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신가 (2020) 허균 한정록의 연구 - 명대 소창청기 청언소품과의 대비를 중심으로
송신가, 「허균 『한정록』의 연구 – 명대 『소창청기』 청언소품과의 대비를 중심으로」, 성균관대 석사학위논문. (성대 국문과 석사-한영규 교수 지도)
*김은슬(2009), 김은정(2011)의 한정록 연구를 잇는 문헌 연구로서는 가치가 있음.
제1장 서론
제2장 『한정록』의 편찬 배경
1. 晩明 소품문의 성행과 그 수용양상 22
1) 만명 소품문의 성행과 전개 22
2) 조선중·후기 소품문 수용과 창작 28
2. 『한정록』과 吳從先의 청언소품 34
1) 허균과 청언소품의 조우 34
2) 허균의 『한정록』과 오종선의 『소창청기』 41
제3장 『한정록』의 『소창청기』 인용 양상
1. 『소창청기』의 판본 현황 51
2. 『소창청기』 인용·편집의 새로운 실증 57
1) 『소창청기』 인용표기의 원 출처 57
2) 『소창청기』 인용과 未表記 항목 68
3. 『한정록』의 類門別 『소창청기』의 인용 분포 75
제4장 『한정록』 인용·편집의 특성과 문학사적 의미 85
제5장 결론 94
참고문헌 97
부록 102
中文摘要 134
표 1. 『淸紀附』와 『소창청기』의 문구 대조 55
표 2. 인용문헌 별 유사문구 비교 58
표 3. 『소창청기』에 없는 조목들의 원 출처 조사 62
표 4. 『한정록』 문구의 원 출처 추정(1) 62
표 5. 『한정록』 문구의 원 출처 추정(2) 63
표 6. 『한정록』 문구의 원 출처 추정(3) 64
표 7. 『한정록』 문구의 원 출처 추정(4) 66
표 8. 『소창청기』 인용서 未表記 항목 조사 70
표 9. 『한정록』 유문별 『소창청기』 인용비중 76
*서론 중 연구 방법: 김은슬의 한정록 인용문헌 연구에서는 소창청기가 103회, 하씨어림이 101회, 미공비급이 45회. 본고에서는 소창청기로 표기된 인용구가 107칙, 소창청기에 나오지만 표시하지 않은 문구가 85칙. 한정록에 가장 많이 수록된 작품은 소창청기. (12쪽)
소창청기는 작가가 당시 중국 문인의 기록과 문집을 선록해서 자기 관점도 함께 기록한 평집(評集).
*청언: 짤막하고 깔끔한 문장을 통해 의미심장한 내용을 전달하는 것, 고결한 취향이나 교훈적 처세 태도, 속되지 않은 인생관을 표출한 문학. (안대회, 2015a, 「조선후기 청언소품의 향유와 창작」, 한국한문학연구 59, 한국한문학회, 125쪽)
대부분의 청언은 짧은 편이지만 기록 방식이 자유로워서 짤막하게 쓰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을병조천록에 나오는 <독이씨분서>, <원굉도의 주평 후에 씀>을 두고 이탁오와 원굉도 글을 읽었다고 하는데,(32~33쪽) 글을 읽은 것과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아주 다른 얘기다.
*허균이 광해군 7년에 명나라에서 구해온 7종 (광해군일기 7년(1615, 윤8월 8일)
-이날 일기에 조선 국왕이 중국 황제에게 바치는 주본 내용이 나온다. (종계변무 건이고 허균 개인사와 관련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
2번째 기사
“지난 만력(萬曆) 42년(1614년) 10월 10일 주청사로 간 배신(陪臣) 박홍구(朴弘耉) 등이 치계해 오기를 ‘신들이 주청사로 경사(京師)에 도착해서 객관에 머물면서 성지(聖旨)를 기다리고 있는 중 관례대로 서적을 구입했는데, 《오학편(吾學編)》·《감산별집(弇山別集)》·《경세실용편(經世實用編)》·《속문헌통고(續文獻通考)》 등 4종의 책에서 우리 나라의 사적(事跡)을 기재하였는 바 내용이 황조(皇朝)의 《회전(會典)》의 기록과 매우 다르고, ...
진하(陳賀)·천추사(千秋使)로 갔던 배신 허균(許筠)이 경사로부터 돌아와 또 여러 종의 서책 11종을 가지고 왔습니다. 신은 각종 서적을 하나하나 조사해 보았는데, ①고 형부 상서 정효(鄭曉)가 지은 《오학편(吾學編)》의 사이고(四夷考)에 ‘동북(東北)의 조선은 바로 고려이다. 이인인(李仁人)과 아들 【태조의 구휘(舊諱).】 지금 이름 【태조의 어휘(御諱).】 가 홍무(洪武) 6년 부터 28년까지 연달아 네 왕을 시해하고 짐짓 기다렸다.’ 하였고, ... ② 고 공부 상서 뇌례(雷禮)가 편찬한 《황명대정기(皇明大政記)》에는 ‘고려 사람이 그들의 군주 우(禑)를 유폐하고, 또 그들의 군주 창(昌)을 폐위시켰다.’고 하였고, ... ③ 원임 안찰 첨사 왕기(王圻)가 지은 《속문헌통고(續文獻通考)》의 사예고(四裔考)에는 ‘이인인이 우(禑)를 겁박하여 가두고 ...④원임 안찰 첨사 풍응경(馮應京)이 지은 《경세실용편(經世實用編)》의 조선조(朝鮮條) 아래에 ‘이인인과 아들 【태조 구휘.】 지금 이름 【태조 어휘.】 가 전후로 모두 왕씨의 네 왕을 시해하고 짐짓 기다렸다.’ 하였고, ⑤ 원임 이부주사 요신(饒伸)이 편집한 《학해위언(學海危言)》에는 ‘조선은 기자(箕子)의 유허(遺墟)이다. 신하로서 임금을 시해한 것이 개·이(蓋李)047) 에서 나타났으니, ... ⑥ 고 형부 상서 왕세정(王世貞)이 지은 《감산당별집(弇山堂別集)》의 사승공오(史乘攻誤)에 ‘왕전(王顓)의 시해는 본디 이인인에게서 비롯되었는데... ⑦ 고 도독 첨사 만표(萬表)가 기록한 《애집(艾集)》에는 ‘이인인과 아들... ⑧ 고 이부 상서 이묵(李默)이 지은 《고수부담(孤樹裒談)》에는 ‘이인인과 아들 【태조 구휘.】 가 왕우·왕창·왕요·왕석 네 임금을 시해하고 자신이 왕이 되었다.’ 하였고, ⑨ 《속문헌통고(續文獻通考)》의 논왜사(論倭事) 조항에는 ⑩ 또 《경세실용편(經世實用編)》의 해방제설(海防諸說)에는 ‘대마도를 외람되게도”
*갈래: 현재 중국에서 소창자기는 명백하게 청언으로 분류, 소창청기는 복잡. 37~38쪽.
중국에서는 소창청기를 세설체로 보는 관점과 청언으로 보는 관점 공존하나 한국에서는 청언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38쪽) 그 외에 대만의 정행아가 소창청기를 청언집으로 본다.
*세설체와 청언의 차이: 같은 시대에 발전했으므로 유사하지만 차이 있음. (정행아 설에 따라 세설체와 청언을 구분해 보려고 했으나 뭐가 차이라는지 잘 모르겠음. 각주 105번에 나온 정행아, 2013, 147~150쪽을 봐야 알 듯.) 정행아 설에 따르면 세설체를 4종으로 나누는데, 그 중 ‘역사에 빠진 부분을 보충함(補史缺)’ 외에는 ‘스스로 즐김(自娛樂)’, ‘세도에 보탬이 됨(資世道)’, ‘감식안을 숭상(尙品鑒)’하는 3종이 청언과 겹친다고 보았음.
→송신가는 소창청기를 청언으로 본다. (39쪽)
*왕중민 연구가 오종선에 관련해서 자주 인용되는데 왕중민은 오종선과 그의 소창청기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부정평가의 근거인즉 ‘주색에 빠져 낙을 취한다’는 것임. (그게 왜?) 송신가 왈, 소창청기는 독서의 감오 등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고 폭넓은 지식과 독서량을 드러내는 책으로 긍정평가해야 한다.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과 지혜로운 처신 태도를 담고 있다.
*왕중민은 「청기 부」가 「소창자기」를 쓴 다음에 나온 것이라고 봤는데; 김은정 말대로 「청기 부」가 「소창자기」의 전신일 것이다. (49쪽)
*한정록의 인용문헌 표기 오류는 소창청기의 18자본과 19자본 간 이본 차이로 설명할 수 있음. 하지만 어떤 문구들은 소창청기로 표시되었지만 소창청기와 소창자기 모두에 존재하지 않으며 하씨어림, 암서유사, 준생팔전 등 다른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51쪽)
*한정록에서 소창청기로 표기된 문구가 모두 107칙인데, 그중 소창청기에서 확인할 수 없는 것이 45칙, 그중 소창자기에서 확인된 것이 16칙. (51~53쪽 표)
*만명 문인들, 품격 있는 생활 용품에 대한 관심. 용품의 품질이나 품격에 주목하고 품격있는 물품을 생활 속에서 즐기려 한 것. (75쪽)
*한정록과 소창청기는 모두 다른 작품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편찬되었고, 허균과 오종선은 같은 작품에 주목했으며 독서경향이 비슷. 당시 명 문단에서 인기있던 작품을 열독하고 그것을 선별해서 청언집을 만들었다. (4장 초입) (78쪽)
*한정록에는 소창청기 외에 진계유와 도륭, 원굉도의 내용도 많이 수록. (78쪽)
<결론>
2장: 허균의 혁신사상. 중국 양명학파와 공안파의 영향을 받았을 것. (30쪽에 해당 언급이 나온다. 29쪽에서 강명관의 주장 즉 허균이 이탁오나 원굉도를 알고 있었지만 영향을 받은 것은 없다는 주장을 소개하긴 함. 그러나 송신가는 허균이 자기 주장을 직접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이탁오나 원굉도, 왕양명의 문장을 수록하고 있다는 것을 이유로 이탁오나 원굉도, 양명학파와 공안파에 주목했다고 본다.) 명대 주류 문학이 아니라 청언 소품에 주목했다. (전후칠자 등이 주도한 이른바 주류 문학에도 주목했다.)
*3장 : 허균과 오종선은 문학적 취향에 유사성이 있었기 때문에 허균은 진계유나 원굉도보다 낮게 평가되던 오종선의 작품에 주목한 것이다. (이걸 설명이라고 한 것인가?)
*한정록에서 소창청기를 인용문헌으로 달았지만 소창청기에 나오지 않는 것들을 집계.
*한정록 중 <유사>(10권), <명훈>(11권), <청공>(14권) 3유문에 소창청기 내용이 집중 분포. 소창청기를 활용하되 독자적으로 재편집했고 참신하다. (이렇게 주장은 했는데 재편집 기준이 무엇이고 그 방식이 전에 없던 무엇인지는 설명되지 않았다.)
*주류 문학이 아닌 문학을 수용한 것은 허균의 혁신적 사상과 연관. (만명 청언이 명말의 상업출판 붐과 함께 부상한 사실에 비추어 보면 소창청기류의 청언체를 주류 문학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모순이다.)
*진계유, 원굉도, 이탁오의 문장을 많이 수록. 양명좌파와 공안파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소창청기에 수록된 글을 베낀 것을 두고 양명좌파나 공안파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나?)
*중요 참고문헌
王重民, 「關於吳從先」, 「冷廬文藪」 上, 상해고적출판사, 1992, 177쪽.
(왕민중의 위 논문은 자주 인용되는데 국내 도서관에 없는 듯함.)
鄭幸雅, 『明淸淸言硏究: 醒世癒病, 自覺自解』, 文津出版社, 2013. (대만 國立中正大學에서 2000년에 낸 박사논문을 단행본으로 출간한 것: 세설체와 청언체, 147~150쪽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