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설산보주해서(허균) 및 관련 글 초벌 번역
*世說刪補注解序
晉人喜淸談, 辭簡指遠, 語語有玄解, 風流宗尙, 至於江左極矣. 撮其旨者, 登之于簡, 初曰劉義慶氏, 世所傳世說新語者是已. 六朝以還, 逮于勝國, 名大夫士隻言緖論, 可配於典午諸賢者, 曁漢魏晉三代名人所談扢, 見遺於劉氏者, 收錄而成書曰何氏語林, 世所稱東海元朗氏之所述者是已. 合二書而雌黃之, 以語晦而捐劉之十二三, 以說宂而斥何之十七八, 超然以自得爲宗, 刪二書而爲一家言者曰吳郡王元美【世貞】氏也. 元美文章博達, 千古所希, 而讚詠是書, 吃吃不離口, 至爲之手自刪補者, 豈無所見而然也. 蓋其於單詞造微隻行徵巧之際, 風旨蕭散, 自有言外無限意, 可以造極淵深, 故元美氏酷喜而不知竟也. 唐宋詩人只摘爲韻語之用者, 已落第二義矣.
劉說,何【良俊】書, 行於東已久, 而獨所謂刪補者, 未之覩焉. 曾於弇州文部中見其序, 嘗欲購得全書, 願未之果, 丙午春, 朱太史【之蕃】奉詔東臨. 不佞與爲儐僚, 深被奬詡, 將別, 出數種書以贈, 則是書居其一也. 不佞感太史殊世之眷, 獲平生欲見之書, 如受拱璧, 拜而卒業, 益知二氏之爲偏駁而王氏之爲獨造也. 因博考典籍, 加以注解, 雖未逮孝標之詳核, 亦不失爲忠臣也. 使元美知之, 則必將鼓掌於冥冥中, 以爲婾快焉.
*세설산보 주해 서 (허균)
진(晉)나라 사람들은 청담을 좋아하여 말은 간단하면서 가리키는 바는 고원하여 말마다 심오한 이해가 깃들어 있었다. 그런 흐름이 숭상된 것이 동진 시기에 지극했다. 청담의 요체를 모아서 책에 올린 것은 유의경(劉義慶, 403~444)씨가 처음이었는데, 세상에 전하는 『세설신어』가 이것이다. 육조 시대 이래로 승국(원나라)에 이르기까지 이름난 사대부들의 척언(隻言)과 짤막한 논의로서 서진(西晉)시대 제현들에게 짝할 만한 것 및 한(漢)·위(魏)·진(晉) 삼대의 명인들이 이야기했던 것 중에 유의경이 빠뜨린 것을 수록하여 책으로 만든 것이 『하씨어림』이니 세간의 이른바 동해(東海) 하원량(何元朗, 何良俊, 1506~1573)씨가 기록한 책이 이것이다.
두 책을 합치고 수정하여 유의경의 책에서 말이 불분명한 대목을 10분의 2나 3을 덜어내고, 하량준의 책에서 설이 남아도는 부분을 10분의 7~8쯤 덜어내어 초연히 자득한 것을 종지로 삼아 두 책을 산삭하여 한 대가[一家)의 말로 만든 것은 오군(吳郡)의 왕원미【왕세정】 씨이다. 왕원미는 문장이 넓고 통달한 점이 천고에 드문데 이 책을 예찬하여 말끝마다 입에서 빠뜨리지 않았으니, 자신의 손으로 직접 산삭하고 보완한 데 이른 것이면 어찌 그가 본 것이 없어서 그랬겠는가. 이렇게 한 것은 『세설신어보』에 나오는 짧은 말, 은미한 데 나아간 조예, 간단한 행동, 아름답고 공교로운 바 및 풍모와 요지가 해석됨에 절로 언외에 끝없는 뜻이 있어서 지극히 깊은 경지에 있었으므로, 그래서 왕원미씨가 너무나도 좋아하여 그만둘 줄 몰랐던 것이다. 당송의 시인들이 그저 운자를 뽑아 사용하는 데 그쳤던 일은 이미 제2의에 떨어진 것이다.
유의경의 설과 하량준의 책은 우리나라에 전해진 지 오래인데, 유독 『세설신어보』는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일찍이 엄주 왕세정의 문부(文部)에서 그 책의 서문을 보고는 전부터 책 전체를 구득하기 원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병오년에 태사 주지번이 명 황제의 조서를 받들고 우리나라에 왔을 적에 내가 그를 영접하는 벼슬아치가 되어 깊이 그의 격려해 줌을 받았다. 그와 이별하려 할 적에 그가 몇 종의 책을 꺼내어 선물로 주었으니, 이 책도 그중 하나였다. 나는 주 태사의 특별한 은총에 감동하였고 평소에 읽고 싶던 책을 얻었기에 진기한 큰 옥을 두 손으로 받은 듯이 대하였다. 절하고 읽기를 마침에, 유의경과 하량준 두 분에게는 치우친 데가 있고, 왕세정이 홀로 조예가 있음을 알았다. 이어서 전적들을 널리 살펴보고 주해를 붙였으니 비록 유효표(劉孝標, 劉峻, 458~521)의 상세한 해석에 미치지는 못하나 또한 왕세정의 충신이 됨에 부족함은 없을 것이다. 왕원미가 만약 이 일을 안다면 필시 저승에서 손뼉을 치며 유쾌해 할 것이다.
*世説新語補小序
余少時得世説新語善本吳中, 私心已好之, 每讀輙患其易竟, 又怪是書僅自後漢終於晉, 以為六朝諸君子, 即所持論風㫖, 寧無一二可稱者? 最後得何氏語林, 大抵規摹世説, 而稍衍之至元末, 然其事詞錯出, 不雅馴, 要以影響而已. 至於世説之所長, 或造㣲於單辭, 或徴巧於隻行, 或因美以見風, 或因刺以通賛, 往往使人短詠而躍然, 長思而未罄, 何氏盖未之知也.
余治燕趙郡國獄, 小間無事, 探槖中所蔵, 則二書在焉. 因稍為刪定, 合而見其類, 盖世説之所去, 不過十之二, 而何氏之所采, 則不過十之三耳. 余居恒謂: 宋時經儒先生, 往往譏讁清言致亂, 而不知晉宋之於江左一也. 驅介胄而經生之乎, 則毋乃驅介胄而清言也. 其又奚擇矣.
*세설신어보 소서 (왕세정, 엄주사부고 권71) (번역은 김장환 역 다소 수정)
나는 젊었을 때 오중(吳中)에서 《세설신어》를 얻어 마음속으로 이미 그것을 좋아했는데 매번 읽을 때마다 쉽게 끝나 버리는 것을 흠으로 여겼다. 또 이 책이 겨우 후한에서 진나라까지만 기술되어 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으니, 육조의 여러 군자들 중에서 그들의 지론과 풍격에 대해 일컬을 만한 자가 어찌 하나둘이겠는가. 맨 나중에 《하씨어림》을 얻었는데, 대체로 《세설》을 모방하면서 [시대를] 원나라 말까지 좀 더 늘여 놓았지만, 그 고사와 언사가 뒤섞여 나오고 전아하지 못하니, 모름지기 [세설신어의] 그림자와 메아리일 뿐이다. 《세설》의 뛰어난 점은 한마디 말에서 은미한 경지에 나아가기도 하고, 한 줄의 문장에서 공교로움을 찾아내기도 하며 칭찬을 통해 풍자를 드러내기도 하고 풍자를 통해 칭찬을 내보이기도 하여, 종종 사람들로 하여금 조금만 읽고도 놀라 뛰게 하거나 끝없이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하는 것인데, 하씨는 아마도 이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연(燕)과 조(趙) 군국(郡國)의 옥사를 다스릴 때, 잠시 일이 없는 틈을 타서 봇짐 속에 넣어두었던 것을 뒤져 보았더니 두 책이 그곳에 있었다. 그래서 약간 산정한 뒤 합쳐서 그 편목을 나누었는데 대개 《세설》에서 삭제한 것은 10분의 2를 넘지 않으며 《하씨어림》에서 채록한 것은 10분의 3을 넘지 않을 뿐이다. 나는 평소에 늘 이렇게 생각했다. 송나라 때의 경학 선생들은 매번 청담(원문에는 ‘淸言’)이 난을 초래했다고 질책하곤 했지만, 강좌(江左: 강남(江南))에 있어서 진[동진]나라와 송[남송]나라가 똑같았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갑옷과 투구를 몰아내고 청담을 하게 하는 것도 어찌 택하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가정 병진년[1556] 늦여름에 낭야 사람 왕세정 찬-이 대목은 엄주사부고에는 빠져 있다.)
*何氏語林 言語 序
何良俊曰, 余撰語林, 頗倣劉義慶世説, 然世説之詮事也, 以玄虚標凖, 其選言也, 以簡逺為宗, 非此弗録. 余懼後世典籍漸亡, 舊聞放失, 茍或泥此, 所遺實多. 故披覽羣籍, 隨事䟽記, 不得盡如世説, 其或辭多浮長, 則稍為刪潤云耳.
*하량준, 《하씨어림》 〈언어〉 서문 (원문은 사고전서 전자판, 번역은 김장환 역 다소 수정)
하량준이 말하기를, 나는 《어림》을 편찬하면서 유의경의 《세설》을 많이 모방했다. 그러나 《세설》에서는 일의 선별에 ‘현허(玄虚)’함을 표준으로 삼았고, 말의 선택에는 간원(簡逺)을 종지로 삼아, 이런 것이 아니면 수록하지 않았다. 나는 후세에 전적이 점점 망실되고 옛 얘기들이 흩어져 없어질까 두려우니, 만약에 혹시라도 이런 일이 생긴다면 잃어버린 것이 진실로 많게 될 것이다. 그래서 여러 전적을 펼쳐보면서 [눈길 닿는대로] 일에 따라 기록했으니, 모두 다 《세설》과 같을 수는 없다. 그중에서 혹 언사가 너무 긴 경우에는 약간 깎아내고 다듬었다.
*語林原序 (明文海 권 212, 문징명의 甫田集 17에도 실림)
何氏語林三十卷, 吾友何元朗氏之所編, 類倣劉氏世說而作也. 初劉義慶氏採擷漢晉以来理言遺事論次為書, 摽表揚㩁, 奕奕玄勝. 自兹以還, 稗官小說 無慮百數 而此書特為雋 永精深竒 逸莫或繼之 元朗 雅好其書 研尋演繹 積有嵗年 捜覽篇籍 思企芳躅 昉自兩漢迄扵宋元 下上千餘年 正史所列傳記所存 奇蹤勝踐, 漁獵靡遺 凡二千七百餘事 捴十餘萬言 類列義例, 一惟劉氏之舊, 而凡劉所已見, 則不復書.
品目臚分, 雖三十有八, 而原情執要, 寔惟語言為宗. 單詞隻句, 往往令人意消, 思致淵永, 足深唱嘆. 誠亦至理, 攸寓文學行義之淵也. 而或者以為摭裂委瑣, 無所取裁, 骫骳偏駮 獨能發藻飾 詞扵道徳性命, 無所發眀. 嗚呼! 事理無窮, 學奚厎極. 理或不眀 固不足以探性命之藴 而辭有不達道 何從見是. 故博學詳說, 聖訓攸先修辭立誠, 蓄德之源也. 宋之末季 學者牽扵性命之說 深中厚黙 端居無為 謂足以涵養性真變化氣質 而考厥所存 多可議者 是雖師授淵源 惑扵所見 亦惟簡便, 日趨偷薄自畫, 假美言以䕶所不足, 甘扵面墻, 而不自知, 其堕扵庸劣焉爾.
嗚呼! 翫物䘮志之一言, 遂為後學之深痼, 君子盖嘗惜之. 元朗扵此, 真能不為所惑哉. 元朗貫綜 深愽, 文詞粹精, 見諸論撰, 偉麗淵宏, 足自名世. 此書特其緒餘耳. 輔談式藝, 要亦不可以無傳也. 辛亥四月之望, 文徴眀書.
*문징명, 《하씨어림》 서문
《하씨어림》 30권은 내 벗 하원량(하량준)씨가 편찬한 것으로 대체로 유의경의 세설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다. 전에 유의경씨가 한나라에서 진(晉)나라 이래의 논의와 유사(遺事)를 채집하여서 논정하고 편차하여 책으로 만들었으니, 그 범위를 드러낸 바가 혁혁하고 심오하고 대단하였다. 이때 이래로 패관소설이 무려 백으로 헤아리게 되었는데, 이 책(세설신어)은 특히 훌륭하여 매우 정묘하고 깊이가 있고 기이하여 이 책을 계승할 자 없을지 모르겠다. 원량씨가 이 책을 사랑하여 깊이 연구하기를 수 년간 하였다. 여러 서적을 찾아 읽고 옛 현인의 발자취를 생각하여 바야흐로 양한(兩漢) 시대부터 송원(宋元)에 이르는 천여 년에 걸쳐 정사에 수록된 열전에 기록된 바와, 특이한 자취와 훌륭한 행적과 물고기 잡고 짐승 사냥하는 일까지 남김없이 모아 모두 2700여 사안을 10여만자로 만들었다. 이를 종류대로 열거하여 하기를 오로지 유의경의 옛 책의 방식대로 했고, 유의경이 이미 보았던 것은 다시 기록하지 않았다.
편목을 순서대로 나눈 것은 비록 38편이지만, 실정을 궁구하고 요점을 파악한 것은 진실로 오직 언어를 종지로 삼았다. 한 단어와 한 구절만으로도 종종 사람의 마음을 풀어주고 심원한 생각에 잠기게 하니 깊은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진실은 또한 지극한 이치로서, 문학과 행의(품행과 도의)가 깃들여 있는 연못이다. 그런데 혹자는 그 책이 자질구레한 것만 따져서 취할 것이 없다고 하거나, 글에 굴곡이 있고 치우침이 있으며 훌륭한 말로 문장을 꾸며서 거기 나온 표현이 도덕이나 성명(性命)에 관해서는 드러낸 바가 없다고 한다.
아! 사물의 이치는 무궁하니, 학업에 어찌 끝이 있겠는가. 이치가 혹 분명치 않으면 진실로 성명에 관해 온축한 것을 찾기에 부족하고 표현에 도알한 도가 없다면 무엇으로부터 이것을 보겠는가. 그러므로 박학하고 상세한 설명에 대해서 성인의 가르침에 이르기를 “표현을 다듬어 진실을 성립시킨다(修辭立誠)” 했으니 이것이 덕을 쌓는 근원이다. 송나라 말에 학자들이 성명의 설에 이끌려 깊이 들어앉아 침묵하고, 단정히 앉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을 일러 이것이 충분히 본성의 참된 것을 함양하고 기질을 변화시킨다고 하면서, [자신에게] 보존된 바를 살펴보면 논의할 것이 많다고 했던 바 있다. 이는 비록 스승으로부터 받은 연원에 관하여 [자기들이] 본 바에 미혹된 것이지만, 또한 간편한 것을 생각하여 날마다 투박한 데로 나아가 스스로 한계를 긋고 좋은 말을 빌어 자신들이 부족한 바를 방어하고 벽 앞에 얼굴을 마주하는 일을 기꺼워하고서도 스스로 알지 못한 것이니, 용렬한 지경에 떨어진 일일 뿐이다.
아아! 완물상지라는 말 한 마디가 마침내 후학들의 깊은 병통이 되었으니 군자는 이것을 일찍부터 애석하게 여겼다. 하원량은 이에 대해 참으로 미혹된바 없을 수 있겠는가. 하원량이 이해한 바가 깊고 넓어서 글은 정밀하고 아름답고 깊으니, 충분히 절로 세상에 이름날 만하다. 이 책은 다만 그 일부일 뿐이다. 그 밖의 이야기나 기예에 대해서도 전해짐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신해년(1551) 4월 보름에 문징명이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