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서 지역에는 누대가 많은데 강가에 있거나(濱江) 산에 의지하고 있어 중국 사신(天人)이 연로에 감상하니 『황화집』에 휘황찬란하게 기록된 정자들이 고을마다 있다. 그런데 궁벽되어 고요하고 소슬하여 세속을 훌쩍 벗어난 형상을 하고 있는 곳으로는 오직 성천 강선루가 으뜸이다. 이 누대의 주인이 되는 자는 필시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다가 옥당서와 금마문을 떠나 이곳에 왔기에 '강선(降仙)'이라 불렀을 것이다. 또 강산이 매우 절경이라 노을을 먹으며 날개옷을 입은 신선이나 거처하기에 마땅하므로 '강선'이라 불렀을 것이다.  만력 38년 (1610, 광해군2)에 나의 이종사촌 형님(表兄)인 홍준(洪遵) 사고(師古)가 성천을 다스리게 되었다. 홍 군은 두 조정에서 시종신이었는데 외직으로 나아가 이 누대의 주인이 되었으니, 마치 옥황 상제의 향안을 받들던 관리가 『황정경』의 글자 하나를 잘못 읽어 귀양 왔지만 여전히 봉래산의 도관(道觀)에서 떠나지 않은 것과 같다. 홍 군을 위로하는 자들은 모두 말하기를,

 

  "홍 군은 하늘을 날아야 할 사람인데 땅으로 내려와 누대에 머물게 되었구나. 누대가 비록 승경이지만 땅으로 내려왔으니 어찌하랴." 

하였다.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아니다. 옛날 임진년에 삼도(三都)가 모두 전란에 휩싸였을 때 유독 이 곳만은 오롯이 해를 입지 않았다. 그때 학이 끄는 수레가 하늘에서 내려와 우리나라가 중흥하는 기틀을 열었다. 임금이 이 지역을 왕업을 일으킬 만한 곳으로 여겼으니 시종신이 아니면 처할 수 없고, 누대의 이름을 '강선'이라 지었으니 평범한 사람이 편안히 여길 바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 형님에게 명이 이른 것이로다. 예전에 내가 관서 지역의 어사로 나와 이름난 누대를 두루 돌아보았지만, 유독 이 누대가 궁벽하여 고요하고 소슬한 것을 사랑하여 이 누대에 오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당시 '강선'이란 호칭이 마침 내 신세와 맞았다. 그래서 일찍이 파촉(巴蜀)의 무협(巫峽), 사천(四川)의 누강(漏江), 무산십이봉의 안개, 양대에서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되는 광경 등을 모두 나의 금낭(錦囊) 안에 담아둔 것을 스스로 자랑하였는데, 수십 년 후에 나의 묵은 자취를 밟는 자가 다시 우리 집안에서 나올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러하니 신선의 명부에 이름을 올린 것이 비록 형님보다 아우가 먼저였지만, 화려한 누대의 주인이 되어 강산을 마음대로 즐기는 데 있어선 오늘날 우리 형님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이에 군자가 듣고서 노래하기를,

 

높은 누대에 신선이 내려오니

쟁그랑 패옥 소리 옥녀의 모습이네

신선을 따라 내려왔지만

이 누대엔 오래 있지 않으리

천상에 누대가 있으니 

그곳에서 뭇 신선들과 노닐 것이네

 

하였다. 그러자 사고가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하기를,

  "이 누대가 이와 같은 말을 얻었으니, 비록 중국 사신이 감상하고서 『황화집』에 기록하더라도 이보다 훌륭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고는 급히 공인(工人)에게 명하여 이 글을 현판에 새기도록 하였다. 

 

*출전: 권진옥 김홍백 역, 국역 어우집, 학지원, 2016, 220-222.


*이 글은 평안도 성천에 있는 강선루에 대해 쓴 기문이다. 

*어휘의 중의성: 중국 사신(天人)을 가리키는 '天人'이란 말에는 신선이라는 뜻도 있음. 

*명사형 어구를 한국어로 풀 때 서술어형으로 푸는 것이 맞다

 예) 원문: "備天人沿塗之賞" → 중국 사신이 연로에서 감상하니 (연로: 큰 도로 좌우에 연하여 있는 곳)

*輝耀: v. 밝게 비추다, 눈부시게 비추다(照耀). 반짝이며 빛나다(閃耀)

*邑有之: (앞 구를 목적어로 받아서) 고을 마다 있다. 

*僻靜: 외지다, 궁벽하다

 예문) 如人當紛爭之際自去僻靜處坐任其如何彼之利害長短一一都冷看破了朱子語類》 120. (마치 사람이 마땅히 분분히 다투는 때에는 스스로 거기를 떠나 조용한 곳에 가서 앉아서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저 사람의 이해와 장단점이 무엇인지를 하나하나 모두 냉정히 살펴서 파악해야 하는 것과 같다.) 

*蕭瑟(소슬): (국어사전에도 등재된 단어, '소슬하다': 으스스하고 적막하다)

*'세속을 훌쩍 벗어난 형상'을 한문으로 표현하면? 出塵拔世之象

*생략: '임금'이라는 목적어를 생략했지만, 문맥상 넣어서 해석해야 하는 경우 → "繇左右邇列"

*홍준(洪遵, 1557~1616): 1590년 문과 급제. 형조참판으로 있을 때 동지절진하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적이 있다. 남양 홍씨. 이정귀가 묘갈명을 쓴 것이 국조 인물고에 실려 있다. 유몽인의 어머니는 참봉 민의()의 딸이다.

*시종신: 帷幄臣. 帷幄은 황제의 metonym쯤 된다. (황제가 거하는 곳에 장막을 쳤기 때문에 황제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고 함.)

*'향안리'라는 단어를 알아 놓자. 원진의 시에 “나는 옥황의 향안리(香案吏)이니 인간에 귀양살이 왔어도 오히려 소봉래(小蓬萊)에 와 사네.[我是玉皇香案吏 謫居猶得住蓬萊]”라는 구절이 있다.

[번역서 원주 101: 원진(元稹)의 시에 <이주택과어낙천(以州宅誇於樂天)> 시에 "나는 원래 옥황 상제의 향안을 받들던 관리인데, 귀양 와서도 봉래산에 머물 수 있었네. (我是玉皇香案吏,謫居猶得住蓬萊。)라고 하였다. 元氏長慶集 卷 22》 또한 천사에 사는 사람이 도가의 경전인 《황정경》을 정밀하게 읽지 못하면 인간 세계로 귀양을 가게 되는데, 소식의 <부용성> 시에 "왔다 갔다 삼세 동안 공연히 육신을 단련하다 결국은 《황정경》을 잘못 읽는 죄를 짓고 말았구나 (往來三世空鍊形 竟坐誤讀黃庭經)" 하였다.]

(1월 9일. 10:300


(내일 이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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