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_성소부부고

상원군 왕총기 (365자)

nicole0301 2020. 1. 7. 11:49

상원군 북쪽 15리 되는 곳에 왕산(王山)이라는 마을이 있다. 마을 북쪽에는 산이 우뚝 솟아 있는데 나무 없이 민둥한 모습이고 이름은 '왕총(王冢)'이라 불린다. 정미년(1607) 7월에 크게 비가 와서 왕총(산)이 무너졌다. 마을 사람 조벽(趙璧)이라는 자가 어려서 중이 되었는데 조금 글자를 이해할 줄 알았다. 조벽은 왕총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고용인들을 데리고 그곳에 가서 살펴보았다. 그러자 무덤 깊이가 2장(丈)쯤 되고, 벽돌에는 꽃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무덤의 네 모퉁이를 둘러 묘도(隧)를 내지 않았고, 돌로 덮개를 만들어 놓았다. 덮개를 들어올려 보니, 청색 옥돌로 덮어 놓았고, 회로 그 가운데 난 틈을 막아서 도제(陶制)로 된 관을 안치해 놓았다. 그리고 추령(芻靈-풀로 된 인마의 인형)과 목우(木偶-나무로 만든 사람 형상)와, 도자기()와 솥(鼎)과 술잔()을 늘어 놓은 것이 매우 많았다. 묘의 북쪽 방향에는 등잔이 있었는데 기름이 반절쯤 차 있고, 뼈 두 무더기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무덤 남쪽에는 돌종이 흙에 묻혀 있었는데 씻어서 살펴보니 "신명대왕묘(神明大王墓)"라고 하는 다섯 글자가 있는데 자획이 크고 졸렬했다. 

조벽이 부로(父老)들을 모아서 삼태기(흙을 담아 나르는 그릇)와 가래(흙을 파헤치거나 떠서 던지는 기구)로 흙일을 해서 묘에 흙을 덮었다. [조벽의] 꿈에 빨간 옷을 입고 금 허리띠를 두른 신인(神人)이 나타나 조벽 및 그와 함께 일한 사람들에게 두루 사례하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왕총의 신입니다. 당신들로부터 들에 흩어진 뼈(掩骼)를 덮어주는 은혜를 받았으니 마땅히 풍년이 들도록 하는 것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이해 이후 3년간 과연 크게 풍년이 들었고, 노인과 어린아이들 중 병들거나 역병에 걸려 요절하는 자가 없었다. 아! 신비하다. 조벽이 나에게 와서 이상과 같이 말해주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국가(國家)에 서적(圖籍)이 적어서 삼국 시대 이전의 일은 상고할 만한 것이 없다.  신명왕의 호는 고구려사에 보이지 않으니, 그는 주몽의 후예가 아님이 분명하다. 게다가 왕총은 또 성천(成川) 가까이에 있는데, 성천은 옛 송양국(松壤國)이다. 생각건대 아마도 그는 송양국의 왕이었나 싶지만 내 감히 알 수는 없다. 옛날에 제후는 묘도를 내지 않았고, 묘를 만들뿐 능을 만들지 않았다(不陵). 성인(聖人)이 후하게 장례지내는 것을 그르다고 여겼는데, 이 왕총은 묘도를 내지 않은 데다 '묘'라고 칭했으니 예에 부합한다. 금과 보화를 보관해서 도적이 들어오는 길을 열어두지 않았으니 지혜롭다(智). 또 능히 백성에게 복을 가져다주어 백성들의 은혜에 보답하였으니 인(仁)하다. 지혜롭고 인하고 예를 알았으니, 살아서는 영명한 군주가 되었고 죽어서는 명철한 신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안타깝게도 역사가(史氏)가 그를 빠뜨리고 그의 이름을 드러내 놓지 않아서 그대로 기록이 소루해졌으니, 이상의 내용을 통해 석실(石室-고분 안의 돌로 된 방, 즉 무덤을 가리킴)의 유품을 보충한다. 

*상원군에 실제로 고분군이 있다. 평양시 상원군일대의 고구려무덤 조사발굴보고(라명관, 조선고고연구19863, 사회과학출판사) (출전: 민족문화대백과)

다음은 문화재청의 <조선고고연구해제집 pdf 주소> 1권의 50쪽에 나온다. 

https://www.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jsessionid=rE7LtbNyTCnghEZy76j49I1a5XkDTKG9x1oJCkW2qTXFeZevMMGbYmm4kAk15caW.new-was_servlet_engine1?nttId=62406&bbsId=BBSMSTR_1021&pageUnit=10&searchCnd=&searchWrd=&ctgryLrcls=&ctgryMdcls=&ctgrySmcls=&ntcStartDt=&ntcEndDt=&searchUseYn=&mn=NS_03_07_01

*묘이불능(墓而不陵): 제후는 묘만 만들고 능을 만들지 않는다는 말은 찾아지지 않는다.

정확히 일치하는 구절은 아니지만,  참고로 《예기‧단궁 상(禮記檀弓上)》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고 정현의 주석이 다음과 같다. 옛날에 묘를 하되 분을 만들지 않았다"; 정현 주: "묘는 조역(무덤이 있는 지역)을 말한다. 지금의 봉영을 말한다. 옛날이라 함은 은나라 때를 말한다. 흙을 높이 쌓은 것을 '분'이라 한다."(古者墓而不墳鄭玄注謂兆域今之封塋也謂殷時也土之高者曰墳。)” (공자가 방(防) 땅에 합장을 하고 말하길, '내 들으니 옛날에 묘를 만들고 분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나는 동서남북을 떠돌아다니는 사람이므로 표지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4척 높이의 봉분을 만들었다는 이야기)

*성인이 후장을 그르게 여겼다. 

<논어> 선진 편 10장에 관련 일화가 있다. "顔淵死어늘 門人欲厚葬之한대 子曰 不可하니라. 門人厚葬之한대 子曰 回也視予猶父也어늘 予不得視猶子也하니 非我也夫二三子也니라"

*엄격지혜(掩骼之惠): <예기 월령>의 다음 기록을 참조. "孟春之月掩骼埋胔。(3월에는) 드러난 뼈와 시체를 묻어준다." (나라에서 백성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의미로도 쓰임) 

 

*피터 버거의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에 나오는 중국인 무당이 신을 대하는 자세와 비슷하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