. (315쪽)
(3) 나말여초 강릉지역에서 김주원의 세력은 강력하지 않았다. (신호철, 2006, '후삼국기 명주 장군 왕순식의 정치적 위상과 궁예 왕건과의 관계', <나말여초 강릉호족에 대한 제조명) 김주원 계는 세 계통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중 김신 계의 후손 김식희의 후손들이 강릉에 정착해 세력을 갖게 된 것은 고려 건국 이후일 것이다. 김식희 후손들은 각종 직을 세습하면서 고려 시대 군현의 재지 세력을 대표하는 호장층을 이루게 되었고, 이들이 지방 이(吏)로써 강릉 통치에 깊이 관여하게 되어 읍사를 장악하고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즉 강릉 김씨의 김식희 후손들이 강릉에 토착하여 읍사를 중심으로 상급 향리층을 구성하여 이 지역을 지배했다. 요컨대 강릉 김씨의 실질적 시조는 김주원이 아니라 김식희가 될 것. (318쪽)
김주원 묘(명주군왕릉)와 원성왕릉의 규모만 비교해 보아도 알 수 있다.
(1942년 후손들이 기적비(紀蹟碑)를 세웠다. 또한 1960년 이승만 대통령이 찬한 신도비(神道碑)가 금산리 능소 앞에 세워졌다.)
#김창겸, 2010, 「신라 원성왕의 선대(先代)와 혈연적 배경에 대한 재검토」, 한국학논총 34,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요점 및 소감
최병헌, 김경애 등의 설, 즉 원성왕의 선대는 대단히 세력 있는 가문이 아니었다는 데 대한 반론.
→원성왕 김경신의 선대를 부계, 모계로 추적한 뒤 그들이 상당한 지위가 있었고 국왕과 가까운 혈연관계로 맺어져 있었다고 말하는데, 감투가 있고 촌수가 왕과 가까운 것과 정치 무대에서 위상이 어느 정도냐 하는 것은 별개인 것 같음. 논문에서 제시한 사료상의 근거가 모두 맞다고 하더라도, 최병헌 김경애의 설이 논파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듯.
→사료에 대한 지루하고 꼼꼼한 분석에 강점이 있으나, reasoning 면에서는 동의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최병헌의 발견: 서울대 교수로, 불교사 연구의 빅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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