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펭귄클래식의 <오이디푸스> 해설을 읽었다. 펭귄은 영어 문장도 좋지만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내가 이해하기 좋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른 영어 번역본에 비해서.) 해설이 늘 좋았다. 원래는 현재 쓰고 있는 논문, 혹은 잠시 제쳐 둔 논문을 쓰기 위해 <안티고네>에 대한 아주 기본적인 지식을 얻고자 얼마 전에 이 책을 폈었는데 녹스의 해설을 읽다가 너무 감탄한 나머지 세 작품 해설을 모두 읽어보기로 마음을 정했었다. 그러면서 영풍문고 종로점에 마실 갔다가 무슨 이유에선가 이 책을 사 두었던 과거의 나에게 고마워졌다. 그러면서 역시 고전은 실패하지 않는다, 영어권의 믿을만한 출판사 책은 과연 믿을 만하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이디푸스 해설은 초반을 읽다가 너무나 후련했던 나머지 이걸 꼭 어딘가 적어 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오랫동안 들어오지 않던 이 블로그를 모처럼 켜봤다. 사실 나는 대학 1학년때 K 교수의 교양수업에서 <오이디푸스>를 처음 읽었고, 그에 관한 여러 해설들, 한국어로 된 해설들을 당시에 접했지만 당최 하나도 와닿는 게 없어서 역시 그리스 고전은 나랑 안맞나 보다 하고 제쳐두고 있었더랬다. 그런데 바로 이 펭귄책 해설에서 내가 '당최 말같잖은 소리'라고 생각했던 유명한 해석들(프로이트나 르네 지라르를 위시한 당신도 잘 알고 있을 해설들)을 죽 주워섬긴 후 "그 사람들 너무 나갔지" 라고 조리를 돌린 후에 소포클레스 당시의 그리스, 그러니까 B.C.5세기 후반 그리스의 지적 상황에 대해 얘기를 하기 시작하더라. 그 순간 예사롭지 않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작년 초부터 어떤 프로젝트의 결과로 B.C.5세기 후반이라는 시기에 대해서 각별한 관심을 갖게 된 데에도 이유가 있기는 했다. 지금은 학계에서 거의 잊혀진 모양이지만 한때 식자들이 열광했던 용어라고 하는 소위 axial age가 바로 B.C.5세기 후반인 것이다. 

그 해설의 저자인 녹스 씨 왈, 소포클레스가 살던 기원전 5세기 후반은 지적 혁명의 시대였고, 당시의 key question이 바로 신탁 문제였다는 거다. 어떤 근본적인 세속화 과정이 그 때 있었고 신탁을 믿을지 말지의 문제, 아니 최소한 신탁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에 대해서 근본적인 회의감 같은 것이 엘리트들 사이에 팽배해 있던 시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고어비달이 <크리에이션>에서 말했던 것처럼 이 시기에 오럴 컬쳐에서 문자 문화로의 전환도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세계사적인 차원에서. 그 전환이 일어난 문명권들 -인도, 중국, 페르시아, 그리스-이 있고 그 변화가 어떻게 보면 비슷한 핵심 요소들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 우리가 지금 보기에는 소포클레스 작품에 신의 의지니, 운명이니, 신탁이니 하는 게 많아보여도, 당시 기준에서 보면 굉장히 세속적인 작품이고 (안티고네도 마찬가지고 -안티고네 해설도 굉장해서, 언제 그 요지를 여기에 옮겨 볼까 한다) 오이디푸스는 그 중에서도 정점에 있다는 것..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역시 고전을 읽을 때는 그 텍스트가 답이라면 무슨 질문에 대한 대답인가를 아는 게 제일 중요하다...라고 하는 ykim의 테제(?비슷한 것) 가 과연 맞다, 아니 최소한 나에게는 맞다는 생각이 들고, 녹스가 해설 나머지 부분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끌고 갈 건지에 대한 기대감 충만..하다고 할까, 그렇더라. 

개인적으로는, 이런 해설을 10대때부터 읽고 자란 영미권의 gifted freshmen을 대상으로 강의를 한다, 고 했을 때 한국의 전근대 문학에 대해서 강의하는 게 어떤 의미일지를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래, 내가 사랑하는 혁명이란 이런 종류의 혁명이지 라는 생각을 했다. 기존에 뭔가를 이해해왔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꾼다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나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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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6주간 읽지 못하고 책상 한 구석에 밀어두었던 VSI (very short introduction) 시리즈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10월 어느 화요일에 교보문고에서 사온 Classical Literature. 오늘 만난 저자는 아르킬로코스(Archilochus)였다. 이사야 벌린이 다시 한 번 언급해서 유명해진 여우와 고슴도치 이야기의 원 소스가 아르킬로코스였다고 한다. 


여우는 많은 것을 알지만 고슴도치는 하나를 안다. 그렇지만 굉장히 큰 것을 알고 있지.

(The fox knows many tricks, the hedgehog only one -- but it's a big one. (fr.201)



2. VSI시리즈에 대하여  

VSI시리즈는 전부터 잘 읽어보고 싶은 시리즈였는데 올해 들어서 비로소 본격적으로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번에 Classical Literature를 보면서는, 서방 세계에 이토록 훌륭한 작가들이 많은데 너무 몰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서삼경을 영어로 번역할 때 서구 고전의 용어와 매치시켜서 번역하곤 하는데, 서구 고전에 대해서 너무 모르다보니, 그 번역어들의 뉘앙스와 번역자들의 고심에 대해서 (막연히는 알았지만) 너무 무지했구나 싶었다. 

얇은 책이다보니 금방 읽어질 것 같지만 엄연히 아카데믹들이 쓴 학술적 성격의 책이라서 그렇게 쉽게 읽어지지 않는다. 적어도 이 사실을 인정하게 된 것은 나에게는 1년도 채 되지 않는다. 

학교에서 이번 학기에 대학 1학년생을 대상으로 글쓰기 강의를 하다보니, 강의를 듣는 내 자신에게도 만족스럽고 수강생에게도 들을 만한 얘기를 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전문가 독자와 초심자 독자를 모두 대상으로 하는 VSI 시리즈를 다시 잘 읽어보면 뭔가 답이 나오지 않을까 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역시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3. 독법에 대하여

올해 초에 퀜틴 스키너가 VSI 시리즈에 쓴 마키아벨리를 읽으면서 나의 영어책 읽는 습관을 총체적으로 돌아볼 일이 있었다. 스키너 글을 읽다 보면, 이 정도의 문장을 출력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데이터를 머리 속에 정리해야 될 것인가를 자연스럽게 고민하게 되지 않을 수 없더라고. 그래서 그 때부터 VSI 같은 영문 교양서를 읽는 시간, 방법, 재독의 방법 등을 총체적으로 재점검하고 좀 더 효과적으로 읽으려면 어떤 것을 해야 하는가, 그런 생각들을 했다. 

그렇게 해서 각 챕터를 1독 하는데 몇 시간이 걸렸는지, 몇 번에 나눠서 읽었는지, 각 챕터의 핵심 내용은 무엇인지, 이 책에서 가장 나의 마음을 끈 문장이 무엇이었는지 같은 것들을, 책 날개 안쪽의 안 보이는 곳에다 전부 적어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기록들을 수 차 재검토하면서 어떻게 해야 더 나아질 수 있겠는가를 궁리하게 되었다. 그것을 몇 번 반복한 후에야, 그리고서야 내가 왜 여태껏 그 많은 영어책을 읽으면서도 눈에 띄는 발전이 없었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10대에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했던 기초적인 연습들을 시행하지 않고 영어를 날로 먹으려 했구나, 그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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