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희, 許筠의 중국 문단과의 접촉과 詩選集 편찬 연구, 한국한시연구14, 한국한시학회, 2006.

 

*목차

1. 서론

2. 중국문인과의 문학 교류 양상

1) 명 문단의 최신 정보 입수: 중국문인과의 교류 연대기적 검토

2) 중국으로의 조선 詩文 전파

3. 중국 서적의 熱讀과 독자적 해석

1) 중국 서적의 입수와 熱讀

2) 중국 문학에 대한 독자적 이해

4. 조선의 詩選集 편찬과 조선시에 대한 자부심

5. 결론

 

*요점: 허균의 중국문학 수용과 조선 문학에 대한 관심이 일정한 관련을 지닌다. 역대 중국 시문에 대한 이해를 통해 독자적인 문학 평가 기준을 마련하고, 이로써 조선의 시문학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평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활동으로 국조시산, 학산초담, 성수시화 편찬) (구체적으로 중국 시문에 대한 이해의 요지가 무엇이었는지, 조선의 시문을 평가하는 기준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논의되지 않은 감이 든다. 자료의 부족으로 그것을 구체적으로 탐구하기 어려웠던 사정도 있을 것. 하여간 실제 논의 내용은 허균이 중국 문단과 접촉한 내력을 연대기적으로 정리하고, 어떤 책을 중시했고, 그 에 고무되어 편찬한 시선집의 목록을 정리해 보여주는 데 그쳤다는 느낌이 듦.어쨌거나 여기서 거론하는 책 이름은 그것대로 중요한 정보이므로 일독의 가치가 있음. 결론부에 17~18세기 문학사 조망도 리뷰할 대목.) 

 

*서론의 연구사 조망: 종전의 허균 연구는 홍길동전이 주종. 한문학 세계를 조명한 경우 대체로 개혁적 성향의 작품 세계, 불교와 도교 등 당시 이단으로 취급되던 사상에 대한 관심, 서얼 승려 기생 등 신분을 넘어선 교유, 제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성격에 초점을 맞춰 개성적 진보적 면모 조망.

-새로 주목: ‘중국 문학과 사상의 수용자로서의 면모에 관심을 보이는 연구: 복고파의 대표주자인 전후 칠자의 문학론, 원굉도나 진계유 등 만명 소품체, 이지의 양명 좌파. 선진 양한을 추숭하는 복고주의와 뒤의 둘은 매우 대척점에 놓이는데도 한 사람에게서 이 모든 경향이 발견되는 것은 특이한 일. 허균이라는 한 인물에게 여러 모순이 공존.

(복고파 수용과 만명 소품 및 양명좌파 사상 수용 간의 모순을 지적한 점은 주목할 만하나, 이 문제가 논문에서 다뤄지고 있지는 않음) 

-‘외부문화에 대한 관심자국 문화에 대한 이해’: 당대 최고의 중국 전문가, 중국 서적 수입, 열독, 다시 자기 나름의 중국 시문선집 편찬, 조선 시선집 편찬.

 

*문학교류

-‘사신활동접반사 활동’ ‘명군과의 교류’. 특히 주지번 접대가 중요.(왕세정, 중국의 공부법, 당대 명 문단의 스타에 대해 물음. 형산석각첩[문징명], 세설산보, 고척독, 시준을 받음, 주지번이 왕세정에게 경도된 문인임.), 1609년 감생 서명 접대 시 백낙천집 받음.

-중국으로의 조선 시문 전파: 한호의 글씨와 이정의 불화 등을 주지번에게 소개. 주지번이 양천세고 서문 지어줌. 1609년에는 난설헌집 선물(기유서행). 1597년 오명제의 조선시선 편찬에 기여. (1999년 북경도서관에서 발견, 기경부 교주, 1999, 박현규, 허경진의 2002년 논문과 최근 이대 박소영의 2015년 논문이 있음.)

 

*서적입수

-방법: 지인에게 빌리거나(황신에게 보낸 척독, 耳譚), 사신에게 부탁하여 중국에서 구해옴(사우재총설발), 사행에 참여하여 직접 구입(한정록범례). 동시대 저자들의 서적인 耳譚(명 왕동궤 찬), 유청일찰(留青日札)(田藝蘅, 1524~?) 등도 읽었음. (20, 상윤월정, 정미8)

 

-1613년 이전에 입수한 책: 공동집(이몽양), 대복집(하경명) (이상 권2 광록고, 1606); 서적공집(서정경), 창명집(이반룡), 엄주사부고(왕세정) (이상 권2 태복고 1607); 변황천집(변공), 사산인집(사진), 왕봉상집(왕세무), 서천목집(서중행), 오담추집(吳甔甀集 오국륜) (이상 권2 병한잡술 1609), 그 외로 서유록을 비롯한 소설 수십종(광해군 일기 61010, 7년 윤88, 8114. 허균이 공무를 핑계로 사온 책이라는 문제.)

 

-1613년 이후에 입수한 책(주로 1614,1615년 사행에서 사온 책, 한정록 인용 서목과 을병조천록을 참조): 오종선의 소창청기, 원굉도의 병화사와 상정, 이지의 분서와 장서, 진계유의 서화금탕.

 

-중국문학에 대한 독자적 이해: 허균의 문선집 및 시선집 편찬 작업 정리. (277~278) 그 의미인즉, 중국의 시선집을 자기식으로 정리하고 있다는 점. (자기 나름의 기준에 의해 정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허균의 자기 나름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규명할 수 없다. 편찬한 시선집의 실물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 그 중 당대와 명대 시선집이 주를 이룸. 성당시를 추종한 명대 전후칠자와의 영향관계를 짐작하게 한다. 특히 당시와 명시 선발의 중요 참고서가 이반룡의 고금시산 및 당시산. 허균 나름의 기준을 넣었다는 근거로, 허균의 <당시선서>(4)<고시선서>(4). “세상에 전하고자 함이 아니라 내가 홀로 얻은 바를 나타낸 것으로, 때로 이를 외워 그 법을 취하고자 함”, <구소문략발>(13), <송오가시초서>(4-조선 초부터 이어져 온 조선 문단의 전통, 즉 강서시파로부터의 영향 인정. 이 점은 왕세정 말년에 소식의 시문을 좋아한 점과 유관)

 

-조선의 시선집 편찬과 조선시에 대한 자부심

: 국조시산 편찬(조선시대 최고의 감식안을 지닌 시선집이라 평가됨), 허균 이전에 편찬된 청구풍아, 속청구풍아, 동문선, 속동문선, 시부, 선시 등을 일람한 후 거기 실린 시 중 자기 생각에 법도에 맞는 것만 취사한 것. 특히 국조라 하여 조선왕조의 시만 뽑은 것이 특기할 점.

-학산초담에서는 명대 문인 작품에 기력이 있음은 높이 평가, 그러나 학습을 통해 조선인도 도달할 수 있다고 봄. 아울러 동시대 조선시에 대한 자부심 표현. (“명나라 사람 중 문장으로 이름을 날린 십대가로는 공동 이헌길... 우리나라 김수온, 남지정, 김충암, 노소재의 문장은 명대 10인 중에 넣는다면 동심양이나 모녹문에 비겨도 크게 모자라지 않을 것” <학산초담>)

-주지번의 평가를 통해 일정한 잣대를 얻게 된 것 아닐까. (295). 조선을 중국의 연장선에서 이해한 양유년의 태도도 조선 문화에 대한 허균의 자부심에 중요 근거가 되었을 것. (13, 사동방록발) 국조시산 편찬에서 이반룡의 고금시산(고대부터 명나라까지의 시를 산정)이 중요.

-17세기 초는 조선 독자성이라는 인식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이전 시대. 조선의 한시문이 조선적특징을 추구하는 것은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징후가 나타나고, 18세기에 정점. 17세기 초는 중국 문학 수용이 활발한 시기, 특히 전후칠자 문학론이 크게 유행하여 성당시와 진한문 표절이 두드러짐. 허균은 그 중에서도 중국 문단 동향에 민감한 관심 있었던 사람임. 또한 동시에 중국 시문과 비교하여 조선 시문이 어느 정도 위치에 와 있는지 평가할 기준을 마련하게 된 것. 중국 문단의 시문만이 아닌 조선의 시문도 비평의 대상에 올려 놓기 시작. 조선의 한시문을 중국의 한시문과 같은 비교 대상으로 놓았던 허균의 사유가 시발점이 된 것.

 

*의미 있는 참고 논저

김홍대, 주지번의 병오사행(丙午使行)(1606)과 그의 서화 연구, 온지논총 11, 온지학회, 2003.

박수천, 허균의 시화비평 연구 -학산초담과 성수시화의 비교-, 한국한시연구 3, 한국한시학회, 1995.

祁慶富, 朝鮮詩選 校注前言, 아세아문화연구 3, 가천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1999.

박소영, 吳明濟朝鮮詩選硏究, 이화여대 석사학위논문, 2015. (오명제의 조선시선에 허균이 기여한 바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이야기)

 

*기타

곽미선, 허균의 중국 서적 입수와 역사적 의미, 한국고전연구 32, 한국고전연구학회, 2015.

(새롭게 밝힌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고, 같은 주제에 대한 기존 연구를 전혀 참조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가령 한정록의 인용 서목 중 빈도수에 대한 문제랄지, 371쪽, 전반부와 372쪽 이후에 나오는 얘기도 노경희 선생의 논문에서 이미 한 번 정리된 것임. 양명학 서적 독서에 관한 것도 이미 정길수 선생의 논문이 있음. 중국 서적이 허균의 사상과 조선 문단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얘기.

다만 368쪽에 申昉(1685~1736)이 시화집 편찬시에 허균이 허난설헌의 시를 많이 수록한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언급한 것, 그것이 후대 조선 문인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는 것에 대한 사실 보고는 새롭게 알게 된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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