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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길수 (2013) 허균 문학의 모순과 일관

nicole0301 2020. 9. 5. 17:35

정길수, 「許筠 文學論의 모순과 一貫 –王世貞 혹은 擬古門派 문학론과의 연관」, 『한국한문학연구』 51, 한국한문학회, 2013.

 

*목차

1장 머리말

2장 허균 문학론의 모순

 1) ‘창신(創新)’의 문학론

 2) 상고주의 문학론

3장 허균 문학론과 왕세정

4장 의의성변(擬議成變)과 학고창신(學古創新)

5장 맺음말

 

*주요 내용

-허균과 왕세정의 유사성: 의고와 창신 둘다 중시하는 모순적인 면. 

-성소부부고를 집필하던 시절의 허균에게 압도적인 영향을 미친 존재는 왕세정. (2.1. 창신의 문학론, 274쪽)

-허균이 시경을 정점에 두고 점점 시가 타락한다고 보는 점에서 의고문파 문학노선을 취하고 있는 것은 분명. 또 옛날 것을 모방하지 말고 지금의 시를 써야 한다고 말함. 모순적으로 보임.  (2.2. 상고주의 문학론, 278쪽) (이게 애초에 모순일까?)

30대 후반 이후 성소부부고가 완결되기까지 허균의 문학관은 왕세정의 영향 없이 생각하기 어렵다. (280)

왕세정의 예원치언 (30~40대에 걸쳐 집필)을 통해 이 문제를 조명: 복고주의와 상치되는 허균의 주장과 공안파의 주장을 예원치언에서 찾을 수 있다. (예원치언 권4, 89조; 권8, 25조 “하경명과 이몽양, 성한 살갖이 없다”) (281쪽)

 

-왕세정이 의고를 배격하는 까닭: 의고는 자연과 배치된다고 보기 때문. (3장, 284쪽)

왕세정은 특정 시대만을 높이고 나머지는 폄하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285: 한유 유종원 구양수 소동파의 공적도 부인하지 않았다. 286: 허균이 구소문략발에서 말한 것 같은 선진양한을 으뜸으로 여기는 자들은 구양수 소동파를 읽지 않는다고 비판한 것은 왕세정의 입장과 일치.

왕세정과 허균의 유사한 입장: 허균 <송오가시초서>, 왕세정 <송시선서>

 

-왕세정의 문학론 간단 정리 (289쪽)

독창성 내지 창신이 발휘되지 않은 것은 하등의 경지. 과거의 특정시대만 높이고 나머지 시대의 가치 일체 부정하지도 않음. 의고문파와는 다른 유연한 입장. 왕세정과 허균은 매우 유사하고 차이점 찾기 어려움. 허균 문학에서 모순처럼 여겨지는 것이 왕세정 글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남. 어떻게 양립 가능?

 

4장.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 이 문제가 본 논문의 주안점.

허균의 <명사가시선서>에서 출발. “의의성변”이란 말을 썼는데 이것은 이반룡이 <고악부서>에서 했던 말로 ‘과거의 전범을 충분히 고려한 뒤 변화를 이룬다’는 의미로 썼다. (291) 한 고조 때 호관이 신풍성 축조한 이야기. 서경잡기에 나오는 고사를 거의 그대로 인용. 백락이 말을 알아보는 일은 의의할 일이 없는 경우. 열자도 의의 없이 목적을 이룬 경우; 왕세정이 이반룡의 의의성변을 해석하기를 “의의에서 단서를 찾아 일신을 추구함” (294); 좀 더 익숙한 말로 바꾸면 의의는 學古나 法古에, 성변과 일신은 創新에 대응된다. 다만 여기서의 학고창신은 ‘의의이성변화’라는 말에 비추어 ‘학고를 통한 창신’이라는 말로 이해되어야 한다. 각주 58. 박지원의 법고창신과 비교해 본다면, 박지원의 법고창신은 ‘법고를 통한 창신’, 그리고 ‘창신을 통한 법고’라는 양방향적 의미, 라고 본다면 좀 다른 것.(294) “이반룡과 왕세정은 최종 목표가 창신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허균 문학론에서 모순적이 것으로 여겨졌던 창신론과 상고주의 문학론은 애당초 모순 관계가 아니다.” (294~295) (박희병, 김명호 설 각주.) (학고는 창신을 위한 수단)

왕세정의 법고는 학습과정, 그 이후에 창신의 순간이 온다는 것. (295~296) 허균은 왕세정과 같은 맥락의 ‘학고창신론’을 펼친 것. (296)

 

*이 논문에서 소개해 준 주요 문제들

1) ‘법고창신’ 개념 문제. 박지원과의 비교.

박희병, 『연암을 읽는다』 초정집서 부분: 329~357. (법고를 통해 창신)

김명호, 『연암문학연구』중 박지원의 법고창신에 대해 논한 부분: 24~29, 154~157, 189~190

 (명시적으로 밝힌 건 아니지만, 창신을 통해 법고하고자 한 거라고 해석될 수 있을 듯.) 

 

2) 왕세정 말년 문학관의 변화라는 건 전겸익이 만든 것이지 진짜는 아니라는 설

박경남, 「왕세정을 바라보는 두 대가의 시각: 김창협과 전겸익의 왕세정 이해」, 『고전문학연구』 39, 한국고전문학회, 2011, 255~261.

 

3) 전후칠자와 원굉도의 동근성 (이기면, 1993년 고려대 박사)

이기면 (1995), 「전후칠자와 공안파의 同根性 연구」, 『중국어문논총』 9.

-소위 이 ‘동근론’이란 건 곽소우(1893~1984)가 말한 것이라 함. 《중국문학비평사》(1982).

전후칠자와 공안파 모두 양유정의 鐵崖體의 變狀이라는 것.

이기면의 주장은 최소한 문학창작론에 있어서는 동근성이 있다는 것. 양자는 대립적이지 않고 상호보완적이라는 것이 골자.

謝榛(1499~1579)의 설, 법고는 창신을 위한 훈련 수단이란 것. (228쪽)

(cf. 확립된 자아의 무아화 과정. 227쪽)

두 유파의 욕구는 진솔한 자아를 꾸밈없이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 (228)

전후칠자 역시 공안파 작가들이 성인의 단계라고 하는 경지, 즉 자아가 무아화 되는 경지를 추구했을 것. (이몽양, <詩集自序> 의도하지 않아도 음의 장단과 빠르기가 맞아 떨어지는 단계)

이몽양의 眞詩. (234쪽), 사진은 悟를 통한 妙의 추구에 문학의 최상의 가치를 두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