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천 (1995) 허균의 시화비평 연구 (학산초담과 성수시화)
박수천, 「許筠의 詩話批評 연구」, 한국한시연구 3, 한국한시학회, 1995.
-하루에 수만 글자를 외웠다는 말은 「답이생서」에 나온다.
-함열 유배시 자기 문집을 편찬하면서 1597년 이전의 글은 모두 습작으로 여겨 문집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234쪽)
-학산초담에는 모두 108개의 기사가 실려 있다.
2장 학산초담
-패림 초록본. 매 기사마다 첫 글자를 한 칸 위로 올려 기사 간 구분이 타 시화집에 비해 아주 분명한 편이다.
*학산초담 내용 특징
-배열 방식: 원칙 없이 배열했으나 간혹 유사 내용 기사를 모아 기술한 점도 있음. 67-71화까지는 명대 문인 고나련 기사, 73-78화는 漂海를 소재로 한 기사를 연속 서술. (235쪽) 대상 인물보다 소재나 내용 중심으로 기술.
-거론 작가: 세조조에서 선조조에 이르는 시기의 작가와 작품 모두 포괄
-변증류와 원론류 시화가 극히 드물다. 그보다는 허균이 개인적으로 관심 가졌던 일화 기술. (236쪽) 한호의 글씨가 중국에서도 호평 받았다는 등. 자신이 피신해 살고 있는 강릉 출신 인물들 따져 봄. 그렇다고 무의미한 한담 거리가 아니라 일정한 의미 부여 통해 자신의 비판적 견해를 표하고자 했음. (누대에 제영한 현판들, 하늘이 좋지 못한 시가 높은 벽에 걸려 있음을 싫어했기 때문일 것)
-疏頭詩: 성수시화에도 전반적 성격과 달리 예외적 기사로 실려 있음. “어찌하면 만 길의 큰 빗을 얻어서 백성 머리 다 빗어 남은 이 없게 할까.” 성수시화에서는 선비의 이름을 尹勉이라 했음. 작가의 신분에 차별을 두지 않고 내용 중심 찬술 태도를 견지. 국조시산 편집에까지 이 태도가 이어져 학산초담에서 거론한 이들 인물 작품이 거의 모두 국조시산에 재수록됨.
-품평 기준으로 唐詩 지향.
3장 성수시화의 記事 선택
-1611년 허균의 함열 유배시에 찬술.
-순서가 학산초담-국조시산(1607)-성수시화(1611). 스스로도 만족했기 때문에 문집에 수록.
-허균은 <성수시화인>에서 모두 96관이라고 했으나 현존하는 어떤 이본도 96개기사를 채우지 못하고 있다. (241쪽)
규장각본 80개, 국중본과 시화총림본에 81개, 양파담원본에 모두 82개. 기사 내용과 차례는 동일하나 필사 과정 중에 두 개의 기사를 하나로 합쳤거나 또는 하나의 기사를 두 개로 나누기도 한 차이이다. 양파담원본은 시화총림본을 근저로 삼았는데 시화총림본의 75화(국중본의 74화-申櫓의 기사와 75화 이옥봉의 기사)만 두 개의 기사로 분리해 두고 있다.
본고는 비교적 기사 간 구분이 명석한 국중본 81개 기사에 순차번호를 부여해 주자료로 이용. (허경진은 성수시화를 번역하면서 –1982년 허균의 시화, 민음사- 모두 89개의 기사를 만들었으나 무리한 분단이 많다. 국중본의 51·52·53화도 규장각본에는 하나의 기사로 되어 있고 72·73화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규장각본을 주자료로 이용하기 어렵다.)
-배열: 개별 기사를 대상작가의 시대순 배열. 다만 마지막 73화부터 81화까지는 시기적 순서에 따른 배열을 벗어나 대상 작가의 면모가 독특한 경우를 따로 모아 기술.
-허균은 대상 작가의 문학사적 비중 뿐 아니라 시적 성향까지도 기사 선택에 고려했음. 조선시대 기사 분량을 감안해 적당하게 조절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김부식, 임춘, 이곡 등 고려 조 몇몇 핵심적 작가를 거론하지 않고, 문학사적 비중이 낮은 이견간, 조서 등을 선택한 데에는 허균 자신의 시각이 작용했다고 하겠다
국조시산에 선발한 시인이 170명에 이르는 것과 비교할 때 분량 문제를 넘어 더욱 강한 비평의식이 성수시화의 기사선택에 작용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성수시화에도 학산초담처럼 품평류 시화가 주종을 이룬다. 순수하게 일화류 시화라 할 수 있는 기사는 49화(오세억이 저승에서 김인후 시를 받아왔다)와 71화(호남 노인의 소두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시화집이 이미 ‘시론 중심 시화’의 단계로 넘어가 있음을 뜻함. 변증류와 원론류도 많이 싣지 않았다. 그래서 품평류 시화를 중심으로 성수시화의 비평의식을 분석할 수밖에 없다.
-허균은 문학사의 흐름을 의식하면서 기사를 선택했고 대표적 작가의 작품을 들어 그것의 문학성을 품평해 보임으로써 자신의 비평 시간을 드러내었다.
4장 시화 비평의 양상과 전모
학산초담이 대상으로 한 시기를 성수시화가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지.
-학산초담 기사: “무절공 黃衡(산서 출신) 奇壯하여 그 사람을 생각해 볼 수 있을 듯하다. 어찌 이 사람의 재주가 옛날에 미치지 못하겠는가.”
-성수시화에만 있는 기사는 학산초담에 비해 시사적 안배가 고려된 점이 돋보인다. “박은의 복령사. ... 박은의 시가 비록 正聲은 아니지만 嚴縝하고 勁悍하다.”
-허균이 당풍을 지향했어도 학산초담에서 직접 당시를 대비하여 작품을 품평한 경우는 많지 않다. 즉 학산초담에서는 당시를 지향한 허균의 비평시각이 구체적으로 표명되지는 못한 것. 이에 비해 성수시화는 대다수의 기사가 성당 중심의 당시를 직접적 작품 평가 기준으로 활용하고 있어 대조적이다.
-학산초담에는 작품 자체의 문학성보다 허균 자신의 개인적 관심사가 시화비평에 반영. 성수시화에는 시사 정리에 대한 의식이 기사선택과 시화 비평에 작용.
-성수시화는 唐詩를 적극적 비평준거로 활용하고 있는점, 지적해 두어야 할 면모.
일화류 시화보다 작가와 작품에 대한 심도 있는 품평류 시화에 비중을 두고 이것으로 시화사적 전환에 따른 시론 중심 시화를 지향하고 있어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