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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관 (2007) 허균과 명대문학 (in 『안쪽과 바깥쪽』)

nicole0301 2020. 8. 31. 21:07

*강명관, 「허균과 명대문학-허균문학 연구에 대한 반성적 고찰」, 『안쪽과 바깥쪽』, 소명출판, 2007, 65~95.

 

1장. 서론

허균 연구에 대한 종전의 두 견해가 있어왔다. 

① 독창과 진보의 아이콘 (주류 견해) ② 양명좌파와 공안파의 영향을 받은 인물 (비주류 견해)

이상 두 견해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하려 함. 

 

2장 허균의 의고파에 대한 경도 (→독창과 진보의 아이콘이 아니란 얘기) 

 

-허균 문학사상의 파격성의 근거가 되었던 자료: 「문설」, 「시변」, 「문파관작」

-「문설」: 대다수 논자들은 의고적 창작관에 대한 비판과 독창, 개성 존중을 허균 문학관의 핵심으로 도출하였음. 하지만 허균이 「문설」에서 말하는 의고적 창작관에 대한 비판은 (문학 창작의 일반적 차원에서 발언된 것 아니고 비평사의 특수한 맥락에서 나온 것.) 중국 의고문파의 산문 창작론을 겨냥한 것이 아님.

 

-허균의 명대 문학에 대한 개괄(『학산초담』 “명나라 문장으로 이름을 날린 10대가, 이헌길, 왕백안, 당응덕, 왕윤녕, 왕신중, 동빈, 모곤, 이반룡, 왕세정, 왕도곤...” “명나라 시로 이름을 날린, 하경명, 이몽양. 한 때 잘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변공, 서정경, 손일원, 왕구사. 이우린. 이우린과 왕원미, ...”): 불완전한 것이다. 전칠자와 후칠자에서 왕정상, 강해, 양유예, 종신이 누락, 귀유광도 누락. 당송파와 진한파에 대한 변별적 인식을 결여. 후대의 이식, 김창협, 이의현이 당송파와 진한파를 구분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 (허균의 명대 문학에 대한 개괄이 불완전하다는 것은 오늘날 학자들이 명대 문학에 대해 개념화 하는 것에 비추어 불완전하다는 것으로, 허균 자신이 혹은 허균 당대 사람들이 오늘날 명대 문학을 이해하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명대 문학을 이해한다고 해서 그것을 불완전하다고 재단하는 것은 타당성이 떨어진다.) 

-허균은 전후칠자에 깊이 경도: (『학산초담』 “명나라 사람의 시를 손곡은 하중묵(하경명)을 으뜸으로 여겼고 중형은 이헌길(이몽양)을 최고라고 여겼다. 윤월정은 이우린(이반룡)이 앞의 두 사람을 .. 봉주 왕세정의 말인즉.. 하루는 익지가 율시를 내어 보이며 이것은 중묵의 잃어버린 시네. ... 시는 이익지가 월정에게 올린 작품이다.”)

-허균은 학산초담 저술 이후 주지번과 만났을 때에도 의고문파에 관심이 많았다: (「병오기행」, “엄주를 만난 적이 있느냐. ... 학문과 문장을 공부하는 과정에 대해 물어보았더니 ... 지금 한각에서 시를 잘하는 사람이 누구냐”) 주지번의 답 역시 의고문파 거물 위주임. 이 시기 중국 문단은 공안파가 지배했음. 그럼에도 허균과 주지번의 대화에서 당송파와 공안파는 언급 안 됨. (오늘날 의고파로 불리는 사람들에 대해 관심있다고 해서 그것을 '의고파'에 대한 관심이라고 볼 수 있는가?)

 

-독서편력: 허균의 독서와 편서의 중심에는 예외 없이 의고문파의 저작이 있음. 예) 세설산보주해서. 왕세정에 대한 허균의 높은 평가. (「世說刪補注解序」, “元美文章博達。千古所希。而讚詠是書。吃吃不離口。至爲之手自刪補者。豈無所見而然也”). 허균의 거의 모든 편서는 의고문파의 저작물을 재편집한 것. (예: 『당시선』. 양사홍의 『당음』, 고병의 『당시품휘』, 이반룡의 『당시산』을 저본으로 재편집한 것. 특히 이반룡에 대한 높은 평가. 「唐詩選序」, “其匠心獨智。不襲故不涉套。以自運爲高者。曰李攀龍唐詩刪”; 「明尺牘跋」. 양신이 저술한 『척독청재』에 왕세정이 증보한 『명척독』에서, 장윤이 가장 우수한 것을 뽑아 『고척독』을 엮었는데 허균은 여기에 자신이 수집한 1책을 덧붙여 『명척독』을 만들었음.) (왕세정의 세설신어보 같은 것이 의고파의 스피릿을 담은 책이라고 볼 근거가 있는가? 이반룡의 당시산은 몰라도 세설신어보는 의고적 창작의 지침서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저 청담 모음집, 인물 일화집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나.)

 

-허균의 의고문파 경도를 잘 보여주는 글: 「明四家詩選序」 “明人作詩者。輒曰吾盛唐也。吾李杜也。吾六朝也。...以余觀之。或剽其語。或襲其意。俱不免屋下架屋。而誇以自大。其不幾於夜郞王耶”) 이것을 근거로 반의고적 창작관을 도출해 내는 것은 부당함. ‘명사가시선’이란 이몽양·하경명·이반룡·왕세정 등 전후칠자의 거두들의 시를 편집한 것임. (“時則北地[李夢陽]立幟。信陽[何景明]嗣筏。鏗鏘炳烺。殆與李唐之盛。爭其銖累。詎不韙哉。流風相尙。天下靡然。遂有體無完膚之誚。是模擬者之過也奚病於作者”) 마지막 부분은 특히 전후칠자 비판이 아니라 전후칠자를 무비판적으로 추수하는 작풍을 비판. 특히 “之四鉅公。實天畀之以才。使鳴我明之盛。其所制作。具參造化。足以耀後來而軼前人。夫豈與標榜竊襲者。幷指而枚屈哉”에서 이몽양, 하경명, 이반룡, 왕세정에 대한 예찬이 나타남.

 

-유보 사항: 전후 칠자의 창작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한 것 아니고, 송문의 가치 인정. (77쪽, 「歐蘇文略跋」, “歐之風神道麗情思感慨婉切者。前無古人。長公之弄出機抑。變化無窮。人不測其妙者。亦千年以來絶調。而近世宗先秦西京者。乃薄不爲之。此甚無謂也”) 그러나 송문을 낮게 보는 데 대한 비판 근거는 왕세정과 모곤의 선호에 기인한 것이다. (「구소문략발」, “元美晩年喜讀長公文。茅鹿門[坤] 平生推永叔爲過昌黎。此二子非欺人者也”) 왕세정은 허균의 문학 관련 사유에서 절대적 준거로 작용, 즉 그는 의고파에 경도. (의고파와 당송파의 대립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도 있다)

 

-허균의 시 비평의 두 준거: ①명대 작가와의 비교 ② 唐詩, 특히 성당시와의 비교.

예) 「余以病火動。不克燕行。竢譴巡軍。作長句贈奇獻甫以抒懷」 (성소부부고 2권 병한잡술)

(내가 화기가 동하는 병 때문에 연경에 갈 수 없어 순군에서 견책을 기다리며 장구를 지어 기헌보에게 주어 회포를 편다) 중 “기랑의 입신함이 어찌 그리 꼿꼿한가(奇郞立身何骯髒) / 세상 흘겨보며, 초야에 묻히려 아니하네(傲睨不肯在草莽) / 접때부터 우리들과 주먹 힘을 겨뤘는데 [→우리들을 따르면서] (頃從吾儕角拳勇)/ 우리 세 사람은 그 힘을 감당하기 어려웠지(吾儕三人力難當) / 위로는 노조린, 낙빈왕과 최융, 이교를 포함하고 (上苞盧駱與崔李) / 아래로는 공동(이몽양)과 대복(하경명)을 뒤덮노라 (下掩崆峒大復子)” 이 중 세 사람은 이달·권필·허균을 말한다. [이달이 아니고 이안눌이란 설이 있는데 근거는?] 중요 대목은 “공동과 대복을 뒤덮노라”로 이몽양과 하경명 등 의고문파의 거두들이 비평적 준거로 쓰인 것.

예) [與李蓀谷] 己酉四月, “十王洞, 望高臺, 朴達串, 三古詩 ...若使于鱗見之必置於明刪中” 여기서도 이반룡(于鱗)이 비평의 준거가 되고 있다.

예) 「題黃芝川詩卷序」, “嗚呼。使數公(박상, 정사룡, 노수신, 황정욱)生於海內。則其所造詣。豈在於北地(이몽양)濟南(이반룡)太倉(왕세정)之下。而不幸生於下國(조선)。不克充其才。又不能名於天下後世。湮沒不傳。惜哉”

예) 위에 든 예는 초년의 견해인 것만도 아니다. →「與任茂叔 (庚戌七月)」, “吾謂人曰。茂叔之四六。過於孤雲也。人皆怪罵之。又語人曰。茂叔之文。似王弇州也。人不甚訝之。是無他。貴遠而賤近也。其實弇州之文。遠踵漢兩司馬。俯視孤雲。奚啻儀鳳於燕雀乎。君可自信。毋撓於人可也” (내가 사람들더러 무숙의 사륙문은 최고운(최치원)보다 낫다고 하자 사람들은 모두 괴이하게 생각하여 비난했습니다. 또 사람들더러 “무숙의 문장은 엄주(왕세정)와 비슷하다”고 했더니 사람들은 그리 의아해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옛 사람은 높이 평가하고 근대의 사람은 낮추어 보아서입니다. 사실 엄주의 문장은 멀리 한의 두 사마(사마천과 사마상여)를 숭상[계승]하고 있으니, 최고운을 내려다보는 것이 봉황과 연작의 차이에 그치고 말겠습니까? 그대는 자신을 갖고 납에게 흔들리지[굽히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허균의 대표작 「문파관작」의 경우: 「문파관작」이 수록된 「진주고」 앞에 있는 「광록고(光祿藁)」는 허균이 1606년 예빈시부정으로 중국 사신 주지번을 맞이했던 여름에 쓴 8수의 시를 모은 것. 여기에 ‘讀空同集’(이몽양), ‘讀大復集’(하경명)이 나란히 실려 있음. 「문파관작」은 1607년 3월에 삼척부사에 임명되었다가 5월에 파직되었고 이 때 지어진 것. 그리고 7월에 내자시 정에 임명되어 재직하고 있을 때 지은 시를 모은 것이 「태관고」. 「태관고」에는 ‘讀徐迪功集’(서정경), ‘讀滄溟集’(이반룡), ‘讀弇州四部稿’ 세 편이 실려 있다. ‘병한잡술’은 1608년[1610년] 천추사에 임명되었으나 병 떄문에 가지 못하고 있을 때 지은 시의 모음집. 여기에도 ‘讀邊華泉集’(변공), ‘讀謝山人集’(사진), ‘讀王奉常集’(왕세무), ‘讀徐天目,吳甔甀二集’(서중행, 오국륜)이 실려 있는데 모두 의고파 문인들의 문집을 읽고 쓴 것이다.

요컨대 1606년에서 1608년[161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허균은 의고문파의 문학에 깊이 빠져 있었던 것. [독후시 몇 편을 근거로 그렇게 결론내릴 수 있나?] 이들의 문학적 성취에 대한 평가도 대단히 후함. 이 시기에 나온 「문파관작」이 ‘정’(情)을 우선시하는 문학적 언표라면 이 시기에 허균은 의고문파가 아니라 공안파에 몰두했어야 마땅. 요컨대 「문파관작」을 정을 중시하는 반 의고적 창작관과 연관짓는 것은 견강부회. (81쪽)

또 그는 이정기[주지번]로부터 왕세정의 만경과 같다는 평가를 받았다. “蘭嵎朱太史持所謂覆瓿稿四部者一帙來。諗余曰...其文紆餘婉亮。似弇州晩境”)

 

3장 허균과 이탁오·공안파와의 무관계성 (→외적 영향론에 대한 반박) 

-허균 문학이 공안파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하는 논의들

근거: 「與李蓀谷(己酉四月)」, “吾則懼其似唐似宋。而欲人曰許子之詩也。毋乃濫乎”

이탁오와 공안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졌음. 하지만 개성 강조는 공안파의 전유물이 아니고, 전후칠자의 의고적 창작에 대한 비판을 전제로 하는 것임. 그러나 허균에게는 전후칠자의 창작론에 대한 비판은 없음. 앞서 본 이달에게 보낸 편지(1609년 4월)에서도 의고파의 거두 이반룡을 이달[허균 자신]의 시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았음. 허균이 공안파 이론에 영향을 받았다면 이반룡을 평가 준거로 삼는 일은 없었을 것.

 

-허균과 양명학과의 관계: 성소부부고에 왕양명에 대한 언급은 다섯 번 나온다. ①명나라 십대가에 왕양명이 속한다 (간단한 사실 전달이라 별 참고 가치 없음) ②주지번이 젊어서 양명학에 흥미를 가졌다는 말 (참고 가치 없음) ③ 1601년 전운판관으로 전라도에 갔을 때 나주에서 만난 노인(魯認)의 이야기에 소개된 양명학. (일화 소개일 뿐 양명학에 대한 가치 판단은 없음) ④ 이정을 전송하면서 쓴 글(送李懶翁還怾怛山序) 중 “及聞東坡讀楞嚴, 而海外文尤極高妙. 近世陽明[王守仁], 荊川[唐順之]之文, 皆因內典, 有所覺悟, 心竊艶之, 亟從桑門士求所爲佛說契經者讀之. 其達見果若峽決而河潰, 其措意命辭, 若飛龍乘雲, 杳冥莫可形象, 眞鬼神於文者哉.” (동파가 능엄경을 읽자 해외의 문장이 지극히 높고 오묘해 졌고, 근세에 양명과 형천의 문장도 모두 불경으로 인해 깨달은 바가 있었다는 말을 듣고, 마음 속으로 적이 아름답게 여기다가[부러워하다가] 자주 불교의 선비로부터 소위 불경을 구해 읽어보았다. 그 달견은 과연 골짝에 물이 쏟아지고 강물이 터지는 것 같았고, 뜻을 쓰고 말을 부리는 것은 마치 나는 용이 구름을 탄 것 같아 아득해서 뭐라 형용할 수가 없었다. 정말 글솜씨가 귀신과 같았다) 당순지는 양명학파에 속하고, 또 동시에 의고적 창작론에 반대한 당송고문파. 여기서 중시할 사실은 불경과 산문과의 관계에 대한 판단이 왕양명과 당순지에 대한 허균 자신의 직접적 독서의 결과가 아니라, 양명과 당순지에 대한 타인의 언급을 접한 것이다. 의고문파의 글에 몰두했던 것과는 대조적. (참고, 기달산은 금강산의 이칭) ⑤ 한정록 “왕양명이 말하길, 일분의 인욕을 없애면 일분의 천리를 얻는다” 하였다. 『四子粹言』 이 말은 허균이 애독하던 하량준의 책 사자수언에 인용된 것을 다시 인용한 것이다.

허균 생전에 양명학 논란이 적지 않았음에도 허균은 불교나 도교에 대해서는 집요한 관심을 보이면서도 양명학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임. 허균이 반대파들의 공격을 받았던 이유는 불교 숭신이지 양명학 때문이 아니었음.

성소부부고에 양명학의 주요 개념어들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음. 양명학은 그의 주요 관심 영역에 접수되지 않았음.

 

-허균과 양명좌파의 관계: 관련 있다고 주장되는 근거 ① 「문파관작」의 “예교가 어찌 나의 자유를 구속하리. 뜨건 잠기건 내 마음에 맡길 뿐” ② 택당집에 나오는 이식의 전언. 양명좌파의 안산농과 하심은을 소개하면서 ...“남녀 정욕은 하늘이 부여한 것, 윤기의 분별은 성인의 가르침... 나는 하늘을 따르지 성인을 따르지 않겠다”

논리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영향을 받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조선 학계에서 발언 대상이 되었던 것은 양명학이지 당대에 왕성한 강학활동을 하고 있던 좌파는 아님. (좌파 계보, 88쪽) 양명좌파는 허균과 동시대인들이라서, 조선에 수입되어 허균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짧다. 16세기 말 17세기 초반 조선 학계는 양명 좌파의 존재와 그들의 학설에 대해 아직 충분한 정보를 얻지 못했다.

허균의 사유가 양명 좌파와 유사성이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의 내적 반성을 통해 도달한 것이지, 양명좌파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볼 수 없다.

-한정록에 수록된 이씨분서 발췌 대목과 원굉도의 ‘상정’과 ‘병화사’ 건: 소창청기에서 인용한 것. (이에 대해서는 부유섭, 허균이 뽑은 중국시에 밝혀져 있다) 을병조천록에서 이탁오의 장서를 구입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 일, 허균이 그 전에 이탁오를 알았다면 충격을 받았을리 만무. 따라서 1614년 이전에는 이탁오를 알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 물론 을병조천록에 「독이씨분서」 시의 내용을 볼 때 이탁오의 사상에 크게 공감한 것은 분명. 하지만 이씨분서를 읽은 후 3년에 처형당함. 따라서 허균의 사상에 미친 변화를 짐작할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

 

-공안파 건: 을병조천록의 「독이씨분서」 뒤에 「원중랑의 주평 뒤에 쓰다」라는 한시 2수가 실려 있음. (주평은 『상정』 끝에 붙어 있는 글, 원굉도가 자기 친구들의 음주 취미를 표현한 짤막한 산문) 하지만 병화사와 상정은 소창청기에서 인용된 것. 따라서 한정록에 인용된 것만으로 공안파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기는 어려움. (원굉도가 1594년 왕세정, 이반룡 등을 타겟으로 삼아 전후칠자의 의고적 창작론에 대해 공격한 일 92쪽, 원굉도의 저작 간행 시기, 허균이 원굉도 저작을 구입할 수 있었을 때는 1614~1615년 사이. 그 이전의 허균 발언에서 이탁오나 원굉도가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판단하는 것은 신뢰할 만한 근거가 없다.)

*소창청기에 인용된 것을 보았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 내용이 원굉도의 것임을 이유로 원굉도의 영향을 받았다는 식으로 말하는 논자에 대해서 강명관은 어떻게 답할 것인가?

*한정록에 인용된 원굉도의 글은 직접 인용이 아니라 재인용이라는 점은 한영규(2002), 부유섭(2004)가 먼저 밝혔음

(한영규, 「한적의 선망과 『한정록』」, 『문헌과해석』 19, 2002; 부유섭, 허균이 뽑은 중국 시 (1) -『당절선산(唐絶選刪)』, 문헌과해석 2004.) 

-허균 자신이 문집 편집을 끝낸 시점은? ‘화백시’ 맨 마지막 시로 추정해 보건대 1611년. 모두 1611년 이전의 시문만 수록. 척독들 역시 하한년은 1611년. 허균의 만년, 1612년부터 1618년까지 7년간의 작품은 존재를 확인할 도리가 없다.

 

 

*『공안파와 조선후기 한문학』 3장에서 “조선에서 최초로 공안파를 인지했던” 인물이 공안파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말은 모순 아닌가? 공안파를 인지한 것과, 공안파 문학과 유사하다는 것과, 공안파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 사이에는 개념적 차이가 있다는 식으로 대응할 것인지? 

 

4장 맺음

허균 문학을 이해하는 종전의 두 시각(내발론과 외적 영향론)은 각각 문제가 있음. 허균이 의고문파였다는 결론을 도출하려는 것이 아니라, 의고문파에 경도했다는 사실을 논증한 것이다. 성소부부고 일부를 거칠게 인용하여 선입견에 맞추어 나가는 자세는 반성되어야 할 것. 허균의 사유는 완결된 형태가 아니라 생성 중에 있었던 것. 생성의 과정과 결과를 엄밀하게 탐색하는 것이 허균 문학을 이해하는 길이 될 것.