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점
→출세를 못한 것은 인과응보
→선도에 통달
→음률을 아는 사람
#어우야담 내 정렴 관련 기사
*56. 주인의 원수를 갚은 유인숙의 계집종 (121-122)
유인숙은 역적의 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었다. 그의 노비를 몰수하여 공신의 집에 내려주는데, 당시 정순붕의 공훈이 가장 컸기 때문에 유인숙 집안의 노비 가운데 대다수가 그에게 사패(賜牌)로 귀속되었다. (...)정순붕의 두 아들 정렴과 정작은 모두 뛰어난 재주를 지녔으나 당시 세상에 나아가 벼슬할 뜻이 없어 도석(道釋)의 무리 속에서 방탄하게 지내며 몸을 감춘 채 세상을 마쳤다. 이 어찌 아비가 사림(士林)을 없애면서 지은 커다란 악행 탓이 아니겠는가? 비록 효자의 마음이 무궁할지라도 도저히 씻어낼 수 없는지라, 드디어 수치스러움에 울분을 가슴에 품은 채 끝내 불우하게 지내다 죽은 것이리라. 그 뜻 또한 슬프다 하겠다.
*89 선도에 통달한 정렴과 정작 (174-178)
내가 참판 성수익 선생이 지은 <삼현주옥>을 살펴보니 북창 정렴 선생은 세상사 물욕을 벗어난 신인이었다. 유가·도가·불가 및 기예와 잡술 등 모든 것을 배우지 않고도 능통했다. 일찍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통하는 석가의 법에 대해 문호를 터득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더니 산에 들어가 정관(精觀)한 지 3,4일만에 문득 환히 돈오하였다. 산 아래 백 리 밖의 일도 능히 알아냈는데, 부절을 합한 것처럼 꼭 들어 맞아 백의 하나도 어긋남이 없었다.
정렴은 부친을 따라 중국에 가서 유구국 사신을 만났는데 그 또한 이인이었다. (...) 북창이 유구국 말에 능통해서 통역하는 사람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대개 배우지 않고도 능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렴은 늘 한 방에 거처하면서 단약을 만드는 데 공력을 들이고 있었다. (...) 불행히도 일찍 죽어 향년이 44세였다. 그가 스스로 지은 만가는 다음과 같다. (...)
북창 정렴은 고상한 선비로 정순붕의 아들인데, 음양을 비롯하여 의약과 여러 술법에 두루 정통했다. (...) 임진란이 일어났을 때 홍성민은 관서關西(평안도)의 행재소에 있었는데, 그는 항상 정렴의 선견지명을 칭송하였다.
(-삼현주옥에 관해서는, 장유 <계곡집> 6, <북창고옥 양선생 시집서> 참고. 약간 다름.)
(-유구국 방문에 관해서는, 허목, <미수기언> 11, 원집 중편, <청사열전> <정북창>을 참고.)
(-기타: 조익, <포저집> 27, 《북창고옥집(北窓古玉集)》 발문 참조. 이행의 용재집에도 관련 기록이 있다고 하나 확인하지 못하였음)
*205 정렴과 정작의 중양절 시
북창 정렴이 구월하순 경에 만국晩菊을 읊었다.
(...) 전에 조정에서 관아를 설치해 우리나라의 시를 뽑았는데, 이때 정렴과 정작의 이 시에 대해 말한 이가 있었다. 대제학 유근이 정작의 시를 취하고 정렴의 시는 버리면서 시율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아! 정렴은 음률을 잘 아는 사람인데, 유근만큼 음률을 알지 못한다고 할 수 있으랴. 그러므로 예로부터 지음을 얻기란 어려운 것이다.
*#289 음률에 정통한 정렴
북창 선생 정렴은 음률을 알았다. (...)
정렴은 산사에 거쳐하면서 병풍을 여러 겹 쳐 놓고, 세수하고 빗질하는 것도 폐한 채 지게문 밖을 엿보지도 않고 종일토록 묵묵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 때 절에 있는 한 중이 와서 문안을 드리자 정렴이 말했다.
"오늘 우리 집 종이 술병을 가지고 올 것이오."
조금 있다가 놀라며 말했다.
"애석하구려. 오늘은 마실 수가 없게 되었소."
잠시 후 종이 집에서 이르러 말했다.
"오늘 술병을 지고 오다가 고개에서 바위에 넘어져 깨뜨렸습니다."
*출전: 신익철 외 역 <어우야담>, 돌베개,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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