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논문들

노경희 (2009) [요지와 심사평] 17세기 전반 명-조선 문학 교류 및 조선 한시의 재발견 (교토대)

nicole0301 2020. 9. 14. 23:21

*박사논문 요지

 

본 논문은 17세기 전반에 1) 명과 조선의 문학 교류 및 2) 조선 문단에서 명 문학의 수용 방식, 그리고 3) 그에 관해 행해진 조선 한시에의 인식의 변화에 대해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특히 본 논문에서는 이 세 가지가 상호 연계되어 있음에 주목하여, 그 관계를 밝히는 것을 주안점으로 한다. 그 결과, 이 시기의 명과 조선의 문학 교류가 일방적인 문화 전파와 수용이 아니고,상호 문학에 대한 관심에 기초하여 진행된 쌍방적교류였던 것을 확인하였다. 또한 조선 문단의 명 문학 수용도 무조건적인 수용이 아니고, 기존에 조선 문단의 전통에 부합하는 비판적이고 독자적 방식으로 행해진 것임을 밝혔따.

최종적으로는 이상의 교류와 수용에 관하여 조선 문인이 조선의 한시를 돌아보면서, 그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을 논하였다. 이상의 결론에 대하여 이상의 결론에 이르기까지 우선 양국간의 문학 교류에 관한 문인들의 교류, 교류의 경로 등, 문학 주변부에 주목하여, 당시의 문화교류의 구체적 양상을 파악하고자 한다. 또 명 문학의 수용에 관련하여, 서적의 유입과 재편집의 과정을 추적하여, 조선 문단이 명 문학을 수용하는데 있어서, 비판적 관점에 기초하여, 취사 선택하여 받아들였던 양상을 고찰하는 것을 지향하였다.

본론의 연구대상은 크게 세 가지 부분으로 나뉜다. 곧 첫 번째로 17세기 전반에 행해진 명-조선 간 문학 교류의 구체적 양상에 대하여, 두 번째로는 조선 문단에 있어서 명 문학의 비판적 수용 방식에 대하여, 세 번째로, 그에 기초하여 나타난 조선 한시에 관한 인식의 변화에 대한 것이다.

1부에서는 명과 조선 문인의 교류와 문학 교류 활동을 주 대상으로 삼아, 당시에 양국의 무학 교류 활동의 실태를 고찰하였다. 양국 문인의 교류 활동에 관하여 본 논문에서 주로 다루는 시기는 일본의 전쟁이 끝난 1598년부터 광해군 시대가 끝나는 1623년까지로 한정하였다. 본 논문에서 특히 이 시기에 주목한 이유는 그 다음 시대의 역사적 배경이 되기 때문이다.

1592년에 돌연 일본의 침략을 받은 조선 정부는 명 조정에 원군 파병을 요청하게 되었고, 그해 12월에 명으로부터 대규모의 군대가 조선에 파견되었다. 명의 원군에 의해 전세가 역전되었는데, 1593년에는 일본과 강화 교섭에 들어갔고, 전쟁은 휴전을 맞았다. 하지만 1597년에 일본에 의한 2차 침략이 행해져, 명 조정도 다시 군대를 파견했다. 그 후 1598년에 종전이 되어, 명군은 1600년까지 순차적으로 조선으로부터 철수하게 되었는데, 그로 인하여 몇 년이고 조선에 체류하였고, 2차에 걸쳐서 조선에 파견된 일에 의하여 명 장수들과 그 휘하의 명 병사들은 조선 생활에 적응하면서 조선 사회와 문화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전쟁 종결 후 1598년부터 1600년 사이가, 가장 집중적으로 조선의 것을 배우려는 시기였다. 그렇게 됨에 의하여 본 논문에서는 1598년부터의 교류 활동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 이래로 광해군 시대(1608~1623)가 막을 내린 1623년의 인조반정을 하한선으로 하였다. 결과적으로 말한다면, 본 논문에서 가장 주목한 시기는 선조 말기부터 광해군 시대이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이 시기는 200년여에 걸쳐 안정을 지켰던 조선 사회의 질서가 전란을 겪어 붕괴되었고, 정치·경제에 있어서도 비상한 곤란을 맞은 시대였다. 그렇지만 한 방면, 문화와 사상의 방면에서 오랫동안 사회적으로 안정되어 경직된 분위기로부터 탈피하여, 새로운 변화를 모색할 수 있었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특히 명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하여 들어온 새로운 문화사상은 조선 지식인들에게 종래의 고착된 하눈 태도로부터 벗어나 다양한 학파의 이론에 접하는 기회를 주었다.

외교 면에서도 광해군 시대는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유지의 정책을 취한 시기였는데, 명과의 의리보다 현실적 상황에 대응하여 실리를 취한 시기였다. 그런 현실적 이념에 편향된 시대적 분위기 가운데, 조선 문인들도 학문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가장 개방적인 태도를 보여줄 수 있었다. 그래서 인조 반정 이래 조선 지식인 사회가 명과의 의리를 강조하였고 성리학적 질서를 강화하는 등 보수화 된 데 비하여, 상당히 다른 면이 보인다. 또 중국과의 교류에 대해서도 인조 반정 이후 새롭게 성립된 청조를 오랑캐의 나라라고 낮춰 보아 문화 교류를 거부한 데 비하여, 광해군 시대에 활동한 중국과의 교류 활동은 비상한 주목을 요한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고려한 위에 본고에서는 전쟁이 끝난 1598년부터 인조 반정이 행해진 1623년까지의 명과 조선의 문학 교류 활동에 착목하였다.

 

그럼 여기서부터 본 논문의 구체적 진행에 관해 설명하겠다. 우선, 전란 이래부터 17세기 전반까지 행해진 명과 조선의 문인의 교류와, 문학 교류의 구체적 양상에 관하여 고찰하였다. 당시 조선 문인이 명 문인과 교류할 수 있었던 것은 명 사행과 明使·명 장군의 접반 활동이 유일한 기회였다. 1부에서는 이 사행이나 접반과 같은 외교 활동을 통해 행해진 문학 교류 활동에 관하여 고찰하였다.

1장에서는 명 문인들의 조선 방문에 의하여 조선 문인들이 그들과 교류하는 기회를 얻은 접반 활동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이 시기의 접반 활동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전통적 접반 활동으로서의 明使 접대 활동이고, 두 번째는 이 시기의 특별한 사례가 되는 명 장군들에 대한 접반 활동이다. 하지만 이 장에서는 명사 접반활동을 고찰하였고 명 장군에 대한 접반에 관해서는 제3부에서 다루었다.

사신접반 활동에 대해서는 17세기에 들어와 1602, 1606, 1609년의 3회에 걸쳐 명나라 문관 출신 사신들이 파견되는 역사적 사실에 주목해, 그들을 접반하는 가운데 행해진 양국 문인들의 교류와 정보 교환에 대해 고찰하였다. 이것을 통해 양국의 교류가 일방적인 문화 전파나 수용이 아니라 상호 관심에 기초하여 쌍방향적으로 성립된 것을 확인하였다. 또 접반 초기에 행해진 양국 문인들의 교류가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그 후 수십년에 걸쳐 계속적으로 행해진 것을 밝혔다. 후대의 친교는 이 때 이래 양국 외교 문제 해결에도 큰 역할을 하여, 그들의 문학 교류를 통하여 양국 문단에 여러 작품이 소개 되는 등, 후세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던 것이 확인된다.

다음 2장에서는 17세기 전반 조선 문인들의 명 사행에 관하여 고찰했다. 그 중에서도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알려진 이정귀, 허균이 명 사행을 맞았다. 이 두 사람은 당시의 명과의 외교 활동에 있어서 사신, 접반관으로서 가장 활약한 인물들이다. 이 장에서는 문학 교류에 관계된 그들의 대표적인 명 사행을 골라, 그것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우선, 당 시기의 외교 활동에서 가장 그들의 능력이 알려진 이정귀의 사행에 대해 고찰했다. 그들은 그는 자신의 문서작성 능력으로 명인과 교유 관계를 구사하여 명과 복잡한 외교 문제의 해결에 크게 활약한 데다, 그 능력에 의하여 정계에서 고위직에 오른 인물이다. 또 명 사행 기간 중에 명 문인과 詩文을 주고 받아, 자신의 시집을 명 문단에서 출판하기도 하고 활발한 문학 활동을 행했다. 그의 사례를 통하여 문학활동과 외교 활동이 연동된 것을 고찰할 수 있다. 이어서 허균의 1614~1615년의 2차에 걸친 사행에 대하여, 그가 수천권에 달하는 명나라의 신간서를 구입하여 온 것을 살펴보았다. 그것을 통하여 정보의 교통에 직결된 서적의 유입이, 명 사행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어서 제2부에서는, 이상의 교류활동을 통하여 조선 문단에 들어온 명 문학이 어떤 방식으로 수용되었는가에 대해 검토하였다. 특히 그 수용 방식에 관하여 조선 문단의 비판적이고도 독자적인 태도에 주목하고자 하였다. 구체적인 방법으로서는, 시문선집의 비판적 이해와 재편찬 작업, 문학론의 수용에 관한 사례를 선택하여, 문학사의 흐름 가운데서의 사례가 갖는 의미를 탐색하였다. 또 필요에 따라 18세기 에도 문단의 상황과 대비하기도 하였고, 양국의 명 문단 수용 상황의 차이를 시야에 넣고자 하였다. 이에 의하여 각국의 문단 상황에 따른 명 문학 수용이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음을 더욱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우선 허균의 한시비평 작업을 중심으로 명대 시론, 특히 전후칠자의 시론이 조선 문인들에게 어떻게 수용되었는지에 관하여 고찰하였다. 허균은 역대 중국 시선집을 검토하여 그것을 자기의 기준으로 재편집하는 작업에 열의를 보였다. 여기에서는 그 작업의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문학론에 주목하였다. 허균은 당시 명 문단에서 유행한 전후칠자의 문학이론을 섭렵한 가운데 어느 정도 그 영향을 받았고, 동시에 조선 문단의 전통을 이어 받아 명 문학이론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또 한시 비평에 대해서도 자기의 기준을 견지하면서 거기에 크게 비상한 강조를 하였다. 이러한 허균의 사례를 통하여 당시 조선 문인들의 명대 문학론에 대한 비판적 수용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다음으로 17세기 전반의 조선 문단에서 중국 당시선집의 유행과, 다음으로 조선 문인에게 있어 독자적인 당시선집을 편찬한 상황에 주목하여 중국의 시문선집이 조선에 어떻게 수용되었는가에 대해서 고찰하였다. 여기에서는 허균과 이수광의 당시선집 편찬 작업을 중심으로 명대 전후칠자의 성당시 존숭의 시론에 영향 받은 것과, 조선의 독자적인 당시 평가 기준이 모색된 것을 주목하였다. 이렇게 비판적이고도 독자적인 수용태도는 동시에 전후칠자의 영향권에 있었던 에도 문인 腹部南郭이 당시의 학습서로서 이반룡의 당시선을 선택하였고, 이후 18세기 에도 문단에서 다양한 형태의 당시선화각본이 출판된 사정과 비상하게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양국 문단에 있어 중국 당시선집의 수용, 재편집 방식의 상이점을 분석하여, 동일한 서적이 각국의 문학적 환경에서 지닌 특수한 의의에 관해 고찰하였다.

 

최후의 제3부에서는 제1, 2부에서 고찰한 명과의 문학 교류와 명 문학의 비판적 수용이 결과적으로 조선 한시의 인식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에 관해 고찰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우선 조선 한시가 명 문단에 다수 소개된 것, 또 조선 문단에 조선 한시 정리 작업이 행해진 것에 주목하였다.

당시 양국의 홀발한 문학 교류에 대해서, 명 문단에 조선 한시가 다수 소개 되었다. 특히 1598년 전쟁이 종결되자, 조선에 체류하던 명 장군들이 주도하여 역대 조선 한시선집이 여러 번 편찬되었다. 이 시기 명 문단에 소개된 조선 한시는 이후 명청 시선집 편찬 작업에 있어 조선부분에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되었고, 조선 한시를 명 문단에 알리는 큰 역할을 하였다. 이때 명 문인들은 중화 문명의 일부로서 조선 한시문을 인식했고, 그것은 조선 문인들에게 자국 문화에 자부심을 갖는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본고에서는 허균의 조선 시문 소개 활동에 주목하여 자기의 시재를 한문학 본 고장에 보여주고자 한 조선 문인의 적극성과, 중화문명의 주변부에 넓게 관심을 받은 명 문인들의 호기심을 호응하여, 양국 문학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진 것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급격한 교류의 확대는 조선에 있어 환영받은 것만은 아니었다. 조선 문인들의 적극적인 시문 소개 활동은 그 과정에서 명과의 외교 충돌이 일어나는 것을 우려(懸念)한 조선 정부에 의해, 제한이 가해지게 되었다. 그 일례로서 본고에서는 1620년 이정귀가 북경에 갔을 때, 당시에 자신의 시집을 출판하기 위해 조선 조정에 소동을 일으킨 사건에 주목했다. 이러한 명과의 교류 과정에서 일어난 조선 정부와의 알력을 통해서 당시의 문화 교류가 순조롭게 진행된 것만은 아닌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그러한 교류 활동을 통하여 17세기 전반의 조선 문단에서 한시 평가에 관한 독자적 기준이 마련(用意)되어, 그것에 기반하여 조선 한시를 재평가하기도 하고 조선 한시선집과 시화집 편찬작업이 적극적으로 진행된 상황을 고찰하였다. 이것은 명과의 문학 교류가 최종적으로 조선 한시의 발달에 준 영향을 논한 것이기도 하다. 더불어 이것에 대한 명 문단과의 문학 교류가, 결국은 조선 한시의 재발견을 일으킨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런 구체적인 사례를통해 전란 후의 정부 사업으로서 편찬된 해동시부선, 허균 개인이 편찬한 시선집 국조시산같은 시화집 편찬의 경위에 관해서 고찰하였다. 이러한 작업 과정에서 조선 한시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생겨나고, 조선 한시의 가치가 재인식된 것에 주목하였다. 바꿔 말하면, 중국의 시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가운데 조선 문인이 되는 독자적 한시 비평 기준이 형성되어, 그런 기초에 의하여 조선 한시를 평가한 때에, 그 수준이 한시의 유장한 전통 가운데에서도 당당하게 일원의 자격을 갖게 되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러한 인식에 기반하여 중국의 詩文만이 아니라 조선의 한시도 본격적인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요약하면, 본고에서는 16세기 말의 전쟁을 거쳐 활발하게 이루어진 명과 조선 간 문학 교류의 실태를 구체적으로 고찰하였고, 그 후 명 문학이 조선 문단에 비판적으로 수용된 방식을 분석하였고, 그에 의한 교류와 수용을 통하여 조선 한시에 대한 인식이 변해간 과정을 추적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일견 개별적인 사건에서 드러난 문화 현상이지만, 상호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을 드러내 주고, 외래 문화의 수용과 조선 독자적 전통이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 이후의 문단에 새로운 것을 출현하게 하였는지 검증한 것이다. 이에 17세기 후반 이후 조선 문단에 드러난 개성 추구의 움직임이라든가, 전 시기 명 문학 수용, 조선 한시의 재발견이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밝혔고, 17세기 전반과 17세기 후반 이후 시단의 상반된 면을 천착한 선행 연구에 대하여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였다.

 

*논문심사 결과 요지 (이 부분은 특히 오역이 있을 수 있다)

중국이라는 거대하고도 강력한 문화권의 주변에 있는 나라들은 그러한 수용을 하면서 얼마나 자신의 문화를 구축하였는가에 있어서, 이런저런 복잡한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동아시아 문화권이라는 말로 다 덮을 수 없고, 고유한 역사, 문화 등의 이런저런 요인에 의하여 이런저런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 논문은 조선이 명의 문학을 어떻게 수용했는지, 또 그것을 통해 조선 한문학이 어떻게 이루어져 갔는지, 그런 과정을 밝히고자 했다. 대상 시기는 17세기최초의 25년 정도이다. 이것은 그 기간이 일본의 침략에 대한 명 원군이 대량으로 파견된 때 명과 조선의 상호 이해가 급속하게 깊어졌고, 또 그 전후 폐색적인 상황과는 다르게 비교적 자유로운 수용이 이루어져, 교류가 활발한 시기를 만났기 때문이다.

논자는 우선 명으로부터의 사절과 그 접대를 맡은 조선 문인들의 교류부터 시작한다. 명 사신으로서 파견되는 사람들은 대개 환관이 그 임무를 맡았는데, 17세기 초 시기에만은 집중적으로 문인 관료가 사신으로 방문하였다. 이에 대해 조선 측에서도최고의 문인을 데리고 그에 응했다. 이에 명과 조선의 문인들의 교류가 개화하였다. 그들은 시문을 응수함을 통해서 상호 인식을 넓혔고 이에 정치적 용무를 넘어서 사람 간의 진실한 결교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교류가 가능하게 된 것은 중국 고래의 문인 상호간의 전통이 조선 문인들 간에도 공유되어, 공통의 문화적 기반에서 문인 교류를 향수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주지번, 조선의 허균, 두 사람의 교류를 자세히 서술하여 국경을 넘어선 문인으로서의 일체감이 공유된 모습을 재현하였다.

그러한 개개인의 교유를 통해서 명 문학과 문학관이 조선에 전해졌지만, 그것은 무비판적 수용이 아님을 논자는 강조하였다. 명의 전후칠자의 고문사파 - ‘문장은 진한, 시는 성당을 창도한 문학관이 이어진 시기에 있어서, 이것이 그대로는 수용되지 않았다. 특히 허균은 성정을 근간에 둔 독자적 비판 기준을 중시하여, 그 점에서는 중국에서는 고문사파 다음에 일어난 원굉도의 시관을 先取한 면이 보인다. 이러한 비판적 수용은 일본에서는 오규 소라이, 핫토리 난가쿠(腹部南郭), 蘐園派가 오로지 고문사파의 시관을 창도했던 것과 대비적인 점을 논자는 지적하였다. 더욱이 여기에는 시기, 계층 등 다른 요소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중국 수용에 관한 조선 일본의 상이함에 관련해서는 추후의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명 사절에게 받은 것 외에, 조선으로부터 명에도 문인들이 보내져서, 이정귀는 외교 활동과 아울러 문학에 대해서도 시문을 응수하고 자신의 시집을 출판하는 등 적극적 활동을 전개한 것을 상세히 조사하였다. 그러한 書物이 조선의 장래에 미친 영향도 중시한 성과가 있다.

이러한 상호 왕래 외에 논자가 강하게 주장한 것은 조선 문인이 중국으로부터 시문을 학습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한시문도 중국에 전해져 역방향의 현상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종래의 이해를 뒤엎는 지적인데, 근년 발견된 조선시선, 허균의 누이 난설헌집의 간행, 또 이에 관한 중국 문인의 언술 등, 여러 자료에 그것이 나타난다. 이것이 중국에 큰 임팩트를 준 것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해도, 논자가 말한 것처럼, 조선 시문에 대한 중국의 인식의 변화를 보여준 점은 있다.

17세기 초두에는 명-조선의 문화 교류가 매우 활발한 시기였던 것도 알려져 있지만, 이 논문은 교류의 구체적인 사실을 처음으로 밝혔고,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서 양국 문인들의 인식이 변화해 간 과정까지 설명하는데 미친 것은 중국 조선 문화교류사 연구에 새로운 지식을 더해준 것이다.

이 교류를 탐색함에 있어서 명 문학사조, 조선과 같은 식으로 유입된 별도의 과정을 에도 시기의 상황 등 주변의 사건들을 고려한 점도 선행 연구를 넘어섰다. 이에 대해서는 논자는 그런 분야 연구 성과를 소화하여 솜씨 좋게 정리하였는데, 다만 자신의 연구에 의해 도달한 견해는 아닌, 적이 표층적인 경향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무엇보다 명의 문학사조, 특히 고문사파의 실태는 현재 학계에서 파악하고 있는 정도의 단순한 정도는 아니지만, 에도 시기의 중국문학 수용 양상도 반드시 아주 완전하게 밝히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어느 것이나 커다란 문제여서 지금 모두를 요구하는 것은 어렵지만, 논자의 연구가 금후 그런 방면으로 진행된다면, 이에 대한 넓은 시야로부터 조선과 중국의 교류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기를 기대한다.

이상, 심사한 바와 같이, 본 논문은 박사(문학)의 학위 논문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인정된다. 이에 2009921, 조사위원 3명이 논문 내용과 이에 관련된 사안(事柄)에 대해 구두 질문을 행한 결과, 합격을 인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