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친구에게 선물로 이 책을 선물 받았다. 모처럼 선물 받은 책에 대해서 이런 말을 하게 되는 것은 유감이지만, 나로서는 그 소설에 대해 그다지 좋은 인상은 받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 소설이 시장에서 많이 팔린다는 점에 대해서도 개탄하게 된다. 도대체 어떤 점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일으키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이 소설에 대해서 나처럼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은 정말로 없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든다. 누가 보고 악플이라도 달면 읽고 괴롭겠지만, 누가 볼까 싶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래도 누군가는 내 생각과 같은 사람이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아니면 적어도 나 혼자 미친놈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겠지.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읽으면서 궁금하기도 해서 생각을 정리할 겸 적어보기로 했다. 꼽아보니 못마땅한 점이 세 가지 쯤 되는 것 같다. 그 중 두 가지는 남들에게도 물어보고 싶은 것이고 한 가지는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의 발로다. 일단 지금 당장은 대략 그렇게 생각이 된다.
1. 기성세대의 가치관 흡수: 기존 평 및 소설 서술에 대한 이견
나는 소설 책 말미에 붙은 평론가 나리의 글을 읽을 때까지 이 책에 실린 소설이 실패의 연속이라고 생각은 안 해봤다. 소설을 한참 읽다가 잘 읽히지 않아서 뒤로 가서 평 써놓은 걸 보고서야, 아 등장인물들을 '실패한 자들'로 카테고라이즈 할 수 있겠구나 하고 비로소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이 책을 선물로 준 친구가 쓴 글에서도 '실패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의 의미'가 핵심 테마였다는 것이 비로소 다시금 생각이 났다. 요지인즉, 소설을 읽는 동안에는 주인공들이 실패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고 머리 속에 개념화가 안 되고 있었고, 평을 읽은 후 '그렇게도 읽을 수 있겠구나' 싶었지만, 그것이 이 인물들을 설명하는 내 어렴풋한 잔상에 윤곽을 주는 그런 평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적어도 나에게는. 표제작인 <알려지지 않은..>의 경우 실패한 인물에 포커스가 주어지는 것처럼 읽힐 수도 있겠다 싶지만 <중국산 모조 비아그라..>나 <패리스..> <부산국제영화제>까지 읽을 때만 하더라도 주인공들은 그냥 남루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젊은 사람들일 뿐, 이 소설들을 평론가들 풍으로 말해서 '실패서사'로 묶는다는 게 사리에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실패'란 말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어떤 인물에게 목표(goal)라는 것이 있고 그것의 획득이나 성취가 좌절되는 것을 실패라고 부르는 게 상식적인 정의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볼 때 이 사람들에게는 애초에 목표 같은 것은 없었던 것 같다. 그냥 이들은 사회적으로 번듯한 직업을 갖지 못했고, '영화감독'이라는 타이틀과 그에 따르는 수입, 명성을 갖지 못했고, 자신들의 성생활이 사회적으로 인정 받지 못하고 있고, 그런 것 아닌가? 이러한 삶을 '실패'라고 부르는 어법이 성립하려면, 이들이 갖지 못한 것, (직업, 명성, 성적 취향에 대한 사회적 인정 등)들이 애초에 이들에게 '목표'였다는, 혹은 이들이 (스스로 자각은 못했으나) 추구했던 것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들이 정말로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전부터 알았고 그런 다음에 그걸 얻는데 실패했나? 내가 볼 땐 아니다. 내 보기엔, 그런 대상들은 이 인물들이 딱히 애초에 가지려는 열망도 별로 없었고 정작 그걸 놓친 시점에는 별 일도 아니다가, 나중에 어느 계기에 의해 뒤돌아보니까 그걸 못 가져서 불편한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 것들에 불과하다.
달리말해 박상영 소설에서 보여주는 것은, 실패한 인물이라기보다는, 어느날 갑자기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니 너절한 현실을 보게 된 인물들 아닌가? 과거에 뭔가를 못 이뤘다거나 뭘 못 가졌다고 했을 때 이 인물들이 못 갖게 된 것들을 애초에 그 인물들이 '자신의' 판단에 입각해서 추구한 적이 있다고 볼만한 textual evidence가 있나? 나는 발견 못했다. 가령 연예인 연습생이 된다거나, 화가가 된다거나, 무용수가 된다거나 영화감독이 된다거나 하는 것은 모두 기존 사회 질서 내에 확립되어 있는 '목표-수련'의 세트이고, 기본적으로 기성세대에 의해 주어진 '사회의 질서'랄까, 사물의 질서랄까, 하는 것이다. 그게 못 되었다고 해서 그걸 '실패'라고 부른다는 것은 역시 기존 질서를 승인한 위에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 점에서 이 소설을 실패 서사라는 듯이 말하는 어법이 좀 불편했다. 애초에 왜 주어진 사물의 체계 (영화감독이 된다, 연예인이 된다)에 대해 어떠한 자의식 없이 묵종하고 나서, 그게 잘 안 되고 나니까 '애초에 아무것도 아니었고 현재도 미래에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류의 독백을 뇌까리는데, 뭐랄까 내 보기엔 응석같이 느껴졌다. 정말로 응석이면 귀엽기라도 하지.
소설평 뿐 아니라 소설의 서술 내에도 '동성애자/이성애자' 이분법에 입각한 서술이라든가, '성소수자를 대상화'한다는 이디엄이 나오는데, 그런 대목을 읽을 때 느낀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만한 단어가 '오그라든다' 밖에 없는게 정말 유감이다. 기본적으로 소설이든 연극이든 언어로 된 예술형식은 예술가 본인의 머리 속에 들어 있는 미정형의 아이디어에 '문법'이라는 체계로 조직화된 언어라는 질서를 입혀서 '정형화' 시키고, 그럼으로써 결과적으로 '대상화' 시켜서 음미하는 데 핵심이 있는 것 같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게 보면 '대상화'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좋고 나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소위 86세대들이 열심히 서양이론들을 번역해 들어오고 번역된 담론들을 갖고 자기들의 생각을 교환하는 동안에 '대상화'라는 말은 그 자체로 죄악시되는 쪽으로 사용되어 온 게 아닌가 하는 감이 있다. 그러한 용법을 젊은 작가가 그대로 받아서 읊는 대목을 보니 보는 내가 부끄럽다. 독일어에는 '보는 내가 부끄러운 감정'을 부르는 명사가 있다는데 한국어에 그런 단어가 없다는 게 유감이다.
보기에 따라 '게이 문학'(여성문학이니 뭐니 하듯이 네임택을 붙여 본다면)으로 볼 수도 있을 이 소설에서 또 (나에게는 불편하게) 눈에 띄는 점은, 이 인물들이 (안 그런 것 같을지 몰라도) 적어도 한 가지 사항에 대해서는 아주 확신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도대체 한반도의 소위 문학이란, 확신을 갖지 않은 인물을 전에도 그려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리지 못할 것인가.) 자신들의 성적 정체성이 그것이다. 적어도 중심인물들에 관한한 자신들의 성적 지향에 대해서만큼은 좀처럼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동성애자'라는 카테고리가 그렇게 자명할 수 있는 건가? 이건 내가 어릴 때부터, 그러니까 중고등학생일 적부터 이상하게 느껴온 거지만, '동성애자로서의 성적 정체성'이라는 말이 성립하려면 애초에 이성이건 동성이건 '다양한 성 경험'이 있은 후에야 가능한 것 아닌가. 어느날 동성과 성관계를 했더니 좋더라, 그 이후로도 한동안 동성만 찾게 되었다라는 것만으로 그 사람을 '동성애자'라고 할 수 있나 싶다. 한국처럼 10대들에게 성경험을 권장하지 않는 나라에서 애초에 이성애자니 동성애자니 하는 카테고리를 10대 혹은 20대 초반의 개인들이 자기 자신에게 부과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적어도 사회적인 공인을 받는 형태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다보니 스스로를 동성애자로 생각하는 이 나이대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언더 문화와 같이 갈 수밖에 없고 동성애라는 것에 사회적으로 음침한 스티그마가 안 붙을 수가 없는 거다. 그러니까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동성애자라는 것도 나오기가 요원한 것이겠지.
아무튼 원래 하던 얘기로 돌아와서 이 소설 인물들이 스스로를 게이로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자기보다 약간 윗세대들 (그것은 아마도 86세대) 이 만들어준 '동성애자' '성적 소수자'라는 개념어를 그대로 받아들여 가지고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 점에서 나는 이 소설 속 인물들이 굴종적이라고 느꼈다. 그 인물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노예근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그건 그들이 가난하거나, 문화자본을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을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서 기존에 있는 카테고리를 그대로 묵수한다는 점에서 그랬다. 정말로 그 점은 distasteful했다. (distasteful 에 대응하는 한국어가 대관절 뭘까.)
2. 어른의 부재와 유아성: 소설가 본인의 시각에 대한 이견
원래 이렇게까지 길게 쓰려는 의도는 없었는데, 맺힌 게 많아서 자꾸 말이 나오네. 암튼, 두 번째로 불만인 것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죄다 유아적인 정신상태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학업이든 연애든 직업활동이건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이 인물들을 꿰는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미성숙함이다. Childish하다고 할까, 절대로 좋은 의미에서 천진함이 아니고, 사리분별을 못하는 애들이랄까. 내가 사리 분별 운운한다고 해도 이것은 기성세대가 부과한 질서를 묵수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한다. 세대를 뛰어넘어 인간이 동물의 한 종으로서 갖는 근본적인 기질이란 것이 있고 (아주 가까운 예로 배고프면 먹고,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추구하고, 안전을 원하고, 남과 잘 지내길 원하면서 동시에 이기고 싶어하고, 등등 동물 행동학자들이 20세기를 통해 밝혀 놓은 몇 가지 합의된 사실들이 있지 않나.) 그 기질에 비추어 각 개체가 자기 원하는 것을 얻고 피하고 싶은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떤 세대에 속한 자이건 간에 따라야 할 기본적인 지혜랄까, 하는 것이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인간 관계에서건, 커리어 면에서건. 최소한의 self-descipline이랄까 변화하는 환경에 대한 적응이랄까, 하는 것은 생존하는 집단, 생존하는 개체에게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고, 그것이 결여된 개체는 자연선택에 의해 탈락해 왔다는 것을, 21세기에 살아가는 배운 사람, 글자를 읽는 사람이라면 이미 알고 있거나 생각해서 알 수 있는 정도의 기본적인 상식 아닌가.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데에는 최소한의 자기규율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 있어서, 어떤 대단한 교육기관의 혜택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령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 나오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인물들을 떠올려 볼 수 있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에도 잠꾸러기들이 나오긴 하지만 박의 소설에서와 같이 병고를 향해 질주하지는 않는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에 나오는 인물 정도가 비슷하려면 비슷하려나..
아무튼, 박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몸과 마음의 위생을 위한 기본 원칙들을 기꺼이 무시한 채 (본인들은 무시한다는 자각조차 없다) 도일(度日)한다. 이기호씨는 박소라 같은 인물에 대해서도 굉장히 호의적으로 썼던데, 내가 볼 때는 박소라를 비롯해서 등장인물 거의 모두가 순간의 충동을 컨트롤 한다는, 침팬지에게서도 드물지 않게 발견되는 생존 원칙을 지켜내지 못하는 인물들에 불과하다.
왜 영어에 tantrum이라는 단어가 있지 않나. 그건 어린아이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이에 관계 없이 나이먹은 사람도 한다. 그것이 내가 서울의 길거리를 돌아다닐때, 혹은 포털 사이트의 베스트 댓글란을 힐끗 볼 때 느끼는 바다. 시간이 지나간다고 정신의 성숙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내 보기엔 이 소설집의 거의 모든 인물들이 tantrum이라는 것을 하고 있다. 나이 많은 사람도 그런 언행을 한다는 현상을 가리키기 위해서 그 현상을 부를 어떤 단어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박의 소설이 나의 생각을 확장하는 데에 어떤 기여를 했다면 바로 그 대목에 있을 것이다. 솔직히 그 자체로 긍정할 만한 언행을 보여주는 인물은 정말로 단 한 명도 없다. 정말로 flat하다고 할까, 등장인물들 꼴이 얼추 엇비슷하고 나이만 먹은 어린 애들의 행진을 보는 느낌이다.
물론, 소설에 훌륭한 인물이 나와야 된다거나 하는 무슨 저 중세시대 성자전 전통에 입각해서 이런 불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당연히 이런저런 흠 있는 인물을 소설에 등장시킨다는 것은 그 소설가 본인이 그 인물을 긍정하는 게 아니..손가락 아프니 이쯤 하고. 그런데 어떤 불완전한 A라는 인물이 소설의 무대에 등장해서 그것이 사유의 대상이 되려면, 그것은 그 인물과는 다른 특성을 가진 인물 B에 의해 비춰질 때에, 비로소 A라는 인물이 소설가의 무한 긍정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의 대상임을 알 수 있게 된다. 물론 B는 소설 속에 등장할 수도 있고, B가 인물의 형태로 등장하지는 않더라도 내레이터의 서술 방식에 의해 세상에 A만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이 은연중에 드러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여간 소설 속에 A 유형의 인물만 있어서는 A가 그 소설 세계 내의 전부인 것이다. 박의 소설에는 (내가 너무나 비호의적인 독자라서 그럴지는 모르지만) A만 있고, 그 A는 유아의 정신상태를 가지고 있다.
하기야 한국어 권에서 '어른'의 존재를 본적이 없으니, 어른을 상상하기도 어렵겠지. 내가 어른에 대해서 얘기하면 그 잘난 yk조차 유니콘 운운하는 지경이니.
또, 내 생각에 인간의 바닥을 보여주기 위해 비참한 무대와 비참한 언어를 보여주는 것만큼 진부한 일도 없다, 그런 생각이 든다. 백보 양보해서 박의 소설에 뭔가 음미해볼 가치가 있는 뭔가가 있다고 해도, 그것을 제시하는 방식이 나에게는 대단히 뻔하게 느껴졌다고 해야 하나.. 내가 몰인정한 사람인가.
그리고 참, 유아성과 관계 없고 오히려 1과 관계되는 얘기지만, 인물들의 '실패'가 내가 볼 땐 실패가 아닌게, 이 인물들이 난관에 처하게 된 건 게이라서, 혹은 뭔가가 못 되어서가 아니라, 그냥 아주 심플하게 가난해서 그래. 아냐? 걔네들이 유산이 있었어봐. 게이니 무직이니 하는 건 아무 문제가 안 된다고. 근본 문제는 가난한 건데, 달리 말해, 어떠한 다른 중의적 의미도 없이 그냥 돈 없다는 차원에서 가난한 게 문제인 건데, 그걸 다른 문제인 것처럼 받아들인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자명한 걸 외면하는 거 아닌가? 누군가가 돈이 어느 정도 있는데도 게이라서, 혹은 타인에게 인정을 못받아서 괴로운 인간에 대해서 쓴다면 그건 정말로 어떤 '보편적' 정서를 건드리는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 그렇지만 여기 나오는 애들의 문제는 가난만 해결되면 얼추 다 해결되는 것 아닌가.. 너무나 가난하고, 단순 노동,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업에 삶의 일부를 갖다 바치고 있고, 그 점이 문제 아닌가. 나쓰메 소세키나 무라카미 하루키는 적어도 그런 인물을 그리지는 않지. 박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이 직면한 문제란 것은 실상 너무나 단순하고 확실한 문제인 것 같고, 해법도 단순한 것 같은데 어디에 뭔가 복잡하고 섬세한 사유를 부르는 대목이 있는 건지, 이몸은 무식쟁이라 그런지 이해가 안 돼. 윤재민씨는 소설평에서 이 대목을 계급 어쩌고 운운했던데 여기엔 개인밖에 안 나오더만 어딜봐서 그게 계급인가.
어른이 없다, 는 것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은데.. 그건 나중에. 진짜로 이건 언젠가 날을 잡아서 '어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한번 써보고 싶다.
3. 미적 감수성에 있어서 느끼는 개인적 이질감: 유산 없는 한국어
정말 요점만 말하면, 내 취향은 이런 것 같다. 예술을 할 때, 아름다운 재료로 추한 것을 보여주는 경우와, 추한 재료로 아름다운 것을 보여 주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고 한다면 내 애정은 언제나 전자에 있다. 박의 소설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후자가 아닐까 싶다. 도대체 뭔 아름다운 것을 보여줬는지 그것은 의문이지만, 내가 알아보지 못한 뭔가 아름다운 것이 있으니까 위세 있는 문단의 인사들과 식견 있는 인사들 (혹은 식견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 인사들) 그렇게 찬양 했으려니 한다. 언더 문화의 특유의 언어로 켜켜이 쌓인 말의 축조물들을 낱낱이 읽어갈 때 남는 것이 무엇인가.
책 날개에 어떤 소설가가 "처음 읽은 그 순간부터 나는 사랑에 빠져버렸다"고 대서특필을 해놨는데, 그 사람이 이 소설 좋아한다는 건 알겠는데, 그 사랑의 대상으로 지목하는 게 뭔지 모르겟어. 책 뒤표지에 "오로지 직진할 뿐 망하면 망햇지 가식이나 위선을 떨지 않겠다는 태도" 뭐 그게 좋다는 식으로 써놨는데, 정말이지 내가 평소에 못견뎌하는 "한국 지식인 방언"의 한 예를 보여주더군. 가식이나 위선을 떨지 않는 바로 그것 때문에 당신들이 안 되는 거야, 정직함이야말로 유아의 특성이지, 라고 쏘아붙여주고 싶은, 그런 마음을 진정시키고 초연한 태도로 거기에 대해 논평할 수 있어야 나도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이겠지.
원래 하려던 말로 돌아오면, 추한 재료를 선택하는 게 그 자체로 문제는 아냐. 그렇지만 한국어의 경우 애초에 아름다운 재료가 별로 없기 때문에 '추한재료를 쓴다'는 것이 작가의 선택이 아니라 그냥 given이라는 게 문제라는 거야. 나쓰메소세키만 하더라도 장편의 모노가타리 전통이 있고 세이쇼나곤으로부터 바쇼를 거쳐 20세기에 이르는 격조 있는 문학 전통이 있으니까 나쓰메 소세키가 있는 거기도 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군. 근데 한국어에는 뭐가 있나. 아마도 나는 한국인 평균 보다는 많이 배웠을 거고, 좋다는 학교 그 속에서도 한국어의 전통에 대해서는 평균보다는 많이 주워 들은 사람일텐데, 그 커리어 위에서 볼 때 현대 한국어에 유산이랄 것이 없는 것 같아. 가령 영어만 하더라도 라틴어에서 물려받은 유산이 있잖아. 적어도 배웠노라 하는 엘리트들이 쓰는 말에는. 그런데 한국어에는 물려 받은 유산이 없고, 그렇게 되고보니 (상스러운 말로) '본 데 없는 언어'를 갖고 뭘 만들려니까, 오랜 시간에 걸쳐 아름다운 재료를 만들수도 있겠지만 그건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당장 못하고, 당장에 할 수 있는 건 '추한 재료로 멋진 걸 만드는' 방법 밖에 없을 텐데, 그래서 만들어낸 멋진 것이 뭔지 당최 모르겠고, 평론가들은 애초에 문제 설정을 그렇게 안 하니까, 그냥 일단 좋다고 전제하고 나서 안 좋다는 독자는 버리고 가니까, 읽어도 공감이 안 되고.. 그랬다고.
일제 시대 작가들은, 적어도 제국을 경험해 본 작가들은 차라리 좀 더 나았던 것도 같은데. 일제 시대 소설 중에 어떤 성취가 있었다 한들 그것이 흡수되었는지도 모르겠고, 제국의 유산이 그렇게 갖다 버릴 게 아닌 것 같은데, 일제 시대 소설을 읽는 방식이라는 것도 너무 경직되어 있어서 그게 요새 작가들과 잘 연결되는 것 같지도 않고, 뭐 일단 나부터도 일제 시대 작가들 작품을 잘 모르기도 하지. 다음주에는 아닌게 아니라 염상섭을 읽어보면 어떠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