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부 남쪽에 큰 하천이 있고, 하천 남쪽에는 별연사가 있다. 별연사 뒤쪽 산봉우리는 연화봉이라고 하는데, 고로(古老)들이 "주원공(周元公)의 어머니 연화부인이 여기 살았기 때문에 봉우리 명을 연화봉이라 하게 되었으며, 별연사는 그 고택"이라고 했다. 별연사 앞에는 석지(石池)가 있는데 석지의 이름은 '양어(養魚)'였다. 고로들이 또 그에 관해 말하길, "명주(溟州) 시절에 어떤 서생이 이 곳에 공부하러 왔다가, 그 집안 처녀와 혼약을 맺었는데, 처녀의 부모가 이런 사정을 알지 못하고 처녀를 시집보내고자 했다. 처녀는 석지 가운데에 편지를 던졌는데, 크기 한 척쯤 되는 잉어가 그 편지를 서생에게 전해 주어, 인연을 맺을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여지(輿地)를 기록한 자가 이 이야기를 믿어서, 고적(古迹)에 실었고, 주석을 내기를(箋曰), "혹은 그 서생이 동원(東原) 함부림(咸傅霖, 1360~1410)이라고 한다."고 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속으로 의심하였다. 산봉우리를 이미 연화부인의 이름으로 명명했으니, 별연사는 부인의 집임이 분명하다. 별연사는 신라 때에 세운 것이니, 강릉부(府)는 아직 동원경(東原京)에 속해 있었을 터이니 어떻게 "명주(溟州)"라고 할 수 있겠으며, 또 사찰 가운데 어떻게 사람이 처녀를 데리고 거처할 수 있었겠는가? 하물며 함공(함부림)은 국초의 공신으로, 원래 강원부 호적에 속한 사람이니, 그 역시 어떻게 고려 초 명주 시절에 이런 일을 봤을 수 있겠으며, '여기에 공부하러 왔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 무방한 단서가 하나가 아니고, 와전된 내용이 전해져서 또 와전되고 있으니, 옛 일을 널리 고찰하여 그 미혹된 내용을 깨뜨리지 못함이 한스러웠다.
병신년(1596년) 봄에 한강 정구(1543~1620) 선생이 방백(관찰사)으로서 순행하다가 평창군에 이르렀다. 평창군은 이곳이 동원경이던 시절 강릉부에 속해 있었다. 그래서 평창군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강릉부 시절의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정구 선생이 옛 기록들에 관해 자세히 물어 수리(首吏)에게 고기(古記)를 얻어서는 나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비로소 부사(府事) 이거인(李居仁)이 지은 글이 매우 많고 그 가운데 실린 연화부인의 일이 매우 상세함을 알게 되었다. 이거인이 쓴 연화부인에 관한 일은 다음과 같다.
신라 때 명주는 동원경이었다. 그래서 유후(留後)의 관직은 반드시 왕자나 종친, 장상(將相)이나 대신이 맡고, 모든 일에 있어 편의대로 인사 고과를 했다. 명주에 예속된 군현 중에 왕제(王弟) 무월랑이라는 사람이 있어 젊은 시절에 발령을 받아 이곳(동원경)에 온 적이 있었다. 유후의 임무는 보좌관들에게 대신 처리하게 하고, 무월랑은 화랑도를 이끌고 산수를 유람하여 놀았다.
하루는 혼자서 이른바 '연화봉'이란 곳에 올랐는데, 외모가 매우 아름다운 어떤 처녀가 석지(石池)에서 옷을 빨고 있었다. 무월랑이 즐거워서 그녀를 유혹하자 처녀가 말했다. "첩은 사족(士族)이에요. 예를 갖추지 않고 혼인할 수 없으니, 당신이 아직 혼인하지 않았다면 혼약을 하고서 육례를 갖춰서 저를 맞아가도 늦지 않을 거에요. 제가 이미 당신에게 몸을 허락했으니, 다른 곳에 시집가지 않을 것을 맹세할게요." 무월랑이 승낙하고는 이때로부터 안부를 묻고 선물을 보내기를 그치지 않았다.
무월랑의 임기가 차서 계림(경주)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반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처녀의 아버지는 처녀를 북평 가인(家人)의 아들에게 시집 보내려고 하여 이미 날짜를 받아 놓았다. 부인(처녀)은 감히 부모에게 사실을 말씀드리지 못하고 속으로만 걱정하고 있다가 죽기로 마음을 정했다.
하루는 석지 곁에서 옛 맹세를 생각하면서, 석지 가운데에서 기르던 금 잉어에게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한 쌍의 잉어가 편지를 전해주었다(雙鯉傳書)'는 말이 있는데, 네가 나의 보살핌을 받은 일이 많았으니, 나의 뜻을 무월랑에게 전해주지 않을래?'" 그러자 반척쯤 되는 금 잉어가 석지에서 뛰어 올라 입을 벌리는 모양이 마치 그렇게 하겠다고 하는 듯 했다. 부인(처녀)이 기이하게 여기고는 저고리 소매를 찢어 이렇게 편지를 썼다. "첩은 감히 약속을 어기지 않았으나 부모의 명을 어길 수 없게 되었어요. 낭께서 우호의 맹세를 저버리지 않으신다면 아무 날까지 여기 오시면 괜찮겠지만, 그렇게 못하신다면 저는 응당 자진하여 낭을 따르겠어요." 그리고는 그 편지를 물고기 입에 넣고 물고기를 큰 하천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유유히 멀어져갔다.
그 다음날 새벽, 무월랑이 아전을 알천에 보내어 물고기를 잡아오게 했다. 관원이 횟감 생선을 찾다가 한 척짜리 금 잉어가 갈대 사이에 있는 것을 보았다. 관원이 이 잉어를 무월랑에게 보여주자, 잉어가 펄쩍 뛰면서 흔들어대는 모습이 마치 호소할 내용이 있는 것 같았다. 잠시동안 거품과 침을 토하면서 헐떡거리는데 물고기 입안에 비단 편지가 있기에 이상하게 여겨 읽어보았더니, 바로 부인(처녀)이 손수 쓴 필적이었다. 무월랑이 즉시 그 편지와 잉어를 들고 왕에게 고하자, 왕이 크게 기이하게 여기고, 잉어를 궁궐의 연못에 풀어주고는 급히 대신 한 명을 명하여 색깔 있는 비단을 갖추어 무월랑과 함께 빨리 달려 동경(東京)에 가게 했다. 이들은 이틀 거리를 하루에 달려서 겨우 기한에 맞추었다. 가보니 유후 이하 여러 관원들과 주(州)의 부로들이 모두 모였고 매우 성대하게 장막을 치고 잔칫자리를 펼쳐 놓고 있었다. 문지기가 무월랑이 온 것을 이상하게 여겨 큰 소리로 전달하기를, "무월랑이 왔습니다."고 했다. 유후가 나와 맞으니 대신이 따라 들어가서 마침내 (잔치의) 주인에게 사정을 갖추어 고했다. 북평랑은 이미 대창(大昌)에 도착했으나 급히 사람을 시켜 그만 오도록 했다.
부인(처녀)이 혼인 날 하루 전부터 병을 핑계대어 빗질도 하지 않고, 어머니가 강요해도 듣지 않아 꾸지람을 막 듣던 참이었는데, 무월랑이 온다는 말을 듣고는 돌연히 일어나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리하여 혼인을 맺으니(克諧秦晉之好) 온 강릉부(府) 사람들이 놀라고 신비롭게(神) 여겼다.
부인은 아들 둘을 낳았으니, 장자는 주원공이고 막내는 경신왕(敬信王)이다. 이때 바야흐로 신라 왕이 죽었는데 후계자가 없었다. 국인(國人)들이 모두 주원공에게 기대를 모으고 있었는데, 그 날에 큰 비가 와서 알천이 순식간에 크게 불어났다. 주원공은 이때 알천 북쪽에 있었는데 3일간 알천을 건너지 못했다. 재상이 '이는 하늘이 그리한 것이다'라 하고 마침내 경신을 왕으로 세웠고 주원공은 마땅히 왕이 되어야 했으나 되지 못했기에 강릉에 봉(封)하고 주변 6개 읍으로 봉(奉)하고는 명원군(溟原郡)이라 했다. 왕부인은 주원공에게 봉양을 받았으며, 자기 집을 사찰(招提)로 만들었다. 경신왕은 1년에 한 번씩 와서 문안했다. 4대 후에 나라에서 이곳을 명주(溟州)에 제수했다. 그리고는 신라가 망했다.
내가 이 글을 보고 비로소 양어지의 고사를 모두 알게 되었으니, 마치 구름이 걷히고 해를 보는 듯 했다. 또한 강릉부 고로들의 소홀함과 지리지를 편찬한 자의 보잘것없음을 알았다. 나의 돌아가신 어머니는 바로 주원공의 후예이니, 그렇다면 연화 부인은 또한 나의 선조가 되는 것이다. 어찌 감히 오랫동안 다른 사람의 이름을 더하여 나의 근원을 혼탁하게 둘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기록을 갖추어 강릉부의 기록을 삼는다.
*원문(성소부부고 권7)
鼈淵寺古迹記(권7, 문부4)
江陵府之南有大川, 川之南有鼈淵寺. 寺之後岡爲蓮花峯, 故老傳周元公之母蓮花夫人居于此, 故以名峯, 而寺卽其故宅也. 寺之前有石池, 名曰養魚. 故老又言溟州時, 有書生游學于此, 與室女有約, 其父母不知而將嫁之, 女以書投池中, 尺鯉致于生, 得諧其緣. 志輿地者信之, 載諸古迹, 箋曰, 或云咸東原傳霖也. 余竊疑之. 峯旣以夫人名名之, 則寺之爲夫人家明矣, 寺構於新羅, 則府尙爲東原京, 安得曰溟州, 而寺之中, 安有人率室女而居者乎? 況咸公國初功臣, 原係府籍人, 亦安能及見麗初溟州時, 而稱之曰游學到此耶? 其誣罔之端不一, 而訛以傳訛, 恨不得博攷掌故, 以破其惑也.
歲丙申春, 寒岡鄭先生以方伯巡到平昌郡, 郡在東原京時屬于府, 故郡人至今有言府之事者, 先生詢問故牒, 得古記於其首吏, 來示. 余乃知府事李居仁所述文甚多, 其中載蓮花夫人事甚詳曰:
新羅時, 溟州爲東原京, 故留後官必以王子若宗戚將相大臣爲之, 而凡事便宜行黜陟, 所其隷郡縣有王弟無月郞者, 幼年來領其任. 留務聽佐貳者代理, 而率花郞徒, 游戲於山水間. 一日獨登於所謂蓮花峯, 有處子貌甚殊, 浣衣於石池, 郞悅而挑之, 處子曰: “妾, 士族也. 不可以奔, 郞若未婚, 可行婚約, 而六禮迎之未晩矣. 妾已許身於郞, 誓不他從也.” 郞許之, 自是問遺不絶,
瓜滿, 郞歸鷄林, 半載無耗. 其父將嫁諸北坪家人子, 已卜日矣. 夫人不敢白父母而心竊憂, 以死自定. 一日, 臨池想舊誓, 語池中所養金鯉曰: “古有雙鯉傳書之言, 你受吾養多矣. 不可致吾意郞所否.” 忽有尺半金鯉, 跳出池側, 口呀呷似有諾者, 夫人異之, 裂衫袖書曰: “妾不敢背約, 而父母之命, 將不得違. 郞若不棄盟好, 趁某日至, 則猶可及已. 不然則妾當自盡以從郞也.” 納之魚口中, 持以投大川, 鯉悠然而逝.
其翌曉, 無月郞送吏於閼川捉魚, 官索膾魚, 有金尺鯉在葦間, 官以似郞, 鯉挑擲振迅, 若有訴者, 俄吐沫涎升許, 中有素書. 異而讀之, 乃夫人手迹. 郞卽携書及鯉, 告于王, 王大異之, 放鯉于宮池, 亟命一員大臣具彩帛, 偕郞馳往東京, 卽倍日幷行, 僅及其期. 至則留後以下諸官州父老皆會, 帟幕盤筵甚盛, 守門吏怪郞來, 傳叫曰: “無月郞至矣.” 留後官出迓, 則大臣從焉, 遂告以具主人. 北坪郞已至大昌, 急人止之. 夫人先一日稱疾不梳洗, 母抑之不聽, 譴誨方至. 聞郞之來, 倏起理粧, 改服以出, 克諧秦晉之好, 一府人皆驚以爲神也.
夫人生二男, 長卽周元公, 季卽敬信王也. 方羅王之殂, 無嗣. 國人皆屬望周元, 其日大雨水, 閼川卒漲, 周元在川北, 不得渡三日, 國相曰天也. 遂立敬信, 以周元之當立不立, 封于江陵, 環六邑以奉之, 爲溟原郡王. 夫人就養于周元, 以其家爲招提, 王一年一來省焉. 四代國除, 爲溟州而新羅亡焉.
余覩此, 始悉養魚池故事, 若披雲見日, 益知府故老之簡, 而撰輿地者之陋也. 余先妣乃周元之裔, 則夫人亦余之祖先也. 其敢久加以他人名而溷辱吾所自出乎? 因備記, 以爲府之掌故云.
*관련논문 목록
박혜숙, 「‘명주가’와 관련한 몇 가지 문제」, 인제논총 9권 2호, 인제대, 1993.
이지영, 「「성소부부고」에 나타난 허균의 민간전승에 대한 관심과 그 의의」, 고전문학연구 118, 한국고전문학회, 2000.
박희병, 「한국고전소설의 발생 및 발전단계를 둘러싼 몇몇 문제에 대하여」, 관악어문연구 17,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1992.
박희병, 「한국한문소설개관」, 한국고전소설 연구의 방법적 지평, 알렙, 2019, 53~90쪽. (원 게재처: 박희병 표점·교석, 한국한문소설 교합구해, 소명출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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