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李汝仁

 

我愛藐丈夫, 詞華自童丱.

貫穿百家語, 嗜之如芻豢.

나는 이 작은 사내를 사랑하니 더벅머리 시절부터 글월 빛났네.

백가의 모든 말을 꿰뚫었고 그것들을 추환처럼 맛있게 여겼네.

 

徵事徐陵優, 多才陸機患.

擊鉢未喩捷, 映雪還嗤慢.

서릉은 고사를 징험하는 데 뛰어났고, 육기는 재주 많아 근심 불렀네

격발도 빠른 것 못 되고, 영설은 게으름을 되려 비웃네.

 

-서릉(徐陵, 507~583): 육조시대 양·진의 학자 관료. 문집으로 徐孝穆集이 있다. 자주 위나라와 북제에 사행 가서 뛰어난 변설과 기략을 발휘했다.

-격발: 양나라의 경릉왕이 밤에 여러 학사를 모아 시회를 열고 사람을 시켜 구리 바리때를 치면서 시를 재촉하였는데, 소문염(蘇文琰)이 동발 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사운시(四韻詩)를 완성했다 한다. 南史 王僧孺傳

-영설: 나라의 손강이 가세가 빈한하므로 눈빛의 반사를 이용하여 글을 읽었다는 고사.

-嗤慢: 웃을(조소할) , 게으를 만.

 

組錦蹙鳳文, 琢玉雕花瓣.

璵璠價自高, 俗賤爭嘲訕.

비단 짜서 봉의 무늬 구김살 만들고, 옥을 쪼아 화판(꽃잎)을 아로새겼네

여번(美玉)이라 그 값이 절로 높은데 세속은 천히 보아 조롱하누나.

 

-璵璠: 좌전 정공 5년조에 나오는 美玉.

-嘲訕: 기롱하여 비웃음.

 

 

詩壘値交鋒, 吾爲君左袒.

笑者任滿國, 其實自難贗.

()의 성루에서 검을 겨룰 이 만난다면 나는 그대를 지지하리라

비웃는 자 나라에 가득해도, 그 실상은 절로 속이기 어려우리.

 

-交鋒:1.鋒刃相接謂雙方交戰

-좌단: 좌측 어깨의 맨살을 드러낸다는 뜻으로, 같은 편이 되어 생사를 같이 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사기9 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죽은 후 그의 아내 여후(呂后)가 권력을 쥐고 여씨 일족이 정권을 장악하였는데, 여후가 죽고 나서 그 일족인 여록(呂祿)ㆍ여산(呂産)이 난리를 일으키려고 하자, 태위(太尉) 주발(周勃)이 북군(北軍)에 들어가 명하기를, ”여씨를 위하는 자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유씨(劉氏)를 위하는 자는 왼쪽 어깨를 드러내라.爲呂氏右袒, 爲劉氏左袒.라고 하니, 군중이 모두 왼쪽 어깨를 벗었다는 고사가 있다.

 

下邑困桂玉, 危途飽憂歎.

寂寞同病客, 天涯歲將晏.

지방에 있을 때는 생활이 곤궁했고, 위태로운 길목에선 근심 걱정만 많았었네.

같은 병 함께 앓는 적막한 길손, 하늘 가에 올해도 저물어 가네.

 

-歲晏: 1.一年將盡的時候2.指人的暮年語本楚辭九歌山鬼》:留靈脩兮憺忘歸歲既晏兮孰華予

 

 

*이재영(李再榮, 1553~1623). 汝仁은 그의 자, 본관은 영천. 서얼 출신으로 임진왜란 중에 제정한 군공절목에 따라 참급(斬級) 군공으로 허통되어, 1599년 정시문과에 장원하였다. 출신문벌이 천한 사람은 비록 과거에 급제하여도 관직을 주지 않고 승문원의 한리학관으로 삼았는데, 그런 예에 따라 한리학관이 되었다. 1606년 회답사 여우길이 일본에 갈 때 이재영을 데리고 가려 하였으나, 사대문서의 작성에 능통한 이재영이 자리를 비우면 이를 전담할 사람이 없음을 이유로 승문원에서 반대하여 가지 못하였다. 1615년승문원교검에 이어 이듬해 봉상시주부가 되었는데, 허균의 익명서 사건에 본래 이재영이 허균의 문객으로 가까웠던 까닭에, 이재영이 글을 지었다는 제보로 곤경에 처하기도 하였다. 고양군수를 역임하고 1621년 원접사 이이첨의 제술관이 되었다. 병려(騈儷) 문장에 뛰어나 오랜 동안 명나라 사신이 오면 필찰(筆札)을 맡았다. 과거시험 때마다 남의 글을 대신 지어 주었으며, 특히 이이첨의 여러 아들을 부정하게 합격시킨 것이 이재영의 소행이었다 하여 인조반정 후 국문(鞫問)을 받다가 매맞아 죽었다.

계해정사록, 광해조일기, 기재사초, 연려실기술, 오주연문장전산고, 응천일록, 죽창한화(이덕형), 택당별집 17, 고대일록 등에 관련 기록이 나온다.

 

 

-桂玉: 喻昂貴的柴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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