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오자시4 임숙영(병한8)
4) 任茂叔 [名叔英]
西河敏絶倫, 萬卷悉口誦.
古文洞丘索, 離騷踵屈宋.
서하의 민첩함은 매우 뛰어나 만권서를 모조리 구송하네.
구구팔삭의 고문에 통달하였고 굴원과 송옥의 이소를 잇네.
-丘索: 구구팔삭(九丘八索)의 줄임말이다. 九丘는 구주(九州)의 토산물과 풍속을 기록한 책이고, 팔삭(八索)은 《주역(周易)》의 팔괘(八卦)를 해설한 책을 가리킨다. 현전하지는 않음.
尤工騈驪辭, 徐庾寧有種.
徒誇上林賦, 未第甘泉頌.
병려문과 사에는 더욱 능하니, 서릉·유신의 종자가 따로 있으랴.
상림부는 공연한 과장이요 감천송은 별 것 아니라네.
-서릉·유신: 다 같이 문사(文辭)에 뛰어나 당시에 서유체(徐庾體)라 불렸다. 서릉(徐陵, 507~583)은 양진의 문학가로, 이부상서 등을 지냈다. 《서효목집》이 전해진다. 간문제가 태자 때 서릉에게 옥대신영을 편찬하게 했다. 유신(庾信, 513~581)은 육조 시대 최후를 장식한 문인으로 당 율시의 선구가 되는 작품을 썼다. 저서로 庾子山文集이 있다. 이백(李白)의 청신성(淸新性)과 두보(杜甫)의 침울성(沈鬱性)이 상통했다고 함. 북주에 사신으로 가 장안에 머무는 동안 양나라가 멸망했는데, 북주에서는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표기장군‧개부의동삼사로 삼았다.
-상림부·감천송: 상림부는 사마상여가 지었고, 감천송은 양웅이 지은 감천부를 가리킨다. (원주)
中原析藏譜, 百王剖紹統.
洞曉極廣深, 掌故行需用.
중원의 장보를 파헤치고, 백왕의 통서를 열어보였네
뚫어지게 알아 극히 깊고 넓으니 장고(掌故)는 장차 쓰이겠구나.
劇論恣貫穿, 明核吾當恐.
交情指靑松, 霜雪期相共.
격렬한 논변은 분방하여 융회관통하였고, 명확한 고증은 내 두려워할 바라네.
사귄 정 푸른 소나무를 가리키니, 눈서리를 함께 나길 기약하네.
*임숙영(1576~1623)
풍천 임씨.
1601년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10년 동안 수학하였으며, 유생들의 상소가 거의 임숙영의 손에서 나왔을 만큼 논의가 뛰어났다고 한다. 1611년 별시문과의 대책(對策)에서 주어진 이외의 제목으로 척족의 횡포와 이이첨(李爾瞻)이 왕의 환심을 살 목적으로 존호를 올리려는 것을 심하게 비난하였다. 이를 시관 심희수(沈喜壽)가 좋게 보아 병과로 급제시켰는데 광해군이 대책문을 보고 크게 노하여 이름을 삭제하도록 하였다. 몇 달간의 삼사의 간쟁과 이항복(李恒福) 등의 주장으로 무마, 다시 급제되었다.
1613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무옥인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자 다리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정청(庭請)에 참가하지 않았다. 곧 파직되어 외방으로 쫓겨나 광주(廣州)에서 은둔하였다. 문장이 뛰어나고 경사(經史)에 밝았으며 특히 정주학(程朱學)에 통달하였고, 고문(古文)에 힘써 중국 육조(六朝)의 사륙문(四六文)에 뛰어났다. 특히 「통군정서(統軍亭序)」는 중국학자들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다 한다. 저서는 『소암집(疎菴集)』이 있다. 글씨를 잘 썼다고 하나 남아 있는 필적은 많지 않다.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2011. 집필자 이승연)
-참고
택당집 별집 6권, 「사헌부지평 소암 임군 묘지명 (司憲府持平疏菴任君[叔英]墓誌銘[幷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