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관, 「공안파에 대한 최초의 인지-허균(許筠)」, 공안파와 조선 후기 한문학, 소명출판, 2007, 65~83.

 

-요점: 허균에게서 이탁오와 원굉도의 영향은 찾을 수 없다. 현전본 성소부부고는 1611년까지의 시문만을 수록하고 있기 때문에 설사 영향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 상관성을 짐작할 근거는 남아있지 않다.

 

-근거: 한정록에 인용된 이탁오의 분서와 원굉도의 觴政, 甁花史 중 원굉도의 저술은 원굉도 문집을 보았다기보다 오종선의 『소창청기』의 것을 전재했을 가능성이 크다. (한영규, 「‘閑寂’의 선망과 『閒情錄』」, 『문헌과해석』 19, 여름, 172~173쪽.) 또 허균이 한정록에 인용하고 있는 『분서』 내용(잠에 대한 예찬)은 이지의 분서에는 나오지 않으며, 이 인용도 소창청기에서 왔을 가능성이 높다. 허균이 이지의 분서를 처음 접한 것은 1615년 북경에서의 일일 것.(을병조천록의 「독이씨분서」)

 

-대안적 방향: ① 허균 저작에 나타나는 왕양명이나 이탁오, 원굉도는 허균과 그다지 상관이 없다(76쪽). 대신 허균의 사유에 있어서 주자학에 대한 비판, 주자학으로부터의 이탈이 도출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으로 바뀌어야 한다. 유명종·임형택 교수의 논의는 모두 허균에게서 ‘근대’를 읽어내고자 했던 의식의 산물로 그다지 근거가 없다.

② 전통 시기 허균에 대한 상(象): 허균과 서위·원굉도 간의 유사성에 주목했던 이덕무의 경우가 있음. (『청장관전서』 권51, 「이목구심서」4, “我國自羅麗以來。局於聞見。雖有逸才。只蹈襲一套其。自謂文章絶不可見。惟許端甫。創出新論。若徐袁輩奇哉。”; 그 근거로 허균이 최립에게 보낸 척독 인용 “世人不知文者。誤卑公詩。此太憒憒(聵聵)。公文雖悍杰。亦從班掾孟黎中來也。詩則本無師承自創爲格意淵語傑非切摩聲律採掇花卉者所可企及。吾以公詩爲勝於文。未知公印可否云。”) 여기서 이덕무는 허균과 원굉도 간 유사성이 있다고 한 것이지 영향관계를 말한 것이 아님;

이식도 영향관계를 말한 것이 아니라 유사성이 있다고만 했음. 「示兒代筆」 (택당집 별집 권15)에서 王守仁弟子。講道於江湖間。一再傳而入於盜賊。有顏山農者。聚徒講書。以一欲字。爲法門宗旨。從者數百人。有何心隱者。以一殺字。爲宗旨。皆以師門自處。而行殺越之事。連結南蠻。將作變而被誅。 許筠聰明有文才。以父兄子弟。發迹有名。而專無行檢。居母喪。食肉狎娼。有不可掩。以此不得爲淸官。遂博觀仙佛書。自謂有所得。自此尤無忌憚。晩以締結元兇。官至參贊。竟謀大逆誅死。其人事不足汚口 顧嘗聞其言曰。男女情欲天也。倫紀分別。聖人之敎也。天且高聖人一等。我則從天而不敢從聖人。其徒誦其言。以爲至論。此固異端邪說之極致。非筠始言之。老,莊,佛之書。皆有其意。陸象山,王陽明。雖藏機不露。但熟觀其書。則自有一脈透漏處。流於山農。許筠之所爲。特未達一間。可懼哉) 안산농은 문집이 없다. 하심은의 『찬동집(爨桐集)』은 1625년에야 정리되었으나 거의 보급되지 않았다고 함(배영동, 『명말청초사상』, 민음사, 1992, 109쪽)

 

③ 허균은 의고파 이론가였던 왕세정에 대한 비판 의식은 전혀 없다. 고로 허균 문학관에서 반의고적 성격이나 독창성을 끄집어 내려는 주장은 근대를 찾아내려는 의도적 발췌의 결과일 뿐. (허균이 개성존중, 반의고주의적 성향이 있다는 주장에 자주 거론 되는 자료 셋: 「明四家詩選序」, “明人作詩者。輒曰吾盛唐也。吾李杜也。吾六朝也。吾漢魏也。自相標榜。皆以爲可主文盟。以余觀之或剽其語或襲其意俱不免屋下架屋而誇以自大。其不幾於夜郞王耶” 「歐蘇文略跋」, “文章各有其味。人有嘗內廚禁臠豹胎熊踏。自以爲盡天下之味。遂癈黍稷膾炙而不之食。如此則不餓死者幾希矣。此奚異宗先秦盛漢而薄歐蘇之人耶” 「與李蓀谷(己酉四月)」, “吾則懼其似唐似宋。而欲人曰許子之詩也。毋乃濫乎”)

 

-기타

야랑왕(夜郞王): 자신의 능력과 분수도 모른 채 자존망대(自尊妄大)하며 설쳐대는 사람을 말한다. 한(漢) 나라 때 남쪽 야만족인 자그마한 야랑국(夜郞國)의 왕이 한 나라 황제와 자신을 견주면서 뻐겼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史記 西南夷列傳》 (왕세정의 글에도 ‘야랑왕’이 나오는 것을 계곡만필 2권에 인용해 놓았음)

 

-소감: 선행연구 비판과 그 근거에는 상당히 타당성이 있음을 인정하나, 왕세정을 '의고파'로 라벨링한 위에, 허균이 왕세정을 혹애했다고 하여 허균에게 의고파적 성향이 있다고 보는 것은 의문스럽다. 허균이 왕세정을 '의고파'로 봤을 것인가. 게다가 왕세정은 전 생애에 걸쳐 의고를 비롯한 문학 창작 방법에 대해 의견이 바꾸어 갔던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허균이 의고파에 경도되었다는 주장이 본격적으로 제기되지 않지만, 다른 논문(허균과 명대문학)에서 본격 개진되고 있음.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차트에서 상론하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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